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세계최고전망 망월사 영산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22. 12:14

세계최고전망 망월사 영산전
 
 
제대성중, 제대성중”끊임없이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가만 듣고 있으면 자장가처럼 들린다.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다. 나한기도 현장에서 본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가 오고 난 후의 날씨는 쾌청하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것 같다. 하늘에 구름은 잔뜩 끼었지만 층층 가이 없는 구름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는 축복받은 계절에 망월사로 향했다.
 
망월사는 예정 없던 것이다. 본래 자일리에 갈려고 했다. 처의 고향이다. 친척 중에 한명이 돌아 가셔서 장모를 모시고 가고자 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노인의 건강은 건강이 아니라고 했다. 오늘 건강하다가도 어찌 될지 모른다. 장모가 설사를 한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움직일 수 없다. 포천 자일리 행은 취소되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망월사에 가보기로 했다. 전망이 좋은 절이다. 그러나 올라가는 데는 노고와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무려 2키로의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절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을까? 얻어 먹을 수도 있고 얻어 먹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공짜로 먹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보시함에 돈을 넣는다.
 
정오이전 망월사 도착을 목표로 했다. 시간상으로 가능했다. 너덜길을 오르고 떠 올라 올라갔다. 그때 망월사에서 내려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나가는 말로 “지금 가시면 점심공양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의중을 간파당하는 것 같았다. 그런 한편 안심이 되었다. 절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어느 지점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렸다. 아주 희미해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법회 법문 소리라고 생각했다. 영인스님의 신묘장구대라니일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점차 다가갈수록 소리는 분명해졌다. 오르면 오를수록 소리는 점차 커지고 뚜렷해졌다. 스님의 법문도 아니고 영인스님의 신묘장구대라니나 금강경도 아니었다. “제대성중, 제대성중,…”이라는 소리가 무한반복되어 들려 왔다.
 
제대성중, 어떤 뜻일까? 아마 화엄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경우 “화엄성중, 화엄성중”하며 정근해야 한다. 그런데 제대성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절에 다 와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나한기도 기간 중이었기 때문이다.
 

 
망월사에 도착했다. 무려 2키로의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 왔다. 거의 한시간 가량 걸린 것 같다. 도착하니 11시 55분이었다. 먼저 공양식당으로 들어 갔다.
 
절에 가면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망월사는 어떠할까? 식당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놀랍게도 봉사자들은 “식사하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이런 절은 보지 못했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달달한 믹스커피가 최상의 맛이다. 젊고 건장한 체구의 스님 역시 친절하다. 커피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절은 없었다. 대접 받는 기분이 되었다.

 

 

 
불청객이 되었다. 마치 뜨내기 손님과도 같다. 그럼에도 점심식사시간에 한끼 식사를 제공받았다. 절에 가면 늘 먹는 비빔밥이다. 쌀 한 톨 남기기 않고 깨끗이 비웠다. 산을 올라오느라 에너지소모가 심했던 것 같다.
 
망월사는 오래 전에 와 보았었다. 이번이 두 번째이다. 전망 좋은 절로 기억된다. 검색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검색이 되지 않았다. 블로그 내 검색창을 이용했으나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왜 검색되지 않을까? 아마 그것은 다음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이전했기 때문으로 본다. 과거에 올렸던 글이 분명히 있음에도 검색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인터넷포털의 퇴보라 아니할 수 없다.
 
티스토리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달리 선택이 없다. 다음 블로그는 문 닫은지 수년 되었다. 다음 블로그는 망한 것이다. 블로그가 네이버에 있었더라면 검색문제는 발생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도 흥망성쇠가 있고 무상한 것이다.
 
수동으로 검색했다. 국내성지순례 카테고리에 들어가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검색한 것이다. 그 결과 2008년 망월사참배 기록을 찾아 내었다. 이는 ‘도봉산 망월사, 역명이 절이름과 같은 망월사’(2008-4-11)라는 제목의 글이다.
 
망월사는 16년전에 가보았다. 그때 기록을 보니 4월 11일이다. 어제 날자는 4월 21일이었다. 불과 10일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신록의 세상이 되었다. 2008년 사진에서는 신록이 아니었다.
 

 
전망 좋은 집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망월사는 전망 좋은 절이다. 도봉산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하여 깍아지른듯한 바위에 솟아 있는 영산전을 보면 세계최고의 풍광을 자랑한다. 전세계적으로 내놓을만하다.
 

 
사람들은 돈을 들여 해외로 여행다닌다.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기 위한 여행도 있다. 중국 장가계가 좋다고 하지만 망월사 영산전도 그곳 못지 않게 장쾌하다.
 
망월사는 선원이 있는 절이다. 망월사 ‘천중선원’은 공부가 잘 되는 절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안내판에 따르면 용성, 만공, 한암, 성월, 전강, 금오, 춘성 스님등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공부했다고 한다.
 

 
망월사는 스님들에게 도를 닦기 좋은 절로 알려져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지리적 조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앟는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점이다. 그것도 도봉산 팔부나 구부 능선에 있다. 무엇보다 차가 다니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절에는 차를 가지고 갈 수 있다. 아무리 심산유곡에 있어도 어지간하면 도로가 뚫려 있어서 차를 가지고 경내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도봉산 거의 꼭대기에 있는 망월사는 차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망월사는 주차장에서 2키로 올라가야 한다. 걷는 것 외 달리 교통수단이 없다. 그렇다고 연주암에서처럼 케이블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봉산 거의 꼭대기에 이렇게 여법한 가람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망월사 전각을 보면 불가사의한 느낌이다. 도로도 없는데 어떻게 이처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무거운 건축자재를 어떻게 날랐을까? 지게를 지고 날랐을까? 헬리콥터로 날랐을까?
 
깊은 산속 암자나 절을 보면 불가사의하고 불가사량하다. 이런 심산유곡에 절이 있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 불가사의, 불가사량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기적 같은 일이다. 이런 곳에서 참선공부를 하고 이런 곳에서 기도를 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을 것 같다.
 

 
망월사는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기 힘든 절이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공부를 목적으로 망월사에 왔다면 출퇴근하듯이 다니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들어가면 공부가 될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제대성중, 제대성중”졸리는 듯한 스님의 목소리는 경내에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만역 결제철이라면 어림도 없는 마이크 방송소리이다. 지금 해제철이기 때문에 마이크 사용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제대성중 정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영산전이 오롯이 서 있다. 기적의 구조물이다. 높이가 아파트 십층 이상 되는 절벽 바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영산전에는 기도 드리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스님은 목탁을 치며 끊임없이 “제대성중, 제대성중”하며 정근 하고 있다. 두 시간 이상 계속 되고 있다. 혹시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이 아닐까 의심 했지만 틀림 없는 실시간 목소리이다.
 
졸리는 듯한 목소리의 스님은 두 시간 이상 정근을 했다. 오후 두 시가 되자 다른 스님이 시작했다. 이번 스님은 운율이 독특하다.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러나 제대성중이라는 말은 한결같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절박한 것일까?
 
절에 가면 종종 보는 문구가 있다. 이는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줍니다’라는 문구를 말한다. 이곳 망월사에도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나한 7일 기도’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기간을 보니 4월 17일부터 4월 23일까지 7일간이다. 그러고 보니 4월 21일 일요일은 나한기도 중에 있었던 날에 해당된다.
 

 
제대성중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제대성중은 다름 아닌 나한을 일컫는 말이다. 안내판을 보니 “나옹선사가 조성하였다고 전하는 영산전의 16나한 등이 있다.”라는 문구에서 알게 되었다.
 
제대성중 정근은 16나한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화엄성중 정근했다면 화엄신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 된다. 그러나 망월사에서는 제대성중 정근을 하고 있다. 더구나 16나한을 모신 영산전에서 나한 7일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성중은 16나한임에 틀림 없다. 과연 기도는 이루어질까?
 

 
벼랑위 영산전은 18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그때 감정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 없다. 기도에 대한 것도 그렇다. 이는 과거에 “더 이상 갈래야 갈 수 없는 절벽이나 동굴이야말로 최적의 기도 장소가 아닐까. 망월사도 역시 도봉산 깊숙한 가파른 곳에 걸터 앉아 있는 천혜의 기도도량이라 볼 수 있다.”(2008-04-11)라고 써 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기도는 어디서나 할 수 있다. 기도는 골방에서 홀로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명기도처는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있다는 것이다. 절벽, 동굴, 산꼭대기, 해안가가 대표적이다. 왜 이런 곳에 유명기도처가 있을까?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행복한 자는 기도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불행에 처한 자가 매달리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본다. 막다른 코너에 몰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어떤 이는 큰 절만 다닌다. 그 사람은 봉은사에 다니고 기도는 조계사에서 한다. 자신의 차를 이용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먹고 살만한 것 같은데 어떤 기도를 하는 것일까? 혹시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을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도 한꺼풀만 들어가면 말 못할 고민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간절한 기도를 할 것이다.
 
기도를 하면 소원은 이루어질까? 유명 기도처에서 기도를 하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 구례 사성암에서도 이런 문구를 보았고 팔공산 갓바위에서도 이런 문구를 보았다. 이번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도 보았다.
 

 
기도는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망월사에서는 7일기도 기간으로 정한 것 같다. 수능이 있다면 백일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여러 날 또는 여러 달 걸려 기도하는 것이다. 단 한번의 기도로 이루어지는 일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본다.
 
기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일신교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마치 절대자에게 무언가 이루어달라고 바라는 것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절대자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무엇보다 연기법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같은 제일원인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는 불공(佛供)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부처님에게 공양드린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언젠가부터 기도라는 말이 대유행하기 시작했다. 혹시 기독교따라하기 아닐까?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면 무언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한다. 배가 난파 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신봉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인이라면 조용히 눈을 감고 때를 기다릴지 모른다.
 
불교인들은 내세와 윤회를 믿는다. 그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담담히 받아 들일 수 있다. 이는 계행이 청정하고 보시공덕과 수행공덕을 지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왜 그런가? 죽으면 천상과 같은 선처에 태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이 대수일까? 한번도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나 살고 죽는 것은 일상이나 다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과 죽음의 생멸이 있다. 이를 일생으로 확장하면 일생윤회가 된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는 공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일생을 산 사람들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한다. 일생 동안 이룬 것을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재물을 축적한 자에는 죽음은 축복이 된다. 이 지긋지긋한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난다면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축복은 불사(不死)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불공을 강조했다. 이는 꽃이나 향 등으로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어떤 것인가? 부처님은 “아난다여, 수행승이나 수행녀나 남겨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D16.108)라고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말했다.
 

 
최상의 불공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S1.43) 라고 했다.
 
불교인들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가르침과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공부가 덜 되었을 때는 가르침(dhamma)에 의지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공부가 되면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성자가 되면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는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반은 불사이고 불생이다. 이와 같은 궁극적 경지를 보았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게 되는데 일곱 생 이내에 지긋지긋한 윤회가 끝나게 된다.
 
열반을 체험한 성자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이 의지처가 되고, 자신이 귀의처가 되고, 자신이 피난처가 된다. 자신을 등불로 하여, 자신을 섬으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된 자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 이럴 경우 타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 어떻게 기도하는가? 이는 남방테라와다불교의 자야망갈라가타에서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라는 후렴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말은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와 행운이 항상 그대와 함께 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기도는 상대방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인가? 이는 상대방에게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라고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기도는 누구에게나 해 줄 수 있다. 절대자와 거래하듯이 하는 기도가 아니다. 상대방에게 항상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기도인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상대방에게 항상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원을 하는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불운보다 행운이 오기를 바란다.
 
한번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개인 업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개인업은 어찌할 수 없다. 이럴진대 내가 지은 과거의 업을 소멸시켜 달라고 부처님에게 비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말적 상황에 처했을 때 기도처를 찾는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절박한 심정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명기도처는 절벽, 동굴, 산꼭대기, 해안가 등과 같이 막다른 곳에 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다. 특히 절벽 같은 경우 한발만 더 내딛으면 낭떨어지로 떨어진다. 기도처는 이런 곳에 있다.
 
지금 막다른 골목에 이른 자가 있다. 더 이상 갈 수 없다. 모든 것이 절망적 상황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기도처를 찾아 갈 것이다. 봉은사나 조계사와 같이 차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깊은 산중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차도 갈 수 없는 곳, 더구나 벼랑에 있는 기도처이다.
 

 
망월사 영산전은 벼랑 위에 있다. 해발 고도가 꽤 높은 곳에 있어서 하늘과 가까이 있다. 벼랑에 선 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발만 내 딛으면 죽음이다. 하늘로 솟아날 가능성도 없다. 절망에 이른 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제대성중, 제대성중”하며 정근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릴지 모른다.
 
 
2024-04-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