진흙속의연꽃

선재도 뻘다방에서 바다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1. 07:50

 

선재도 뻘다방에서 바다를


선재도에 가면 뻘다방이 있다. 왜 뻘다방이라 했을까? 머드 커피(Mud Coffee)라 해서 뻘다방이라 하는 것이다. 스타벅스를 별다방이라 하는 것처럼.

뻘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 한잔에 6천원 한다. 서민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아무래도 자리세 때문일 것이다. 창 밖에 바다가 보이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마침 오후 햇살에 윤슬이 번뜩였다.

 


윤슬을 보면 한가한 느낌이다. 늦은 오후 햇살에 부서지는 윤슬을 바라보면 멍때리기 하기가 좋다. 커피 한잔에 모처럼 삶의 여유를 부려 본다.

바다에서 무한을 본다. 바다 위에 있는 하늘에서도 무한을 본다. 무한에 무한을 더하면 무한 플러스가 되는 것일까? 역시 무한일 것이다. 무한의 무한도 무한이 된다. 윤슬의 바다와 구름의 하늘에서 무한을 본다.

 


바다는 잔잔하지만은 않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두려움이 생겨난다. 세상을 집어 삼킬듯 할 때는 공포가 일어난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다고 하지만 나의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싱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나의 인식을 초월한 것과 맞닥뜨렸을 때 이상하고 신기하고 경이로운 세상이 된다.

자연에만 경이가 있을까? 종교에도 경이가 있다. 특히 윤회에 대한 것이 그렇다. 상윳따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놓고이 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려 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S15.1)

 


윤회의 무한성에 대한 것이다. 생물학적 윤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윤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존재가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묶여 있는 한 윤회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운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면 윤회의 끝도 알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한히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윤회에서도 무한개념이 도입된다. 이것도 경이라고 해야 할까? 이럴 때는 경외라는 말이 나을듯하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윤회는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윤회는 두려운 것이다. 다시 태어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수행승이라고 한다. (Samsara bhayam ikkhati bhikkhu)”(Vism.1.7)라고 했다.

수행자에게 윤회는 두려운 것이다. 이럴 때 윤회는 경외가 된다. 두려움과 공포가 함께 하는 경외를 말한다. 이와 같은 경외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상베가라고 한다. 상베가(sa
vega)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다.”(It.30)

 


두 가지 상베가(敬畏)가 있다. 하나는 윤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상베가이고, 또하나는 윤회에서 벗어남에 대한 상베가를 말한다. 전자는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윤회가 무서운 줄 안다면 벗어나야 할 것이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 수행승은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할 것이다. 어떻게 벗어나고자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현세에서 많은 행복과 희열을 느끼며, 번뇌의 부숨을 위하여 근원적 노력을 한다."(It.30)라고 했다. 이렇게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경외가 된다.

 


무한대를 접했을 때 인식의 한계를 느낀다. 이때 절망하게 된다. 그런 한편 이성적 판단을 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이는 숭고가 된다.

끝없는 바다, 가이없는 하늘, 밤하늘의 별에서 무한을 본다. 그 크기와 그 끝을 알 수 없을 때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어서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다. 절대무한을 사유할 수 있는 이성에 안도하게 된다. 이때 절대무한은 숭고가 된다.

대자연에서 숭고를 본다. 그러나 사람보다 더 숭고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특히 윤회를 벗어난 자가 해당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룬 성자들은 숭고의 대상이 된다.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현명한 자는 경외한다.

부지런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은

지혜로서 그처럼 관찰해야 하리.

 

이와 같이 열심히 지내며

차분히 적멸의 삶을 사는 님은

마음의 멈춤에 도달하여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리.”(It.30)

 


오늘 선재도 뻘다방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후 햇살에 윤슬이 반짝이었다. 끝 없는 바다와 가이 없는 하늘에 압도 되었을 때 겸손하게 된다. 그것은 경이를 넘어 숭고에 가깝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수행자에게서도 숭고를 본다.


2022-03-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