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권 담마의 거울 2014 IV, 악업은 물론 선업도 쌓지 말라고 한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백권의 책을 만드는 것이다. 현재 59권까지 만들었다. 오늘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60번째 책의 서문을 쓰기 위한 것이다.
생애 통산 60번째 책의 제목을 ‘60 담마의 거울 2014 IV’로 정했다. 불교 교리와 교학에 대한 글모음이다. 2014년 8월 9일부터 10월 18일까지 쓴 것이다. 목차를 보니 모두 24개의 글로 356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미쳐 날뛰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2. 청정한 고기와 부정한 고기
3. 어떻게 설법을 할 것인가? 차제설법과 방편설법
4. 거듭 태어나려는 자는
5. 띳사와 멧떼이야, 그리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6. 중도와 십이연기의 관계는? 초기불교의 일곱가지 중도사상
7. 버섯구름형 인구피라미드를 보고
8.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와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
9. 원한 맺힌 자에게 “삽베삿따바완뚜수키땃따”
10. 세월호유가족들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
11. 국가발생 기원과 국가범죄
12. 왜 뇌가 아니라 심장인가?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하여
13. 움켜진 주먹을 펴지 않는 스승
14.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부처님의 가르침
15. 비인간으로부터 해코지 당하지 않으려면
16. 지금 철학하자는 건가? 불자들이 믿는 종교로서 불교
17. 악한자들이 누리는 행운과 선한자들이 겪는 불행
18. 여자보기를 가족처럼
19. 기쁨으로 보시할 때
20. 똥처럼 말하는 사람
21. 식물도 불살생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22. 출가와 환속을 여섯 번 반복한 찟따핫따
23. 수명의 사마시시를 성취한 뿌띠갓따 띳사 장로이야기
24. 일반인들이 깨닫기 힘든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2014년은 어떤 시기였을까? 밥만 먹고 글만 썼던 것 같다. 담마에 대한 글만 5권을 썼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일상에 대한 글은 4권이 된다. 파일로 되어 있어서 앞으로 책을 만들어야 할 것들이다.
2014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무래도 세월호만한 큰 사건이 없었을 것이다. 이를 글로 표현했다. 목차에서 10번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2014-09-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세월호에 대하여 수많은 글을 썼다. 왜 세월호와 같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불교적 해법을 제시해 보았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8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세월호에 대한 집회가 있을 때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특히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 형식의 집회에 참여하여 사진과 동영상을 곁들여 기록을 남겼다. 그것은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이 나의 마음 같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이 난지 백일째 되던 날 서울광장에서 열린 추모집회에 참석했다. 그때 세월호 유가족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 상윳따니까야 ‘눈물의 경’(S15.3)을 인용하여 글을 썼다.
눈물의 경은 어떤 경일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때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딱 들어 맞는 경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하면서 사고와 팔고에 대하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괴로움 중에서 일상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怨憎會)과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愛別離)일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세월호 사건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해당된다. 동시에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에도 해당된다.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했을 때 슬픔은 극에 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인들은 이런 사건을 접하면서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세월호는 아직도 사고원인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불행한 사건이다. 나의 일이 아니라서 모른척해서는 안된다. 언제 나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럴 때 불교인들은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여기 불행하고 가난한 자가 있다. 이를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 연민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어 할지 모른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런 한편 분노가 치밀지도 모른다. 사회가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화가 나는 것이다.
종종 뉴스에서 생활고 때문에 가족이 동반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럴 때 사람들은 연민을 느끼면서 동시에 분노한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보았을 때 연민과 분노라는 두 가지 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것을 뛰어 넘는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1)라고 관찰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남과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보았을 때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역지사지에 해당될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과 다르다.
연민의 마음은 사무량심중의 하나로서 아름다움 마음부수 중의 하나이다. 연민의 마음은 불행에 처해 있는 자에게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바라는 마음이다. 또 한편으로 연민의 마음은 악한자에 대하여 내기도 한다. 악한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을 생각하면 연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민은 연민의 마음을 내는 사람과 연민의 마음이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자는 아름다운 마음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선업공덕이 된다. 반대로 연민의 대상이 되는 자는 어떤 마음이 들까? 아무래도 불평등한 관계가 되기 쉽다.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불편한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 나에게 연민이나 동정을 보낸다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로 상하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공평한 관계가 아니다.
가장 공평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마음을 내면 연민의 마음을 내는 자나 연민의 대상이 되는 자나 모두 평등한 위치에 있게 된다.
한량없는 윤회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불행하고 가난한 존재로 살았던 때도 있었고,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았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서나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동등해진다. 이렇게 관찰하면 분노가 있을 수 없다.
한때 부자들에 대한 증오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가난할 때 분노로 표출되었다. 사회가 부조리하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부동산투기 등 불로소득으로 이루어진 부자의 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각도 바뀌었다. 결정적으로는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부터 변했다. 대표적으로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1)라는 가르침을 접하고 나서 분노를 거두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가 끝일까?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량없다. 나의 상상을 초월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깨버린다. 이런 것이다.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자나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 대하여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그리고 부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수 없다. 단지 관찰하는 마음만 일어날 것이다.
나는 어쩌면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겪을 것을 다 겪어 보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1)라고 했다. 불행과 행복을 겪을 만큼 겪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윤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놀랍게도 불교에서는 악업은 물론 선업도 쌓지 말라고 한다. 왜 선업도 쌓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은 선업으로 인하여 재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선업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한량없는 윤회에서 언젠가 악행을 한적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선업공덕이 다하면 악처로 떨어질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윤회를 끝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육조단경에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문관 23칙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악(善惡)의 사량(思量), 곧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생각을 끊은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출처가 니까야에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놀란 것이 있다. 대승불교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가르침 상당수가 초기경전에 있다는 사실이다! 육조단경의 불사선불사악에 대한 것도 그렇다. 이 말은 숫따니빠따에서 발견된다.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
그에게는 집착이 없고,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일이 끊어졌기 때문에
타오르는 번뇌가 없습니다.”(Stn.715)
이렇게 본다면 육조단경에서 나오는 불사선불사악의 출처는 숫따니빠따가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라고 했다. 공덕마저 버리라는 것은 선업도 쌓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윤회를 벗어나려면 선한 공덕도 쌓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선한행위를 하지말라는 것은 아니다. 선한행위를 하되 선한 행위를 했다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선업공덕을 쌓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런 마음을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이라고 한다. 업을 쌓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를 아라한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의 마음이 되려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이 “건축사여,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습관이 소멸되는 길입니까?”(M78)라며 물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악하고 불건전한 습관을 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동시에 착하고 건전한 습관도 버리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육조단경에서 말하는 ‘불사선불사악’과 같은 것이다. 또 숫따니빠따에서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일이 끊어졌기 때문에”(Stn.715)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상윳따니까에서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S7.20)라는 말과 같다. 이 모든 출처가 부처님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착하고 건전한 습관마저 버리라고 했다. 어떻게 버려야 할까? 부처님은 이를 사정근으로 설명했다. 악하고 불건전한 습관을 사정근으로 버리듯이 착하고 건전한 습관도 사정근으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거룩한 길(阿羅漢 向)은 착하고 건전한 습관들의 소멸을 닦는 것이고, 거룩한 경지(阿羅漢 果) 그것들은 소멸되었다고 말해진다.”(Pps.III.207)라고 했다.
오늘 책 한권의 서문을 썼다. 서문을 쓸 때는 은근히 스트레스 받는다. 어떻게 써야할 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평소 글쓰기 하는 방식으로 쓰면 될 것 같다. 그것은 항상 현재시점에서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문이 길어졌다.
2022-06-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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