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일어날 수 없는 운주사 와불
무엇이든지 돌에 새겨 놓으면 천년만년 간다. 공덕비도 그렇다.
서울 강남 봉은사에 가면 돌에 새긴 공덕비를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전각 기둥 받침돌에 새겼다. 한자로 시주와 화주 이름을 새겼다. 덕을 찬탄하는 송덕비이다.
(봉은사 공덕비)
나무로 된 전각은 언젠가 불타서 사라질 것이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긴 석재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거기에 새긴 시주와 화주 이름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북한산 승가사에 가면 바위에 시주자 명단을 새겼다. 아마 천년만년 가고자 한 것 같다. 도시는 재개발되고 재생됨에 따라 변화무쌍하지만 산중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천연바위에 시주자 명단을 새겼다면 확실한 것이다.
(승가사 공덕비)
삶의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이렇게 매일 아침 일찍 글을 쓰는 것도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 블로그에 올려 놓는다. 동시에 페이스북에도 게제한다. 블로그 글쓰기이다 보니 긴 글이 특징이다. 종이가 들어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쓰고 싶은 만큼 쓴다. 그렇다면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은 얼마나 갈까?
블로그도 죽는다. 아마 블로거가 사망하면 블로그도 폐쇄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년만년 갈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글을 천년만년 가게 할 수 있을까?
요즘에는 과거에 쓴 글을 모아 책을 만들고 있다.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묶어서 만들다 보니 이제 126권이 되었다. 진열해 놓으니 책장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사망하면 이 또한 없어질 것이다.
글이 천년만년 가기 위해서는 돌에 새겨 놓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미얀마에서는 제5차 결집이 있었을 때 삼장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산에 가면 바위에 글발이 있다. 대개 사람 이름이다. 이 산이 없어지지 않는 한 천년만년 갈 것이다. 후대 누가 이름 석자를 알아줄까?
돌에 새겨 놓은 것은 천년만년 간다. 불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가루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돌에 새겨 놓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해외성지 순례 온 듯
5월 14일 운주사에 갔다. 운주사는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다. 마침내 시절인연이 되어서 참배하게 되었다.
운주사, 신비한 이미지의 절이다. 그것은 천불천탑의 이미지 때문이다.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이라니! 불가사의한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운주사에 가니 마치 해외성지 순례 온 것 같았다. 그것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다. 탑이 이곳 저곳, 이산 저산 수도 없이 산재해 있다. 또한 투박한 불상이 이곳 저곳, 이산 저산에 널려 있다.
단조롭고 투박한 불탑과 불상
운주사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머리를 아래로 비스듬히 누운 와불이다. 안내판을 보니 산으로 가야 한다.
와불을 보고자 산길을 올라갔다. 오르는 도중에 탑이 하나 오롯이 서 있다. 칠층석탑이다. 칠성바위 앞 칠층석탑이다. 그러나 균형미는 보이지 않는다. 저 탑은 왜 산 능선 바위 위에 서 있을까? 둥그런 일곱 개의 석판은 왜 저기에 있을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와불 가는 길에 불상이 하나 서 있다. 이 불상은 안내판도 없다. 긴 바위를 세워서 윤곽만 표현한 것이다. 모습은 단조롭고 투박하다. 길상사 경내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는
목적지 와불에 이르렀다. 머리 부위가 약간 아래로 기울어진 돌부처이다. 안내판 옆에는 “부처님 위에 올라가지 마세요”라는 비석이 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돌부처 위에 올라가 있었나 보다.
두 명의 부처님이 누워 있다. 한부처님은 크기가 12.7미터이고 또 한부처님은 크기가 10.3미터이다. 언제 조성된 것일까?
오래된 탑을 보면 궁금한 것이 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한 것이다. 대개 고려시대 것이 많다. 그렇다고 탑에 써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탑의 형태를 보고 추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와불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안내판에는 와불의 조성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가 있다.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세우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와불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새벽닭 우는 소리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와불은 고려말 또는 조선초가 될 것이다.
와불을 보면 상호가 투박하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미남형 부처님은 아닌 것이다. 왜 이렇게 투박하게 만들었을까? 이는 이쪽 지형의 석재 재질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주에 있는 석굴암은 걸작이다. 비록 석불이긴 하지만 거룩한 모습에 경배하게 된다. 그런데 후대에 만들어진 석불은 이에 훨씬 못미친다는 사실이다.
흔히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 불상을 보면 퇴보하는 것 같다. 신라시대 만들어진 불상과 고려대나 조선시대 만들어진 불상을 보면 확실히 퇴보했다. 대충 만든 것 같기도 하고 빨리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운주사 와불이 일어나면 불교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자 하나의 생각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와불이 단순하게 누워 있는 것만으로 생각한 것이다.
와불은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바닥 돌에 딱 붙었기 때문이다.
와불은 천연 바위 위에 조성 되었다. 누군가 바위 모양을 보고서 누워 있는 부처님 형상을 조각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다.
이대로 천년만년
와불은 천년만년 그 자리에 누워 있을 것이다. 산이 가루가 되기 전까지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불교가 오래 가는 것 아닐까?
경주 남산에 가면 목이 잘린 불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암반에 조성된 불상 중에는 코 등이 훼손된 불상도 있다. 그러나 운주사 와불은 그럴 염려는 없다. 투박하기 때문에 머리가 잘릴 염려도 없고 코가 훼손될 염려도 없다. 이대로 천년만년 가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불교가 천년만년 가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위에 새겨 놓은 것처럼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도 세월이 흐르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린다.
지금은 정법시대일까?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유지되고 있다면 정법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불교 아닌 것이 불교인 것처럼 보일 때 가르침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지속되게 할 수 있을까?
밀린다왕의 양도논법 질문
오늘 새벽 밀린다팡하 교정본을 읽었다. 정법시대와 관련된 것이 와 닿았다. 밀린다왕은 다음과 같이 나가쎄나 존자에게 묻는다.
“존자 나가쎄나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아난다여, 정법은 오백년 간 존속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완전한 열반에 드실 때에 유행자 쑤밧다가 질문하자 세존께서는 ‘쑤밧다여, 수행승들이 올바로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에서 거룩한 님들이 텅 비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말씀이고, 이것이 완벽한 말씀이고, 이것이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존자 나가쎄나여, 세존께서 만약에 이와 같이 ‘정법은 오백년 간 존속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로 인해 ‘세상에서 거룩한 님들이 텅 비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그 말씀은 거짓이 되고, 만약에 ‘세상에서 거룩한 님들이 텅 비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로 인해 ‘정법은 오백년 간 존속할 것이다.’라는 그 말씀이 거짓이 됩니다. 이것도 양도논법의 질문으로 밀림보다 더욱 빽빽하고, 힘센 자보다 더욱 강력하고, 매듭보다 더욱 얽혀있습니다. 이것이 그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그것에 관하여 그대가 바다 속에 사 는 ‘마까라’라는 해수처럼 편만한 삶의 힘을 보여주십시오.”(Mil.131-132)
밀린다왕은 양도논법을 구사했다. 양쪽에 칼을 든 논법이다. 서로 모순된 이야기를 말한다. 딜레마인 것이다.
나가쎄나 존자는 이 위기를 어떻게
부처님은 오백년 후에 정법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에서 “만약에 아난다여, 여인이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아난다여, 청정한 삶은 오랫동안 지속하여 천 년 동안 정법이 존속할 것인데, 그러나 아난다여, 여인이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 데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아난다여, 이제 청정한 삶은 오래 있지 못할 것이며, 아난다여, 단지 오백 년만 정법이 지속될 것이다.”(A8.51)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부처님은 여성출가를 허용했다. 그런데 여성출가를 허용하면서 정법이 오백년만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으면 천년이 지속된다고 했다. 이는 여성차별을 말하기 보다는 그때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열반을 증득하여 사향사과의 성자가 될 수 있다. 아나함이 되어서 죽으면 색계정거천에 화생하여 수명대로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든다. 그래서 “수행승들이 올바로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에서 거룩한 님들이 텅 비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D16)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정법오백년이라는 말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과연 나가쎄나 존자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까?
재산의 비유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비유를 들면 설명될 수 있다. 나가쎄나 존자는 양도논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대왕이여, 재산을 잃은 사람이 모든 나머지 재산을 취해 ‘이 정도로 재산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나머지입니다.’라고 설명하듯,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것을 선언하시고 남은 것을 신들과 인간에게 ‘아난다여, 정법은 오백년 간 존속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이여, 세존께서 ‘아난다여, 정법은 오백년 간 존속할 것이다. 말씀하신 그것은 가르침의 존속기 한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열반에 드실 때에 유행자 쑤밧다가 질문하자 세존께서는 ‘쑤밧다여, 수행승들이 올바로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에서 거룩한 님들이 텅 비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그것은 실천해명입니다.”(Mil.132-133)
부처님은 정법이 오백년간 존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오백년 후에 정법이 끝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잔여기간을 밝힌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재산의 비유를 들었다.
우리 속담에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정법오백년은 잔여기간을 확정한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가 계속 나오면 마르지 않는 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그 저수지가 마르지 않을 때에 큰 구름이 물위로 차례로 계속해서 비를 내린다면, 대왕이여, 그 저수지에 물이 소모되어 말라버리겠습니까?”(Mil.132)라며 역질문한다.
정법의 저수지
부처님 가르침은 저수지와도 같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욕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팔정도의 목욕이다. 바라문이 불의 제사를 지낸 다음 개울에서 검댕이를 벗어내는 목욕과는 다르다. 고작 몇 명이 개울에서 씻는 것과 가르침의 호수에서 씻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저수지에는 항상 물이 차 있다. 그런데 물은 비로 인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구름이 형성되어서 비가 내릴 때 저수지에 물이 찰 것이다. 정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저수지의 비유를 들어 정법오백년과 정거천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한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승자의 최상의 가르침인 정법의 저수지는 품행과 계행과 덕성과 관습과 실천이라는, 오염의 때를 여읜, 새로운 물이 가득차고 넘쳐흐르면서 궁극적인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신들의 하느님세계까지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거기에 불자들이 품행과 계행과 덕성과 관습과 실천이라는, 구름으로부터의 비를 차례로 계속해서 내리게 한다면, 이 승자의 최상의 가르침인 정법의 저수지는 오랜 세월동안 존속할 것이고, 거룩한 님들은 세상에서 텅 비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취지로 ‘쑤밧다여, 수행승들이 올바로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에서 거룩한 님들이 텅 비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왕이여, 그리고 그 경우에 커다란 큰 불꽃더미가 타오를 때, 차례대로 마른 건초와 섬과 쇠똥을 던져 쌓는다면, 대왕이여, 그 불꽃더미가 꺼질 수 있겠습니까?”(Mil.132)
참으로 명쾌한 설명이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양도논법을 논파한 것이다. 이를 정법의 저수지 비유로 설명했다.
왜 부처는 계속 출현할까?
초기경전을 보면 과거칠불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쌍윳따니까야에서 인연상윳따(S12)를 보면 과거칠불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왜 부처가 여럿 출현 했을까? 이는 정법이 오래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영겁의 시간에 비추어 보면 순간적이다. 단지 반짝 했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는 91겁 전의 위빳시 부처와 그 다음 부처인 31겁 전의 씨끼 부처의 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간격이 무려 60겁이다.
어떻게 해야 정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이는 정법의 저수지에 물을 계속 공급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사향사과의 성자가 계속 출현해야 한다. 그리고 연료를 계속 공급해서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정법이 유지되려면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정법의 저수지에 물을 계속 대는 것과 같다. 정법은 오백년만 지속된다고 했지만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굴러 가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나가쎄나 존자는 “세 가지 배움에 의욕을 내어 학습하고, 품행과 계행을 평등하게 완성한다.”(Mil.133)라고 했다.
보다 높은 증상삼학
정법의 저수지가 마르지 않게 하려면 삼학을 실천해야 한다. 계학, 정학, 혜학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삼학은 ‘보다 높은(增上)’ 것이라고 한다.
세속에서의 삼학보다 더 높은 것은 출세간의 삼학이다. 이를 증상계학, 증상정학, 증상혜학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증상삼학에 대한 각주에서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增上戒學):
계행은 오계·십계를 말하고 보다 높은 계행은 의무계율의 방호계(paṭimokkhasaṃvara)를 말한다. 오계십계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거나 하시지 않거나 생겨나지만 의무계율의 방호계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셔야만 생겨나므로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이다. 또한 열반을 원하는 자에게 수지되는 오계·십계도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이다. 또한 일체 세간의 것이 계행이면, 출세간의 원리의 것은 보다 높은 계행이다.
2)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增上心學):
마음이라는 것은 여덟 가지 성취(八等至: aṭṭhasamāpatti)를 말하고, 보다 높은 마음은 통찰의 기초로서의 선정(vipassanāpādakajhāna)을 말한다. 여덟 가지 성취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거나 하시지 않거나 생겨나지만 통찰의 기초로서의 선정은 부처님께서 출현하셔야만 생겨나므로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이다. 또한 열반을 원하는 자에게 수지되는 여덟 가지 성취도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이다. 또한 일체 세간의 것이 마음이면, 출세간의 원리의 것은 보다 높은 마음이다.
3) 보다 높은 지혜 에 대한 배움(增上慧學):
지혜는 업자성(業自性)을 아는 지혜(kammassakatājānapaññā)이고, 보다 높은 지혜는 통찰의 지혜(vipassanāpaññā)이다. 업 자성을 아는 지혜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거나 하시지 않거나 생겨나지만 통찰의 지혜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셔야만 생겨나므로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이다. 또한 열반을 원하는 자에게 수지되는 업자성(業自性)을 아는 지혜도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이다. 또한 일체 세간의 것이 지혜이면, 출세간의 원리의 것은 보다 높은 지혜이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밀린다팡하 414번 각주)
증상삼학은 출세간에 대한 것이다. 세간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거나 하시지 않거나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연기법에 대하여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거나 하시지 않거나
계학에서 오계와 십계는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원리로서 확정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타종교에서의 불투도, 즉 ‘도둑질하지말라’ 등의 계는 공통된다. 그런데 정법의 저수지에 물이 마르지 않으려면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비구계이다. 이를 ‘의무계율의 방호계(paṭimokkhasaṃvara)’라고 했다. 이런 계율은 부처가 출현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정학에서 팔선정은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원리로서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통찰은 부처가 출현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통찰의 기초로서의 선정(vipassanāpādakajhāna)’이라고 했다.
혜학에서 업자성정견은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원리로서 확정된 것이다. 이는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말하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말한다. 전세계 어느 시기,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성제는 부처가 출현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하여 ‘통찰의 지혜(vipassanāpaññā)’라고 했다.
정법이 사라질 때
정법의 저수지에 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삼학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결국 어느 때인가 정법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가쎄나 존자는 “증득의 사라짐, 실천의 사라짐, 특징의 사라짐”(Mil.133)이라고 했다.
증득의 사라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더 이상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의 증득이 없는 것이다.
열반은 팔정도 수행으로 증득된다. 열반이 없는 것은 팔정도 수행이 없는 것과 같다. 이는 실천의 사라짐과 같다.
특징의 사라짐은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외적 특징으로 황색가사와 같은 것을 뜻한다.”(415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황색가사를 더 이상 입지 않았을 때 정법이 사라짐을 말한다.
정법시대는 어떤 것일까?
정법시대는 어떤 것일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다.
“정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교법상의 정법(pariyattisaddhamma): 삼장의 모든 부처님 말씀, 2) 행도상의 정법(paṭipattisaddhamma): 열세 가지 두타행, 열네 가지 의무, 여든 두 가지 대의무, 계행-삼매-통찰, 3) 증득상의 정법(adhigamanasaddhamma): 네 가지 고귀한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Smp.225)
정법시대 조건은 세 가지이다. 부처님의 원음, 팔정도수행, 사향사과와 열반이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되면 정법시대이다.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지금은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 삼장이 전승되어 왔고, 팔정도 수행이 있어서 사향사과와 열반을 증득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한국에서 정법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교통과 인터넷, 정보기기의 발달로 인하여 세계가 글로벌화 되자 정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보리수를 심어야
운주사에서 와불을 보았다. 머리를 아래로 하여 비스듬히 누워 있는 두 분의 부부처님 상이다. 모습은 투박하다. 형태는 단순하다. 그런데 와불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위에 붙어 있어서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다.
운주사와불은 오백년 이상 그곳에서 누워 있다. 앞으로도 천년만년 누워 있을 것이다. 누군가 가져갈 수도 없다. 머리를 자를 수도 없고 코를 뭉그러뜨릴 수도 없다. 바위산이 가루가 되기 전까지는 비스듬히 누워 있을 것이다.
운주사 와불이 일어나는 날 한국불교가 중흥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불교는 중흥하고 있다. 새로운 보리수를 심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뿌리가 내리면 더욱더 번성할 것이다.
후진불가 가르침의 수레바퀴(法輪)
가르침의 수레바퀴는 계속 구르고 있다. 그런데 이 수레바퀴는 좀처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며 부정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 부처님 말씀하신 사고와 팔고는 나의 현실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에게 대입해 보았을 때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처님의 담마는 오로지 전진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후진불가의 가르침과도 같다. 그래서 수타니파타 쎌라의 경에서는 “결코 나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라고 했다. 쌍윳따니까야 초전법륜경에서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S56.11)라고 땅의 신이 외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수레바퀴는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 마치 고대인도의 전륜왕이 사군을 거느리고 성문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네 가지 진리, 즉 사성제를 설했을 때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운주사 와불은 무슨 생각을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굴러가고 있다. 내일도 굴러갈 것이다. 더구나 후진불가이고 오로지 전진만 하는 수레바퀴이다. 그러나 언제나 멈출 날도 있을 것이다. 정법의 저수지에 물이 마를 때 멈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량 없는 세월이 지난 후 부처가 출현할 것이다. 다시 정법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운주사 와불은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것도 머리를 아래로 하고 누워 있다. 이렇게 수백년 있었다. 그러나 일어날 수 없다. 운주사 와불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2024-05-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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