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늘 학인(學人)의 자세로 배우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19. 09:23

늘 학인(學人)의 자세로 배우고자

 

 

머리맡에 있는 경전의 위력을 느낀다. 그 짧은 시간에도 열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여섯 시가가 되려면 십여분 남았는데 그 시간 동안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매일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읽는다. 소설 읽듯이 처음부터 읽는다. 읽을 때는 정독한다. 소설 읽듯이 빨리 읽으면 안된다. 천천히 각주까지 꼼꼼히 살펴본다.

 

반드시 두 개의 형광 메모리펜을 준비한다. 노랑 것과 분홍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노랑면칠을 한다. 새기고 싶은 부위는 분홍 밑줄을 긋는다. 나중에 칠한 부분만 읽어 보면 된다.

 

오늘 아침 맛지마니까야 70번 경을 읽었다. 162경 중에서 70번 경이니 이제 43% 읽었다. 마치 대륙을 횡단하는 것 같다.

 

요즘 페이스북에서 어느 페친은 호주대륙을 오토바이로 횡단하고 있다. 벌써 두 달째이다. 매일 사진과 함께 소식을 전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실시간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다. 페친의 대륙횡단은 언제 끝날까?

 

오토바이 하나에 의지하여 미지의 대륙을 횡단한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일 것이다. 나는 경전 하나에 의지하여 가르침의 대륙을 횡단하고자 한다.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읽는 것을 말한다. 이제 두 달가량 되었으니 앞으로 세 달가량 걸릴 것 같다.

 

초기경전읽기 대장정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과속하지 않는다. 천천히 간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왜 그런가? 뜻과 의미를 새기며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읽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면 주마간산격이 되기 쉬울 것이다.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오늘 아침 끼따끼리 법문의 경’(M70)을 읽었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 많다. 그래서 노랑칠을 하고 분홍 밑줄을 그어 놓았다. 특히 지혜로 해탈한 님(paññāvimutta)’에 대한 것이 그렇다.

 

지혜로 해탈한 자가 있다. 이를 주석에서는 건조한 통찰수행이라고 했다. 이는 숙카비빳사까(sukkhavipassaka)’를 번역한 말이다. 한자어로는 건관(乾觀)라고 한다. 마른 관찰수행이라는 뜻이다.

 

건관은 위빠사나 수행을 뜻한다. 선정체험 없이도 찰나삼매에 의하여 현상을 관찰하여 지혜를 얻는 수행을 뜻한다. 경에서는 여기 어떤 사람이 형상을 뛰어 넘고 물질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 않았으나 지혜로써 보아 모든 번뇌를 부수면, 수행승들이여, 이 사람을 지혜로 해탈한 님이라고 부른다.”(M70)라고 했다.

 

부처님은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는 양면으로 해탈한 님, 지혜로 해탈한 님, 몸으로 깨우친 님, 견해를 성취한 님, 믿음으로 해탈한 님, 가르침을 따르는 님, 믿음을 따르는 님”(M70)을 말한다. 최상은 양면으로 해탈한 자가 될 것이다. 팔선정과 지혜로 해탈한 자를 말한다. 그 다음은 지혜로 해탈한 자이다. 선정체험은 없어도 지혜로 진리를 꿰뚫은 자를 말한다. 일곱 종류의 사람 중에서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이제까지 경전공부한 것을 반성하면서

 

불교에 심취해서 불교공부한지 십년이 넘었다. 공식적으로 2004년에 입문했으니 18년째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경전공부를 했다. 생업이 있는 상태에서 십일 집중수행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선정수행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가장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것이 경전이다. 그래서 경전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고 있다.

 

이제까지 경전공부한 것을 반성한다.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초기경전을 말한다. 필요한 부분만 본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맡에 경전을 놓고 처음부터 읽어 나가고 있다.

 

경전을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때 색칠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학생이 시험 볼 때 밑줄 그어 놓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후기를 쓰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글을 남긴다. 강의나 강연을 들었을 때도 글을 남긴다. 후기를 쓰는 것이다.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글을 남기면 두 번, 세 번 공부하는 것이 된다. 블로그에 올려 놓으면 블로그 검색창을 이용하여 찾을 수 있다. 나중에 글을 쓸 때 참고 자료가 된다.

 

블로그는 거대한 나에게 있어서 거대한 지식창고나 다름없다. 애써 작성한 글을 두 번, 세 번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자기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잡문은 논문도 아니고 법문도 아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다.

 

믿음을 따르는 자에 속하고 싶지만

 

일곱 종류의 사람 중에서 나는 어느 단계에 속할까? 아마 가장 낮은 단계, 믿음을 따르는 님(saddhānusārin)’의 단계에 속하고 싶다. 어떤 단계인가?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믿음을 따르는 사람이란 어떠한 자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참사람이 형상을 뛰어넘고 물질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였고 또한 지혜로써 보아 모든 번뇌를 아직 부수지 못했으나, 여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만큼 그리고 사랑이 있는 만큼 또한 나아가서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과 같은 법들을 갖추었다면, 수행승들이여, 이 참사람을 믿음을 따르는 자라고 부른다.”(M70)

 

 

믿음을 따르는 자에 대한 주석을 보면 예류자들이 포함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믿음을 따르는 자는 아니다. 다만 가장 낮은 단계이기 때문에 낮은 단계라도 되어 보고 싶은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왜 돈오돈수가 먹혀 들어 갔을까?

 

부처님은 깨달음의 단계에 대하여 일곱 단계로 설명했다. 낮은 단계에서부터 보면 1)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n), 2)가르침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n), 3)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4)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appatta), 5)몸으로 깨우친 자(kāyasakkhīn), 6)지혜로 해탈한 자(paññāvimutta), 7)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āgavimutta)를 말한다.

 

부처님은 왜 일곱 종류의 사람을 말했을까?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M70)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점오점수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한국불교에서 천년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돈점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돈오돈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불교에서는 돈오돈수가 먹혀 들어 갔을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화된 불교 때문이고, 또 나는 초기경전을 등한시했기 때문으로 본다.

 

중국불교는 중국화된 불교를 말한다. 선불교가 대표적이다. 선불교는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이다. 그래서 선불교의 종지는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립문자라는 말로 대표된다. 이처럼 직관을 중요시하다 보니 돈오돈수라는 사상이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돈오돈수는 없다. 있다면 점오점수는 있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초기경전 도처에서는 점진적인 깨달음에 대하여 무수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는 어쩌면 상식일지 모른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절차가 있고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초기경전을 보지 않았거나 등한시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보여 진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이유

 

부처님은 일곱 가지 단계를 말씀하셨다. 가장 아래 단계는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n)이다. 그 다음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n)이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어떤 자일까? 경에서는 여래가 선언한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또 나아가서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과 같은 법들을 갖추었다면, 수행승들이여, 이 참사람을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고 부른다.”(M70)라고 했다.

 

일곱 종류의 사람 중에서 가장 아래 단계는 믿음을 따르는 자이다. 삼보에 대한 믿음만 낸다고 해서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석에 따르면 최소한 흐름에 든 경지, 즉 수다원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나에게 있어서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

 

부처님은 지혜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지혜가 단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자에게 스승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는 가까이 간다. 가까이 가서 스승을 공경한다. 스승을 공경할 때에 스승에게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일 때에 그에게서 가르침을 듣는다. 가르침을 들을 때에 그것을 기억한다. 기억할 때에 가르침의 의미를 규명한다. 의미를 규명할 때에 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한다. 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할 때에 의욕이 생겨난다. 의욕이 생겨날 때에 의지를 굳힌다. 의지를 굳힐 때에 그것을 깊이 새긴다. 깊이 새길 때에 정진한다. 정진할 때에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성취하고 지혜로써 꿰뚫어 본다.”(M70)

 

 

이 구절은 새기고 싶다. 이 글을 쓴 목적도 이 구절을 오래 동안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올려 놓으면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최상의 지혜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가장 첫번째 조건이 스승에 대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는 등 반대 코스를 밟게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은 결국 최상의 지혜로 이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는 정신적인 몸으로 열반, 궁극적 진리를 성취한다.”(Pps.III.193)라고 했다.

 

정신적인 몸(nāmakāya)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신체와 정반대인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 몸으로 깨우친 님의 경’(A9.43)에 따르면 초선정부터 가능하다. 몸이 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무리임을 말한다. 이러한 통찰은 사마타를 통해서 해탈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섯 번째 단계인 몸으로 깨우친 자(kāyasakkhīn)’가 이에 해당된다. 당연히 양면으로 해탈한 자에게도 해당된다.

 

부처님도 담마를 외웠다!

 

경을 읽으면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도 담마를 외웠다!”라는 사실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네 구절의 진리가 있다. 그것을 외우면, 현명한 사람이라면 재빨리 지혜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외워 보이겠다. 그것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M70)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네 구절의 진리(catuppada)를 외우라고 했다. 주석에서는 사성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하신 것이 모두 진리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가능하면 외워야 할 것이다. 어떻게 외워야 할까? 이는 정진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믿음을 강조했다. 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알려고 열망하는 믿음 있는 제자”(M70)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1)스승에게 가까이 가고, 2)스승을 공경하고, 3)스승의 말에 귀 기울이고, 4)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5)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6)가르침의 의미를 규명하고, 7)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하고, 8)수용할 때 의욕이 생겨나고, 9)의욕이 생겨날 때 의지를 굳히고, 10)의지를 굳힐 때 깊이 새긴다고 했다. 이렇게 열 가지 단계로 진행된다.

 

매일 빠다나경을 암송하면서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은 최상의 진리로 이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스승의 가르침을 알려고 열망하는 믿음 있는 제자라면, 그는 이와 같이 ‘기꺼이 내 몸에서 나의 가죽, 힘줄, 뼈만 남아도 좋다. 살과 피는 말라버려라. 그러나 참사람의 인내, 참사람의 정진, 참사람의 용맹으로써 성취해야 할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한, 나의 정진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실천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M70)

 

 

부처님의 용맹정진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가죽, 힘줄, 뼈만 남아도 좋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내가 거룩한 경지를 얻지 못하는 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Pps.III.194)라는 말이라고 했다.

 

 

요즘 빠다나경(Sn.3.2)을 암송하고 있다. 모두 25개의 게송으로 된 것으로 66일 걸려서 외웠다. 요즘에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일 암송한다. 그런데 빠다나경을 보면 가죽, 힘줄, 뼈만 남아도 좋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정진에서 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차 마르게 할 것이다.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는 나에게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Stn.433)라는 게송이다.

 

부처님은 피가 마르도록 정진했다. 그래서 힘줄이 보이고 뼈와 가죽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용맹정진을 말한다. 죽음을 각오한 정진이다. 이런 정진력은 부처님의 믿음에서 나온다. 매일 빠다나경을 암송하면서 이 대목에 이르면 부처님이 용맹정진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늘 학인(學人)의 자세로 배우고자

 

오늘 아침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읽으면서 내용에 감명받아 긴 글을 썼다. 이런 글은 써 놓으면 남는다. 한번 말하고 마는 것과 다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려 놓으면 누군가는 읽어 볼 것이다. 블로그에 올려 놓으면 다음 글을 쓸 때 참고 자료가 된다.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틈 날 때마다 읽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책을 읽을 여유가 없다. 아니 다른 책을 보는 것이 싱겁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진리의 말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오래오래 새겨 두고자 한다. 이런 것도 공부이고 정진일 것이다. 또한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근기에 맞게 공부하면 된다.

 

늘 학인(學人)의 자세로 배우고자 한다. 부처님의 담마는 너무나 넓고 깊어서 끝이 없는 것 같다. 이 생에서 못하면 다음 생에서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이 생에서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그래야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예류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공덕을 많이 쌓았다고 하더라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오늘도 담마와 함께 한다. 집에 가면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 읽기를 한다. 마치 가르침의 대륙을 횡단하는 것 같다. 오토바이로 호주 대륙을 몇 달에 걸쳐 횡단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담마의 대륙을 초기경전 하나에 의지하여 횡단하고자 한다.

 

 

2022-05-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