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절제

몸도 마음도 가벼운 오후불식(午後不食)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20. 08:40

몸도 마음도 가벼운 오후불식(午後不食)

 

 

오후불식해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심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잊어 버렸다.

 

어제 오후불식했다. 어제 담마와나선원 붓다의 날법회에서 팔계 받은 것을 실천한 것이다.

 

 

사람들은 삼시세끼를 먹는다.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저녁을 먹지 않는다. 이는 포살계라 불리우는 팔계를 실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포살계는 재가불자에게 적용된다. 신월이나 보름, 그리고 반달인 날에 받아 지닌다. 특히 신월이나 보름날에는 사원에 가서 설법을 듣고 포살계를 지킨다.

 

포살날은 이론적으로 한달에 네 번 있다. 음력으로 초하루, 보름, 그리고 반달 두 번에 행해진다. 그러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양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제 담마와나선원 붓다의 날 행사는 일요일에 치루어졌다. 사흘 앞당겨 치루어진 것이다. 붓다의 날은 522()로 평일이다. 사람들이 평일에 시간 내기 힘들어서 일요일에 행해진 것이다.

 

불자라면 한달에 네 번 포살계를 받아 지니고 포살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양력으로 살기 때문에 음력 포살일을 지키기 힘들다.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요일에 지키면 된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일요일을 주일(主日)이라고 한다. 창조주님 요일인 것이다. 그래서 일요일 교회나 성당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불자들도 일요일에 절에 간다. 일요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지만 종교인에게는 종교행사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루낮하루밤의 포살계

 

불자들은 일요일 절이나 사원, 선원에 가서 포살계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한달에 네 번 포살일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포살일은 특별한 날이다. 음력으로 신월(초하루)나 보름은 특별한 날이다. 이런 날에 포살계를 받아 포살을 행한다. 이렇게 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포살을 행하려면 먼저 포살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포살계는 딱 하루계라는 것이다. 한번 포살계를 받으면 효력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낮과 하루밤만 지속되는 것이다.

 

포살계는 포살일에만 받는다. 공식적으로 한달에 네 번 있기 때문에 네 번 받을수 있다.

 

어제 담마와나선원에서 포살계를 받았다. 포살계는 오계에다 세 가지 계가 플러스 된 것이다. 이는 오후불식, 가무를 삼가는 것, 그리고 쾌적한 잠자리를 사양하는 것이다.

 

포살계에서 불사음계를 보면

 

포살계는 출가수행자처럼 사는 것이다. 다만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만이라도 출가자와 똑같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불사음계에 대해서는 성적접촉도 금한다.

 

재가자의 오계에서 성적접촉은 허용된다. 다만 자신의 아내에 해당된다. 그런데 포살계를 받아 지니면 그날 밤은 자신의 아내와도 잠자리를 할 수 없다. 이는 출가수행자처럼 하루를 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계에서의 불사음계는 다음과 같다.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순결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고, 멀리 여임의 삶을 살고,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순결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고, 멀리 여임의 삶을 살고,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A3.70)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말한다. 하루 포살계를 받으면 아라한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사음계 대해서는 성적 접촉을 삼간다.”라고 했다. 이는 오계에서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금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계에서 불사음계는 아내 이외에 다른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떠나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삼갑니다.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있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고,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고, 형제의 보호를 받고 있고,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고, 친족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이미 혼인했거나, 주인이 있거나, 법의 보호를 받거나, 심지어 약혼의 표시로 꽃다발을 썼거나 한 여인과 관계하지 않습니다.”(M41)라고 한 것이다.

 

팔계에서 불사음계는 어느 여인과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간다.”라고 했다. 성적행위를 천한 행위로 본 것이다. 이는 출가자의 입장, 특히 아라한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재가자의 포살인 팔계에서 불사음계는 성적행위가 원천적으로 금지된다. 그래서일까 여덟 번째 항목을 보면 높은 침대, 큰 침대를 버리고 높은 침대, 큰 침대를 삼 가고 낮은 침대 즉 안락의자나 풀로 엮은 깔개에서 잠을 청한다.”(A3.70)라고 했다. 안락한 침대를 놓아 두고 바닥에 자겠다는 것을 말한다.

 

목숨걸고 지키는 포살계

 

앙굿따라니니까야 포살덕목에 대한 경을 보면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목숨이 다하도록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목숨걸고 포살계를 지키고자 하는 다짐이다. 오후불식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고 저녁은 들지 않고, 때 아닌 때에 식사를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고 저녁은 들지 않고, 때 아닌 때에 식사를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A3.70)

 

 

포살은 목숨걸고 하는 것이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소치기포살이 된다.

 

소치기포살이란 무엇인가? 이는 탐욕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과 같다. 마치 소치기가 소들을 데리고 오늘은 여기서 물을 마시고 내일은 저기서 물을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는 오늘 이러저러한 단단하거나 부드러운 음식을 먹었다. 나는 내일 이러저러한 단단하거나 부드러운 음식을 먹을 것이다.” (A3.70)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범부들은 탐욕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늘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무탐(無貪)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먹는 것에서 거리가 멀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은 식욕과 성욕이다. 식욕은 몸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성욕은 자손을 남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축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마디로 식욕과 번식욕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리고 자신과 닮은 개체를 남기고자 한다. 이는 본능적이다.

 

사람도 동물에 범주에 속한다. 식욕과 성욕과 같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축생과 다름 없는 삶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산다.

 

세상의 흐름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간다. 이렇게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다 보니 먹는 것도 자제하게 된다. 하루 한끼 또는 두끼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것이다.

 

재가자의 포살은 하루만큼은 출가수행자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팔계에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는 오계와 다르다. 출가자처럼 지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라한처럼 사는 것이다.

 

재가자가 아라한처럼 살기 힘들다. 번뇌가 다한 자의 삶과 번뇌로 가득한 자의 삶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하루만이라도 아라한처럼 살고자 한다. 그래서 포살일에 팔계를 받아 지닌다.

 

아라한 되기가 쉽지 않다. 욕망을 뛰어넘었다는 것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기 까지는 피눈물나는 수행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계율을 지킨 것이다.

 

포살계는 하루만큼은 출가수행자처럼 사는 것이다. 오후불식을 예로 든다면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고 저녁은 들지 않고, 때 아닌 때에 식사를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A3.70)라며 다짐하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가벼운 오후불식

 

어제 포살계를 받고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저녁시간이 되었을 때 출출했지만 꿀물을 타 마심으로 해서 위기를 넘겼다. 이후 배고픈 생각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저녁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저녁을 먹지 않음으로 인한 이점은 많다. 무엇보다 몸이 가볍다는 것이다. 저녁을 먹지 않으니 몸이 날아갈수록 가벼운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나는 밤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밤에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을 즐긴다.”(M70)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오후불식을 한 것은 아니다처음에는 세 끼를 다 먹었다세 끼에서 두 끼로 줄이고두 끼에서 한 끼로 줄였다마침내 오후에는 먹지 않게 되었다오후에 먹지 않으니 건강에 좋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그래서 “수행승들이여그대들도 밤에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을 즐기기 바란다.”(M70)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어제 저녁을 먹지 않았다. 어제 점심 때부터 무려 열여덟 시간을 굶은 것이다. 그러나 몸은 가벼웠다. 마음도 가벼웠다.

 

오늘 아침은 준비해 온 계란과 고구마와 감자, 그리고 치즈와 함께 하는 샌드위치 한쪽으로 식사했다. 음료수는 꿀물이다.

 

 

범부와 성자의 음식을 대하는 태도

 

음식을 어떻게 해야 잘 먹는 것일까? 계율로 먹고 사마타로 먹고 위빠사나로 먹어야 한다.

 

몸에 기름칠 할 정도로 먹는 것이 계율로 먹는 것이다. 이 음식이 여기에 있기 까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자애의 마음으로 먹는 것이 사마타로 먹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전과정을 새기며 먹는 것이 위빠사나로 먹는 것이다.

 

누구나 음식을 먹는다. 그런데 성자와 범부는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밀린다팡하에 따르면,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탐욕을 여의지 않은 자는 맛을 감지하고 맛에 대한 탐욕도 감지하면서 음식을 먹습니다만, 탐욕을 여읜 자는 맛을 감지하고 먹지만, 맛에 대한 탐욕을 감지하고 먹지는 않습니다.”(Mil.76-77)라고 말했다.

 

범부는 먹어야 산다. 성자도 먹어야 산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또한 맛을 느끼며 먹는 것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탐욕에서 차이가 난다.

 

범부는 탐욕으로 살아간다. 탐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중생이다. 짐승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성자는 무탐으로 살아간다. 당연히 음식을 먹을 때 탐욕으로 먹지 않는다. 이는 경전에서 식사는 배를 유지하는 것으로 족하게 하고”(M27)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먹을 때는 먹을 때 뿐

 

오늘 아침 음식을 먹을 때 알아차림 하며 먹고자 했다. 이는 바히야의 경에서 감각할 때는 감각할 뿐이다.”(Ud.6)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 여기서 감각은 후각, 미각, 촉각에 대한 것이다.

 

먹을 때는 먹을 때 뿐이다. 먹을 때 맛을 느끼며 먹는다. 먹을 때 새기며 먹는다. 그러나 탐욕의 식사, 분노의 식사를 한다면 범부가 먹는 것이다.

 

오후불식하니 몸도 마음도 가볍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녁밥 먹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저녁도 부족해서 야식을 먹는다. 그것도 부족해서 간식을 먹는다. 하루에 다섯 번, 여섯 번 먹는 것이다.

 

일을 하는 사람은 먹어야 한다. 먹어야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가능하다. 생업을 가진 자에게 오후불식은 실천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달에 네 번 또는 두 번, 아니 한번 만이라도 오후불식하고자 한다. 한달에 한번도 힘들면 붓다의 날처럼 특별한 날에라도 실천하고자 한다.

 

 

2024-05-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