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증심사 천년철불의 미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16. 09:11

증심사 천년철불의 미소

 


들리는 것은 물소리 새소리뿐이다. 여기에 가느다란 염불소리. 눈으로는 천이백년된 철불의 신비한 미소.

증심사, 오보고 싶은 절이었다. 마침내 인연이 되었다. 어제 5월 13일 이박삼일 일정의 남도 순례길 첫날 방문했다.

무등의 능선이 경이롭다. 보면 볼수록 눈길 끈다. 평등해 보이는 능선이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평등능선에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품이 넉넉한 산이다.

 


천리 먼 길 달려 비로전에 앉았다. 철불 상호의 자애로운 미소가 맞아 준다.

 

이 땅에 천년전에도 불교가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떤 불교를 믿고 있었을까? 조금 아는 자의 자만이 발동된다.

 

 

 

 


부처님오신날 특별가족기도, 플레카드에 쓰여진 글자가 거슬린다. 왜 기도라고 했을까? 불공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서.

 

오백전 인등 십만원, 비로전 인등 칠만원. 갖가지 등값이 있다. 백화점 상품 같다. 여기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가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 한 기도는 없지 않을 수 없다.

 


공덕을 바라거든 보시를 해야 한다. 반드시 물질적 보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이 없어도 보시할 수 있다. 미소보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보시공덕 보다 더 수승한 것은 지계공덕이다. 지계공덕 보다 더 수승한 것은 수행공덕이다. 단지 스쳐지나가는 향기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내면 지계공덕과 비할바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빠사나 수행공덕이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을 지각한다면 그 공덕은 무량하다고 했다.

증심사 입구 사적비가 밭을 이루고 있다. 유난히 청신녀라는 글자가 들어 온다. 공덕비일 것이다. 내용은 읽어 보지 않았다. 그 옛날 큰 시주였을 것이다. 청신녀 소원은 이루어졌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만으로 살아간다. 젊은 사람은 젊음의 자만으로, 병이 없는 사람은 건강의 자만으로, 행복한 사람은 삶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세상이 만만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는 태생의 자만으로,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자는 배운 자의 자만으로, 가진 것이 많은 자는 부자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남과 비교되는 우월적 자만이다.

자만은 망하는 길이다. 우쭐 했을 때 재난이 닥친다.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 태생, 지식, 소유의 자만은 결국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천년 철불은 미소짓는다. 자비의 미소는 아니다. 연민이 미소가 될 수 없다. 자애의 미소일까? 해탈의 미소일까? 보는 이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드는 신비의 미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철불에게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천년 지속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천년철불은 이제 조성된 불상보다 영험 있어 보인다.

무엇을 소원해야 할까? 늘 소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하여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길!"바라는 마음이다. 이것도 기도일까? 단지 행운이 함께 하길 바라는 것이다.

스님의 염불이 끝났다. 반야심경을 끝으로 저녁예불이 막을 내렸다. 신발은 한켤레이다. 누가 보든 말든 나홀로 염불이다. 스님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다.

세상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식도 내뜻대로 되지 않고 아내나 남편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돈도 내뜻대로 벌리지 않는다. 대통령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대가를 바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덕 쌓는 불공이 되어야 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아야 한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공양이다.

 

 

 

 


여기는 화순 한천자연휴양림이다.   도시의 소음에 지친 자에게 최상의 휴식처이다. 오토바이 소리가 없어서 좋다. 오토바이 폭탄음에 불선심이 자극된 삶을 살았다. 도시의 소음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다.

2024-05-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