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천장사 2024년 금강 방생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8. 11:01

천장사 2024년 금강 방생법회
 
 
이제 완연한 봄이다. 온도는 십도 이상이다. 낮에는 이십도 이상이다. 무엇보다 나무에 싹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봄은 개나리, 진달래, 벚꽃과 함께 온다. 그러나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봄은 나무에 싹이 올라 올 때 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 간다. 마치 갓난아기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과 같다. 도시의 가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에서 싹이 올라 오면 세상은 개벽된다. 순식간에 초록의 세상으로 변한다.
 
생명이 충만한 계절이다. 이곳저곳에서 꽃들이 릴레이하듯 피어난다. 대지에는 초록의 빛깔이 완연하다. 이렇게 충만한 계절에 방생을 다녀왔다. 천장사 2024년 방생법회를 말한다.
 
천장사 2024년 방생법회
 
천장사 방생법회는 일년에 한번 있다. 삼월삼짓날이 방생법회날이다. 양력으로 4월 11일이다. 그러나 평일날이기 때문에 앞당겨 4월 7일 일요일에 시행하기로 했다. 마치 생일잔치를 뒤에 하지 않고 앞당겨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방생법회를 앞두고 몸이 아팠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복부 부위에 통증이 온 것이다. 이런 현상을 잘 알고 있다. 잠을 못 잤을 때와 스트레스 받았을 때 발생된다. 십여년 되었다. 지병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있는 병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나에게 일시적으로 닥친 통증은 시간 지나면 낫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병원에 가지 않는다. 마치 감기 같은 것이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면 낫는다.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천장사 방생법회를 앞두고 사흘 전부터 통증이 발생했다. 다음 날이면 방생법회 가는 날이다. 다음 날 까지는 나아야 한다. 잠을 청했다. 타이레놀 한 개 먹고 잤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 정도 상태이면 갈 만했다. 운전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먼 길을 가려면 새벽에 나서야 한다. 집에서 새벽 5시 40분에 출발했다. 백권당 사무실에 들러 커피를 만들었다. 절구질해서 만든 절구커피를 말한다. 휴게소에서 사 마시면 돈이 든다. 사오천원 절감한 것이다.
 
4월 7일 일요일 오전 길은 막히지 않았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제한 최고속도로 달렸다. 안양에서 행담도 휴게소까지 삼사십분 걸렸다. 아침 식사를 해야 했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무엇으로 먹어야 할까? 메뉴판을 보니 만원은 주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아침을 성찬으로 먹을 필요는 없다. 허기만 때우면 된다.
 
행담도 휴게소에서 선택하는 메뉴가 있다. 그것은 자율식당에서 콩나물김치국을 먹는 것이다. 한 그릇에 3,500원이다. 여기에다 천원짜리 백반 한공기를 추가한다. 이것 외 다른 반찬은 없다.
 
콩나물김치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김치 없이 반찬 없이 먹은 것이다. 이렇게 먹어도 훌륭한 아침식사가 된다. 비용은 고작 4,500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렇게 먹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고북면 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요즘에는 행정복지센터라고 말한다. 너른 주차장에는 전세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오전 9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운전기사가 길을 헤맬 때
 
천장사 방생법회는 두 번째로 참여한다. 작년 처음으로 방생법회에 참여했다. 기록을 보니 2023년 4월 22일이다. 올해보다 보름 가량 늦다. 아마 윤달이 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천장사에는 큰 행사가 있을 때 간다. 방생법회도 큰 행사 중에 하나에 속한다. 올해에는 21명이 참여했다. 접수자는 38명이다. 작년 기록을 보니 참가자는 26명이었고 접수자는 33명이었다.
 
오전 9시에 출발했다. 목적지는 금강이다. 황산대교 교각 아래서 방생법회가 열린다. 작년에 갔던 곳이다. 세도유채꽃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다리를 건너면 강경이다. 강경젖갈로 유명한 곳이다.
 

 
방생법회 참가자자들 구성은 다양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노보살들이 많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천장사를 다니는 보살들이다. 나이가 무려 90세에 달하는 노보살도 있다. 마치 소풍가듯이 가는 것이다.
 
목적지까지 순탄치는 않았다. 운전기사가 길을 헤맨 것이다. 엉뚱한 다리로 갔다가 되돌아 오는 등 믿음이 가지 않았다.
 
여행자는 운전기사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운전기사가 운전을 잘못하여 사고라도 난다면 어떻게 될까? 운전기사를 탓하게 될 것이다. 운전기사가 길을 잃고 헤매기라도 한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든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이든지 리더가 있다. 리더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리더가 잘못 된 길로 인도 했을 때 모두를 공멸로 몰고 갈 수 있다.
 
 
소들이 강을 건너는데,
우두머리 황소가 잘못 가면,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르네.”(A4.70)

 
 
세렝게티 평원에서 누우 떼는 마라강을 건너야 한다. 강에는 악어 떼가 있다. 우두머리 리더가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악어 떼가 득실거리는 물에 뛰어 든다면 어떻게 될까? 누우 떼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정치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마치 운전기사와도 같다. 그런데 대통령이 초보운전자라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불안에 떨 것이다. 더 나아가 무면허인 자라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금강평원
 
목적지에 도착했다. 황산대교 아래를 말한다. 작년에는 유채꽃축제와 방울토마토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때 사람과 차로 가득했다. 그러나 올해는 매우 한산하다. 올해는 축제가 없는 것이다.
 

 
세도는 매우 너른 평원이다. 금강 갯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 유채밭이 있다.
 
노랑 유채가 절정이다. 따사로운 햇살에, 생명 충만한 계절에 노란 유채평원을 보니 마음이 한없이 넓고 평화로워졌다.
 

 
방생지는 꽤 걸어 가야 한다. 금강과 황산대교 교각이 만나는 곳이 목적지이다. 버스에서 거의 오백미터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상, 과일, 돗자리 등 법회에 사용될 것들을 하나씩 들고 먼 거리를 걸어 갔다.
 

 
금강은 생명으로 충만했다. 그렇다고 유정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도 생명이다. 아마 금강이 범람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일강은 주기적으로 범람한다고 한다. 그런데 강이 범람하고 나면 농사가 잘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을 금강에서 보았다. 곱고 고운 흙이 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에는 생명으로 가득하다. 범람으로 인하여 영양분이풍부한 땅이 형성되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식물로 가득한 것이다. 이는 잡초를 말한다. 더구나 들꽃까지 피었다.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우거진 숲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S22.84)
 

 
늪지대를 지나 험준한 절벽을 지나 마침내 풍요로운 초원에 도착했을 때 그 기분은 어떠할까?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여기서 초원은 열반을 상징한다.
 

 
금강 초원에 이르렀을 때 한없이 평화로웠다. 이제 신록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 있어서 따사로운 초원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들에는 갖가지 잡초가 자라고 이곳 저곳에서는 꽃이 피어 있다. 초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 했다.
 
방생법회는 여법하게
 
방생법회 준비를 했다. 각자 하나씩 들고 온 것을 모았다. 상을 펴고 단을 만들었다. 상 위에는 바나나, 사과, 귤, 포도, 배, 파인애플이 올라 갔다. 백설기 떡도 있다.
 

 
초원에는 우리밖에 없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다. 자리를 깔았다.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합장했다. 교각에는 플레카드를 붙여 놓았다. 작년에 사용된 것을 재활용한 것이다. “모든 생명 행복하소서”라는 문구가 돋보인다.
 

 
중현스님이 방생법회를 집전했다. 우리말로 된 천수경을 특유의 운율로 독송했다. 사람들도 따라 했다. 광명진언도 곁들였다.
 
스님은 버스에서 광명진언을 가르쳐 주었다. 진언은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릇 타야 훔”이라고 발음된다. 뜻은 있을 것이다.
 
진언을 욀 때는 뜻은 몰라도 된다고 말한다. 광명진언 역시 뜻은 몰라도 될 것이다. 다만 진언을 외우면 무언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질 것이다.
 
광명진언은 소리에 대한 것이다. 뜻을 알려고 한다면 개념으로 아는 것이 된다. 개념은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반반이라면 진리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언을 들을 때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단지 소리로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개념이 아니라 실재를 보고자 한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은 실재를 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실재를 보면 진리를 볼 수 있다. 어떤 것인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볼 수 있고, 조건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생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몸과 마음에서 생멸을 볼 수 있다면 진리를 보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생멸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다.
 
싫어하여 떠나면 해탈한다. 해탈하면 자유인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방생인지 모른다. 인간방생인 것이다.
 

 
방생법회는 여법하게 진행되었다. 스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갔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축원을 해 주었다. 이는 축원카드에 적혀 있는 가족이름을 불러 주는 것을 말한다.
 

 
작년 방생법회 때 축원카드를 처음 만들었다. 이후 천장사 법회 참석할 때마다 스님은 축원카드를 읽어 주었다. 주소와 가족 이름을 읽어 주는 것이다. 노보살 들에게는 이 순간이 가장 의미 있을지 모른다.
 
폭력의 공포에 떠는 자의 얼굴에서 네 얼굴을 보라
 
방생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비닐 봉지에는 작은 물고기 수십마리가 들어 있다. 이를 대야에 담아 바가지를 이용하여 강에 넣어 주었다. 사람들은 물고기를 풀어 주면서 “잘 살아라”라고 말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쳐 다닌다. 과연 물고기는 모두 잘 성장할 수 있을까? 약육강식의 축생계에서 앞날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생명을 풀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방생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물고기를 잡아서 풀어 준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로 들면서 방생을 폄하하기도 한다.
 

 
오늘날 방생법회 하는 곳은 많지 않다. 순례법회는 가지만 방생법회 하는 곳은 드물다. 아마 방생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방생을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마 그것은 사람을 방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생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숭고한 행위에 해당된다. 이는 다름 아닌 생명존중이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발견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Dhp.129)
 
 
누군가 폭력을 행사 했을 때 공포를 느낀다. 강자가 약자가 억압했을 때도 공포를 느낀다. 욕하고 때렸을 때 두려움에 떨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 있다.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다. 더 나아가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얼굴에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폭행을 당하는 자가 있다. 불가항력적 상황에 직면에 이르렀을 때 얼굴에는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느낄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떠는 자의 얼굴에서 한없이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발견하라.”(Dhp.129)라고 했다. 이는 죽음의 공포에 떠는 자의 얼굴에서 네 얼굴을 보라.”라는 말과 같다.
 
이 세상에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그런데 남도 자신에 대하여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를 축생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자기자신이다. 남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S3.8)라고 했다.
 
뭇삶에 대하여 잔인한 사람
 
남을 해치는 사람이 있다. 뭇삶에 대하여 잔인한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런 악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학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을 해치는 사람은 남도 해친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남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폭력을 행사할 때 그 사람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미래 자신의 얼굴이 되기 쉽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이기는 자는 패하며
욕하는 자는 욕을 먹고
화내는 자는 분노를 받네.
행위는 돌고 또 돌아
빼앗긴 사람이 다시 빼앗네.”(S3.15)
 
 
이 게송은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것이다. 지금 전쟁을 해서 이겼다고 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이는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 이루네.”(S3.14)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전쟁을 하면 승패가 나기 마련이다. 이번에 이겼다고 해서 다음에도 이기라는 보장이 없다. 패한 자는 잠 못 이루면서 복수하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이기는 자는 패한다’라고 했다.
 
폭력은 영원한 윤회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이기고 빼앗고 죽이는 자는 때가 되면 패하고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다.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나 자신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폭력의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미래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자기자신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도 사랑한다. 반대로 자신을 해치는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것처럼 남도 해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자인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말한다. 이는 자기자신에 대한 폭행이다. 왜 그런가? 악행에 대한 과보를 받으면 괴로워 할 것이기 떄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뭇삶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 것도 뭇삶에 대한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축생에서나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살생하지 말라고 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보다 더 광범위하다. 이는 모든 생명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것이 부처님의 위대한 아위힘사(avihisā), 불상해의 가르침이다.
 

 
방생이라 하여 물고기를 풀어 주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목적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방생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는 것이다.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방생일 것이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30)
 
 
 
2024-04-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