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방랑자가 되지 않으리, 아리야와사법문 완독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건너야 할 것이 있다. 안양천이다. 비산동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건널 수 없었다. 밤새 내린 비로 징검다리가 잠긴 것이다.
징검다리 물살은 거세다. 징검다리는 잠겨서 보이지 않는다. 단차가 있는 곳에서는 물이 솟구친다. 도저히 건널 수가 없다. 저 언덕으로 갈 수 없다.
징검다리는 최단거리이다. 징검다리가 막혔으니 돌아가야 한다. 무지개다리는 안심이다.
매일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가운데에는 물이 있다. 홍수가 나면 건널 수 없다. 이럴 때 다리가 있으면 쉽게 건널 수 있다. 윤회의 거센 물결은 어떻게 건너야 할까?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매일 삶을 살고 있다. 살아 있으니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떻게 해서든지 살 것이다. 그러나 결국 끝을 보고 말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알 수 없다. 그러나 길을 아는 사람은 있다. 죽음 이후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 쓰여 있는 문구를 말한다.
디가니까야에 내생을 의심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직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부처님의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꾸마라 깟싸빠 존자는 ‘달의 신과 태양의 비유’ 등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준다. 그 중에 ‘눈먼 봉사의 비유’가 있다.
깟싸빠 존자는 내생을 믿지 않는 왕자에게 하늘 눈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이는 육체의 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닦아 천안통이 생기면 하늘눈이 생겨서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겠다고 말한다. 신통에 대하여 말하면 믿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선천적으로 봉사인자가 이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능력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깟싸빠 존자는 “그대가 생각하듯, 이러한 육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여, 그대는 이러한 이유로 ‘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D23.13)라고 말했다.
왕자는 존자가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설령 믿는다고 해도 모순이 있을 것 같았다.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공덕을 쌓은 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결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D23.14)라며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서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이다. 마치 빠야시 왕자가 내생을 부정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사견을 가진 자에게 깟싸빠 존자는 ‘임산부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왕자여, 계행을 갖추고 선한 원리를 갖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의 안녕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애민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닦습니다. 왕자여, 그대는 이러한 이유로 ‘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D23.15)
이 구절을 보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는 것 같다. 그것도 오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는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어른에게 장수하라고 말한다. 장로도 보시자에게 “아유 완노 수캉 발랑”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십시오.”(Dhp.109)라는 뜻이다. 이른바 장수축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장수축원이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오래 살면 살수록 악업만 짓는다. 매일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가는 범부는 장수할수록 악업만 늘어나서 악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왜 살아야 합니까?”라며 묻는다. 이런 질문에는 “사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냥 사는 겁니다.”라고 말해 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이런 질문에 “죽지 못해서 삽니다.”라고 말해 줄 것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할 필요가 없다. 우문에 답하면 우답이 된다. 이는 “왜 살아야 합니까?”와 같은 질문을 말한다.
여기 축생이 있다. 축생은 왜 사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여기 들꽃이 있다. 들꽃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유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왜 살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답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답을 해 줄 수 있다. 어떻게 해 주는가? 이는 경에 쓰여 있는 것처럼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D22.15)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내가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이 세상이 괴로움으로 가득하기는 하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공덕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덕에는 크게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이 있다. 매일 이 세 가지 공덕 짓는 나날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선업은 매일 쌓여 갈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선업공덕은 더욱 더 늘어날 것이다. 그에 따라 죽어서 천성에 태어날 가능성은 점점 높아 진다. 아니 이 생에서도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Dhp.16)
부처님은 저 세상을 말했다. 이는 내생과 윤회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생에서 선업공덕을 쌓으면 천상이나 못되어도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보의 가르침이다.
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오래 살면 살수록 선업공덕은 늘어난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은 많은 사람의 안녕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애민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닦습니다.”(D23.15)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네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여기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지 않는 사람,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네 종류의 사람 중에서 최악은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화장용 장작은 양끝이 불타고 중간은 악취가 나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는다.”(A4.95)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다.
네 종류의 사람 중에 최상은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버터크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소에서 우유가, 우유에서 크림이, 크림에서 신선한 버터가, 신선한 버터에서 버터기름이, 버터기름에서 버터크림이 나오는데, 그것들 가운데 버터크림을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A4.95)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정제되고 정제된 사람이다.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 정의로운 마음에 불타서 일생을 헌신한다. 그런데 때로 폭력적이기도 하다. 이념에 따라 편을 가르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것 자체가 폭력인 것이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념 투쟁에 몰입하다 보면 폭력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보다 못하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다. 사회참여는 하지 않지만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노력하는 자가 자신의 수양 없이 이념에 휩쓸리는 자보다 훨씬 더 나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것인가? 니까야를 읽어 보면 자리이타이다. 자신도 이롭게 하고 타인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되려면 여러 단계로 정제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유에서 최종적으로 버터크림이 되는 것과 같다.
왜 사느냐고 묻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왜 사는지 묻는다면 축생의 삶이 답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다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답이 된다.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 살아야 공덕의 총량도 늘어난다. 장수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아리야와사법문을 다 읽고
오늘 새벽 마침내 아리야와사법문을 다 읽었다. 6월 30일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23일만의 일이다.
책은 천천히 읽었다. 논서는 소설읽듯이 하루 밤 만에 다 읽을 수 없다. 320여페이지 달하는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머리맡에 놓고서 새기며 읽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에 대해서는 글을 써서 남겼다. 오늘이 마침내 그 회향일이 되었다.
아리야와사법문에는 새기고 싶은 내용이 많다. 이를 형광메모리칠해 두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접어 두었다.
아리야와사는 ‘성자의 집’이라고 번역된다. 앙굿따라니까야 ‘고귀한 님의 주처의 경2(dutiyāriyavāsasutta)’(A10.20)에 근거한다. 마하시 사야도가 1962년 미얀마 어느 마을에서 이틀간 법문 한 것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성자의 집은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이는 1)오장애 끊는 것, 2)여섯 가지 감역에서 평온, 3)새김이라는 보호, 4)성찰하여 수용하고 참고 삼가고 없애는 네 가지 의지처, 5)독단적 진리를 끊는 것, 6)감각과 존재와 청정범행이라는 추구를 버리는 것, 7)감각욕망의 사유와 분노의 사유와 해침 사유 세 가지를 제거하는 것, 8)네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몸의 형성이 고요한 것, 9)해탈한 마음, 10)해탈한 통찰지를 말한다.
마하시사야도는 열 가지 주처에 대해서 법문했다. 모두 수행과 관련된 것들이다.
법문에서 여러 가지 예들 들었는데 늘 새겨야 할 것이다.
해태와 혼침은 게으른 것
오장애에서 해태와 혼침이 있다. 이는 나태하고 노곤한 것임을 말한다. 명상에 방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이를 “쉽게 말하면 게으른 것입니다.”(179쪽)라고 말했다.
좌선 중에 좌선이 하기 싫어 질 때가 있다. 번뇌망상이 폭풍 쳤을 때 그만 두고 싶어 진다. 생각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이런 때 주관찰 대상으로 돌아 와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그래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게으른 것이다. 노력부족이다.
마하시사야도는 해태와 혼침에 대하여 게으른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선법에 게으른 것입니다.”(179쪽)라고 했다. 해태와 혼침이 반드시 명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보시하는 데 게으른 것, 계를 지키는 데 게으른 것, 부처님께 예경 올리는 데 게으른 것, 법문을 듣는 데 게으른 것, 수행하는 데 게으른 것”(179쪽)등에 대하여 해태와 혼침이라고 했다.
죽어도 좋아, 법만 증득하면
성자의 집을 구성하는 열 가지 요소 중에 네 가지 의지처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성찰하여 수용하고 참고 삼가고 없애는 네 가지를 말한다. 이 중에서 참는 것에 대하여 용맹정진 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참아야 할 것은 참아야 한다. 수행한다고 방석에 앉아 있을 때도 참아야 한다.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으면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한다.
요즘 재가우안거를 하고 있다. 하루에 삼십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작년에는 한시간 앉아 있었다. 그 대신 아침과 점심 때 두 번 앉아 있기로 했다.
방석에 앉아 있다 보면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이 치고 들어와 망상이 되었을 때 힘이 빠진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알람 울림 소리가 날 때까지 참고 견디어야 한다.
참는 것도 수행이다. 어느 정도까지 참아야 할까? 청정도론에서는 “몸과 목숨을 고려하지 않고 수행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어도 좋다. 법만 증득하면 된다.”(114쪽)라며 용맹스럽게 수행해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성도날에 이렇게 결의 했다.
“차라리 피부와 근육과 뼈는 말라버려라.
몸 안의 살과 피는 고갈되어 버려라.
장부의 끈기, 장부의 노력, 장부의 용맹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하고
정진을 그만 두 는 것은 있을 수 없다.”(A2.5)
이는 정진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정진에 대하여 ‘빠다나(padhāna)’라고 한다. 정진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다. 이를 우리말로 ‘용맹정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빠알리어 가운데 여러 가지 정진에 대한 용어가 있다. 이를 나열하면 와야마(vāyama), 위리야(viriya), 압빠마다(appamāda), 빠다나(padhāna), 아따빠(ātapa)가 된다. 이 가운데 용맹정진을 뜻하는 빠다나는 정진의 강도가 센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 목숨을 건 수행을 했다. 이는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Stn.440)라고 결의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빠알리어 빠다나(padhāna)가 ‘[adj.] chief; foremost. (nt.) exertion; effort; striving’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병이 치유
보살은 목숨을 건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었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실제로 수행해서 죽는 경우란 없습니다.”(115쪽)라고 했다. 이어서 “죽기는커녕 고통스러운 느낌조차 생겨나지 않습니다.”(115쪽)라고 말했다.
한국의 어떤 선사는 공부하다 죽으라고 말했다. 이는 수행하다 죽으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수행하다 죽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정말 수행하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수행의 경지에 해당되는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선정 수행하다 죽으면 색계선정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하면 여러 이득이 있다. 이 생에서 선업공덕을 쌓는다. 설령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수행하다 죽는 경우는 업다는 것이다. 오히려 수행으로 인하여 기쁨, 행복, 평온을 맛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것은 “어떤 수행자들은 원래 앓던 병이 사라지기도 합니다.”(115-116쪽)라는 말이다.
불교인들인 절에 가면 기도를 한다. 이른바 사대기도이다. 건강, 학업, 사업, 치유에 대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남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그런데 기도 보다 수행이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은 예를 말했다.
“지난 안거 때 한 여자 수행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수행자의 배에 딱딱한 멍울이 있었습니다. 피가 뭉친 것이든 근육이 뭉친 것이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수행센터에 오기 전 집에서 지낼 때는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와도 10~15분 정도만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수행자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고 의사는 수술로 그 멍울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수술하기 전에 의지할 만한 것 하나를 마련하리라’라고 결심하고서 양곤 마하시 사사나 수행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그녀에 게 “오랫동안 앉아 있지 마십시오. 그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수행자의 지도 스승은 그 동안의 사정을 듣고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너무 열심히 만 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조심조심, 편안하게 계속 수행하십시오”라고 지도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계속해 나가자 그 수행자는 새김과 삼매, 지혜의 힘이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새김과 삼매, 지혜가 좋아지면서 배에 있던 딱딱한 멍울도 조금씩 줄어들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오래 앉아 수행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확인을 위해 의사에게 다시 진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멍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면서 어떻게 한거냐고 물었고, 그녀는 “오로지 수행 만 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이제 아무런 병이 없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아리야와사법문, 116쪽)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병이 치유된 것이다. 이는 “새김과 삼매, 지혜가 좋아지면서 배에 있던 딱딱한 멍울도 조금씩 줄어들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수행으로 병이 사라진 사례는 많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수행은 치유능력도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병이 치유가 되는 것이다.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
성자의 집에 살려면 참아야 한다. 좌선을 할 때 가능하면 자세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을 수 있는 만큼 참고 관찰해야 합니다.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느낌들이 생겨날 때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참으면 열반에 이른다”라는 미얀마 속담이 있습니다. 참는 것은 다른 때보다 수행할 때 더욱 중요합니다. 고통스러운 느낌들이 생겨날 때마다 참지 못하고 즉시 자세를 바꾸면 삼매가 생겨 날 수 없습니다. 삼매가 생겨나지 않으면 지혜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통스러운 느낌이 드러나면 참을 수 있는 만큼 참고 관찰해 나가야 합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생겨나면 그때는 새김을 놓치지 말고 관찰하면서 자세를 바꿔야 합니다.”(아리야와사법문, 117쪽)
좌선 중에 다리 저림이 있을 때 가능하면 참아야 한다. 그래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참는 것에 대하여 “참으면 열반에 이른다”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종종 듣던 말이 있다. 그것은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라는 말이다. 이 말의 출처를 발견한 것 같다. 사야도는 미얀마의 속담을 인용하여 “참으면 열반에 이른다”라고 한 것이다.
좌선 중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면 자세를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바꾸어서는 안된다. 사야도는 “새김을 놓치지 말고 관찰하면서 자세를 바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언제 어느 때나 새김(싸띠)을 놓치지 않는 것이 포인트이다.
가르침을 잘 기억하는 것도 싸띠에 해당
오늘 새벽 아리야와사법문을 다 읽었다. 역자 후기까지 다 읽었다. 역자 일창스님은 “경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라는 주제로 후기를 써 놓았다.
어떤 스승은 책을 보지 말라고 한다. 수행에 방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마저 보지 말아야 할까?
부처님 당시에 경전은 없었다. 그 대신 잘 기억했다가 새겼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잘 기억하는 것도 수행의 하나였던 것이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잘 기억하는 것도 싸띠에 해당된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만 싸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잘 기억해서 수행에 적용하는 것도 사띠하는 것에 해당된다.
가르침을 잘 기억하는 것도 왜 싸띠에 해당되는가? 싸띠라는 말이 본래 기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는 경전적 근거도 있다.
수행한다고 하여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pariyatti)을 잘 새겨서 올바르게 실천(patipatti)해야 한다. 그래야 통찰(pativedha)이 있게 된다.
경전은 먹줄과 같아서
마하시사야도는 “경전은 먹줄과 같다.”라고 했다. 먹줄은 목수가 집을 만들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자의 집을 지을 때는 경전이라는 먹줄이 있어야 한다.
중국 어떤 선사는 경전을 폄하했다. 팔만사천법문에 대하여 마구니 법문이라고 했다. 어떤 선사는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어떤 선사는 부처님은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어떤 상(相)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선사들의 말은 과격하다. 비지성적이고 폭력적이다. 테라와다 스승들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마하시사야도는 경전을 먹줄로 비유했다. 성자의 집을 지을 때는 경전에 근거해야 함을 말한다. 일창스님은 후기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은 쉽다고 생각해서 소홀히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율-론 삼장은 우위를 가릴 수 없이 그 의미가 깊고 어려운 가르침이기 때문에 경 또한 가볍게 대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315쪽)라고 써 놓았다.
우 소다나 사야도와 일창스님
아리야와사법문을 읽는 내내 충만했다. 한구절 한구절 흘려 보낼 수 없다. 노랑과 빨강 메모리칠을 해 두었다. 다음에 본다면 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인상 깊은 구절은 글을 써서 남겨 두었다.
아리야와사법문은 일창스님에게 받은 것이다. 2022년 코로나가 거의 끝나갈 무렵 5월 붓다의 날 한국마하시선원에 갔었는데 그때 준 것이다. 그때 위빳사나방법론 1권과 2권, 담마짝까법문, 아리야와사법문 이렇게 네 권을 주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거의 일년에 걸쳐서 다 읽었다. 머리맡에 놓고서 조금씩 읽은 것이다. 다음으로 아라야와사법문을 읽었다. 그런데 아리야와사법문은 출간된지 2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하시사야도가 아리야와사법문을 한 것은 1962년이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때는 2022년이다. 일창스님을 찾아 갔을 때 주었으므로 새로 출간된 책을 준 것이다.
일창스님으로부터 받은 아리야와사법문을 받은지 2년만에 읽었다. 한국에서는 아마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은 가슴을 울린다. 항상 새겨 두고 싶은 구절이 많다. 이렇게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아리야와사법문은 일창스님이 미얀마어로 된 저본을 바탕으로 직접 번역한 것이다. 후기를 보니 우 소다나 사야도의 도움을 받았다고 적어 놓았다. 감수 받은 것이다.
우 소다나 사야도는 현재 한국마하시선원 선원장이다. 한국마하시선원은 안양시 관악역 부근에 있다. 우 소다나 사야도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1) 우 소다나(U Sodhana) 사야도
“1957년 미얀마 머그웨이 주 출생. 1972년 사미계, 1978년 비구계를 각각 수지했다. 1992년 담마짜리야 법사 시험에 합격했고 잠시 먀다웅 강원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1995년 마하시 수행센터에서 수행한 뒤 외국인 법사학교에서 5년간 수학했다. 그 뒤 마하시 수행센터에서 수행지도법사로 수행자를 지도하다 2002년 처음 한국에 왔다. 2007년 8월부터 한국마하시선원 선원장으로 지내며 경전과 아비담마를 강의 하면서 천안 호두마을과 강릉 인월사 등지에서 위빳사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2013년 양곤 마하시 수행센터 국외 나야까 사야도로 임명됐고, 2017년 12월 공식적으로 칭호를 받았다. 2019년 3월 미얀마 정부에서 수여하는 마하깜맛타나짜리야(수행지도 큰스승)칭호를 받았다.”
우 소다나 사야도는 한국에 온 지 22년 되었다. 한국마하시선원에서 수행지도 하고 있다. 미얀마어로 말하면 일창스님이 통역한다.
우 소다나 사야도는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다. 기본 회화 정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향천선원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는 우실라 사야도와 비교된다.
우실라 사야도는 한국어가 능숙하다. 통역 없이도 법문을 한다. 우 소다나 사야도는 미얀마어로 법문하지만 일창스님이 통역을 하기 때문에 듣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창스님은 어떤 분일까? 책에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 있다.
2) 비구 일창 담마간다(Dhammagandha)
“1972년 경북 김천 출생. 1996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원융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 강원을 졸업했고 2000년과 2005년 두 차례 미얀마에 머물면서 비구계를 수지한 뒤 미얀마어와 빠알리어, 율장 등을 공부했으며 찬매 센터, 파옥 센터, 마하시 센터 등에서 수행했다. 현재 진주 녹원정사에서 정기적으로 초기불교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마하시선원과 호두마을을 오가며 우 소다나 사야도의 법문을 통역하면서 위빳사나 수행의 기초를 지도하고 있다. 2019년 12월 양곤 마하시 수행센터에서 깜맛타나짜리야(수행지도 스승)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 『부처님을 만나다』와 『가르침을 배우다』, 역서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전2권), 『위빳사나 백문백답』, 『통나무 비유경』 『마하사띠빳타나숫따 대역』, 『어려운 것 네 가지』, 『담마짝까 법문』, 『알라와까숫따』, 『헤마와따숫따 법문』 『보배경 강설』 『아비담마 강설 1, 『아낫딸락카나숫따 법문」 등이 있다.”
일창스님은 우 소다나 사야도와 항상 함께 한다. 거처도 같이 한다. 이런 두 스님을 두 번 만나 보았다. 2022년 붓다의 날고 2024년 붓다의 날이다.
윤회의 방랑자가 되지 않으리
일창스님이 법보시한 책을 보고 있다. 책을 보고 인상 깊은 것은 글로서 표현한다. 이런 글이 쌓이고 쌓이면 책이 될 것이다. 나중에 방문한다면 책을 만들어 드리고자 한다. 일창스님은 역자 후기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성자의 집을 지으십시오.
방랑자의 삶에 염증을 느끼신다면.
변변한 집을 마련하지 못한 채
서른하나 탄생지 이리저리 떠돌며
태어남과 늙음, 병듦과 죽음,
슬픔과 비탄, 고통과 근심,
이런저런 괴로움을 계속 겪는
윤회의 방랑생활을 끝내십시오.
성자의 집을 지으십시오.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열의, 그리고 정진
이 정도만 있으면 지을 수 있습니다.
성자의 집은 어떻게 짓습니까?
성자들이 갖춘 법을 자신도 갖추면 됩니다.
성자들이 갖춘 법은 어떻게 갖춥니까?
새김확립 수행을 실천하면 됩니다.
새김확립 수행을 열심히 실천해서
성자들이 갖춘 법을 스스로 갖춰서
진정 안전하고 행복한
성자의 집을 의지해서 지내십시오.”(318-319쪽)
유행가 중에 ‘방랑자’라는 노래가 있다. 번안가요이다. 낭만적 분위기이다. 누구나 바라는 자유로운 삶이 연상된다.
여기 나그네가 있다. 그는 가야 할 길이 있다. 돌아갈 집도 있다. 가야 할 곳이 있고 돌아갈 집이 있다면 방랑하지 않을 것이다. 집도 절도 없다면 이리저리 떠돌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방랑자와 같다. 소유하지 않기에 방랑하는 것이다. 이런 빅쿠에 대하여 소녀 로히니는 “마을에서 떠날 때에 아무것도 살펴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1)라고 노래 했다.
출가수행자는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이다. 고정된 거처가 있을 수 없다. 이는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고에도 항아리에도 바구니에도 자신의 소유를 저장하지 않고, 줄 준비된 것만 구합니다.”(Thig.282)라고 했다.
출가자는 방랑자와 같다. 그렇다고 거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상시 머무는 거처는 없지만 정신적 거처는 있다. 아리야와사, 성자의 집이라는 거처이다.
일창스님은 게송에서 “윤회의 방랑생활을 끝내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는 성자의 거처를 마련하라는 말과 같다.
게송을 보면 윤회의 방랑자로 살지 말자고 한다. 경전을 먹줄로 하여 오장애를 끊는 것 등 열 가지를 재료로 하여 집을 짓는 것이다. 성자들이 머물 수 있는 성자의 집이다.
2024-07-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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