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사야도법문

항상 새김이 현전하면 다른 법들은 저절로 구족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11. 11:37

항상 새김이 현전하면 다른 법들은 저절로 구족

 

 

변함 없는 일상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일상이다. 이런 일상에 대하여 평상심시도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일과 가운데 식사가 대사라면 먹기 위해서 산다고 볼 수 있다. 축생과 다름 없는 삶이다.

 

축생은 오로지 행동한다. 여기에 사유가 있을 수 없다. 감정은 있을지 모르나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이다. 축생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라고 본다.

 

사람이라고 해서 같은 사람일까? 사유하는 것으로 본다면 똑 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도 인간 나름이다. 새김(sati)이 있는 인간 있는가 하면 새김이 없는 인간도 있다.

 

새김 있는 인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신인류라고 해야 할까? 아마 수행자라는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자를 말한다.

 

인생이 허무할 때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 샤워를 하고 백권당으로 향했다. 백권당은 일터 겸 수행처이다. 글을 쓰면 서재가 된다. 다용도로 활용되는 일인사무실이다.

 

 

백권당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아침을 먹는 것이다.

 

아침은 미리 준비해 온다. 삶은 계란 하나와 삶은 고구마 작은 것 하나이다. 백권당에 도착하면 토스트 한쪽과 치즈 한장이 곁들인다. 꿀물과 함께 먹는다.

 

아침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셔야 한다. 아침에는 차보다 커피가 좋다. 이는 오랜 습관이다. 커피를 마시면 피가 도는 것 같다.

 

커피를 마시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 전에는 글을 썼다. 백권당으로 걸어 오면서 생각해 두었던 것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약간 허무를 느꼈다.

 

인생이 허무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세월만 보냈을 때를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허()와 무()를 느낀다. 어떻게 해야 허무를 극복할 수 있을까?

 

허무를 이겨내는 것에는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글은 써 놓으면 남는다. 더구나 책으로 만들어 놓으면 삶의 결실을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글쓰기공허를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하면 마음이 충만된다.

 

하루를 일생처럼 살고자

 

나는 수행자인가? 글을 쓸 때 수행자라고 말한다. 재가수행자를 말한다. 과연 나는 수행자로서 자격이 있을까?

 

행위에 의해서 그 사람의 현재위치가 결정된다. 태생이 바라문이라도 농사를 지으면 농부가 되고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재가불자라도 행선이나 좌선을 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수행자이다.

 

아침은 귀중한 시간이다. 하루일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왜 그런가?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니 다시 부활한 것이다.

 

매일 죽었다 살아난다. 새벽이 되어 일어날 때 살아 있음을 확인 한다.

 

인간의 일생은 몇 년일까? 육십년을 살다 갔다면 인생육십이라 할 것이다. 열살 때 죽었다면 인생십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하루를 일생처럼 살고자 한다. 내일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 밤까지만 사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내일 일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

님은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Ajjeva kiccamātappa, ko jaññā maraa suve”(M131)라고 했다.

 

새김(sati)이 항상 현전(現前)해야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내가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새김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tattha tattha vipassati)”라고 했다.

 

싸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싸띠 없는 위빠사나수행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문제는 일상에서도 새김(sati)이 항상 현전(現前)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법문시간에 너털웃음 하는 스님

 

유튜브에서 어느 테라와다 스님은 싸띠를 강조한다. 법문시간에도 싸띠 이야기 하나로 다 보낸다. 수행문답 시간에도 싸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스님은 정말 항상 싸띠가 현전하는 것일까?

싸띠를 강조하는 테라와다 스님은 법문시간에나 질의응답시간에 너털웃음을 한다. 이런 스님이 한국 선불교에도 있다.

 

2004년 불교에 처음 정식으로 입문했을 때 불교방송(BBS)를 자주 들었다. 아침 불교강좌시간에 그 스님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법문시간에도 호탕하게 웃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깨달은 자는 웃어도 되는 것인가?”라고 의문한 것이다.

 

싸띠를 강조하는 테라와다 스님은 자주 소리 내어 웃었다. 웃는 것도 싸띠해야 할 것으로 본다. 웃으면서도 싸띠 하는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아리야와사법문을 읽고 있다. 법문을 보면 매사에 싸띠하라고 했다. 말할 때도 새김을 유지하며 말하는 것이다. 이런 때 웃음이 나올까?

 

싸띠를 강조하는 테라와다 한국스님은 싸띠는 별도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유튜브 법문에서 들었을 때 불가사의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밖에 없다고 알고 있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스님은 싸띠는 별도로 돌고 있다고 했다. 별도로 서브루틴이 돌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스님은 법문 중에 호탕하게 연신 웃는 것일까?

 

미얀마 스님들은 좀처럼 웃지 않는다. 이빨을 보이며 웃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사진을 보면 근엄한 모습이다. 새김이 항상 유지되고 있기 때문일까?

 

행선 하면 마음이 편안해

 

아침에 수행을 먼저하고 글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태도를 바꾼지 일이주 되었다. 이번 우안거를 앞두고 습관들이기로 한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근심걱정이 없다. 왜 그럴까?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대상에 가 있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행선과 좌선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마하시 전통에서는 동등하게 취급한다. 그러나 타전통에서는 좌선을 중요시 한다. 심지어 어떤 전통에서는 행선이 없다.

 

행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육단계 행선을 했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 마치 자신이 고귀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나이들수록 밤은 길어

 

요즘 밤이 긴 것 같다. 잠을 잘 자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이들수록 밤은 길다는 것이다.

 

일년에 한번 함평에서 사촌모임이 있다. 합동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부산에서 사시는 사촌형님은 밤이 길다고 말했다. 나이가 여든이 넘는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이든 사람 노인에게 밤은 길다. 잠은 짧고 밤은 길 때 인생이 지루하다고 느껴질지 모른다.

 

인생이 지겹다는 사람이 있다. 앞으로도 수십년 더 살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것이다. 매일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의미 없는 나날을 보냈을 때 인생이 재미 없을 것이다.

 

나이 들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가만 생각해 보니 글 쓰는 것과 수행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경전읽기도 좋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루라도 경전을 읽지 않으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아침이 되면 새로운 기분이다. 매일 뜨는 해는 똑같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혓바늘이 돋는다는 말이 있다. 하루라도 경전을 읽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머리맡에는 읽을 거리가 있다. 경전이나 논서이다. 다른 것은 없다. 소설이나 일반교양서적은 읽지 않는다. 옛날에는 많이 읽었다.

 

머리맡에 책이 있으면 열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스탠드 불을 켜고 돋보기 안경을 쓰고 형광메모리펜을 손에 쥔다. 그리고 경전이나 논서를 읽는다.

 

오늘 아침 일터로 가기 전에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아리와사법문을 읽었다. 새벽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시간이 십분가량 남아서 열어 보았다.

 

논서 읽기를 잘 했다. 형광메모리펜 칠 한 부위는 다시 한번 더 읽었다. 백권당까지 걸어 갈 때 새기기 위한 것이다.

 

오늘 읽은 것 중에 부처님 최후말씀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a””라는 말이다. 이 말은 불방일정진으로 불리워진다.

 

빠알리어압빠마데나(appamādena)’라는 말은 불방일로라는 뜻이 된다.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에 도구격 에나(ena)’가 붙은 것이다. 이런 문법적 분석이 가능한 것은 지난 겨울 삼개월 동안 빠알리기초문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불방일하면 불사(不死)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는 싸띠와 동의어이다. 왜 그런가? 게으르지 않는 것, 항상 부지런한 것은 항상 새김이 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방일자와 불방일자를 말한다. 게으른 자와 부지런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방일자와 불방일자의 차이는 크다. 이는 죽을 때 알 수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

 

 

참으로 희망적인 말이기도 하고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게으른 자는 이미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이다. 반면 부지런한 자는 죽지 않는 자와 같다고 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누구나 죽지 않고자 한다. 그러나 누구나 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불방일자(appamatta)는 불사라고 한다.

 

누구나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죽지 않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방일자가 되는 것이다.

 

불방일자가 되면 불사가 된다. 그런데 불사가 되면 불생이라는 것이다. 불방일하면 불생불사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희망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구원이 있다.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불사이니 불생인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말은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의 말씀을 하셨다. 이는 형성들은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다. 불방일로 구족하라.”(D16, D.II.156)라는 말이다. 일창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어떤 말이든지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말은 새길만한 가치가 있다. 부모가 유언하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하물며 부처님 말씀은 어떠할까?

 

부처님은 형성들은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vayadhamma sakhāra)”라고 했다. 이 말은 생겨나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라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형성법들은 오직 무너지기만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아리야와사, 159)라고 해석했다.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위빠사나 수행에서 4단계인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에 이르면 큰 진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생멸의 지혜 못지 않게 큰 지혜는 5단계인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최후의 말씀에서 모든 형성된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는 어쩌면 무너짐의 지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자식들과 같은 그대들은하나의 몸이 어릴 때부터 조금씩 성장한 것이다. 이 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것이 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의 마음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것이 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이 목숨, 이 무더기로 나중까지 오랫동안 지낼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몸과 마음, 목숨이라는 것은 항상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대들이 아직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성법들은 한순간도 이어지지 않고 무너지고 있는 법들일 뿐이다. 그래서 전혀 의지할 것이 아니다. 언제든 무너져버리고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아리야와사법문, 159-160)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형성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몸과 마음은 나의 것이라고 하여 변치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혀 의지할 것이 못되는 법인 것이다.

 

나의 안전은 누구도 지켜 주지 않는다. 부모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사람이 죽을 때 의지할 데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면 불사(不死)가 된다.

 

죽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부처님은 죽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 말은 형성들은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다. 불방일로 구족하라.”(D16, D.II.156)로 알 수 있다.

 

법구경에서 불방일자는 죽지 않는다고 했다. 불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불사는 열반을 말한다.

 

 

방일자는 죽어야 한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주석에 따르면 방일한 자는 태어남을 뛰어넘지 못하고 태어나서 늙음과 죽음에 종속된다.”(DhpA.I.229)라고 했다.

 

불방일자는 죽지 않는 자이고, 방일자는 죽는 자이다. 불방일자는 불사이어서 불생이 되지만, 방일자는 죽음이 있어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방일은 죽음의 길이라고 불리운다. 죽음은 방일한 자에서 오는 것이다.

 

팔만사천법문을 한글자로 요약하면

 

부처님은 죽지 않는 길을 말씀하셨다. 이는 불방일로 구족하라.”(D16, D.II.15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불방일 하면 죽지 않는 것이다.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이 말은 한자어로 불방일정진으로 번역된다. 주석에서는 새김을 잃어버리지 말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Smv.593)라고 했다.

 

압빠마데나 삼빠데타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주석적 번역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불방일로 구족하라.”라고 말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부처님 최후의 말씀은 압빠마데나 삼빠데타이다.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이 짧은 한마디에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다 들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팔만사천법문을 한글자로 요약하면 마음 심()’자라고 말한다. 이는 아마도 일체유심조를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런데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팔만사천법문을 한글자로 요약하면 싸띠(sati)’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빠알리니까야에는 주석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고승들에 의해서 전승된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주석서에서는 이 짧은 한줄의 말씀이 그 의미로는 광범위한 삼장과도 같다고 설명해 놓았습니다.(DA.ii.185)”(아리야와사법문, 161)라고 했다.

 

새김이 있으면 다른 법들은 저절로

 

부처님 가르침을 한글자로 압축하면 압빠마데나가 된다. 이는 도구격으로 불방일로가 된다. 항상 새김이 현전하면 불사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마하시사야도는 압빠마데나 삼빠데타에 대하여 불방일로 구족하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삼빠데타에 대하여 구족하라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는 정진으로 번역한 것이나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라며 주석적 번역한 것과 다르다. 구족하라라고 번역했을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여기에서 ‘appamādena 불방일로; 잊어버림 없는 새김으로라는 한 어절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유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리야와사숫따에는 그 새김과 함께 열 가지 법을 설해 놓으셨습니다. 그 열 가지 중 기본은 잊어버림 없는 새김법입니다. 이 새김만으로 관찰하고 노력해도 다른 법들은 저절로 구족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잘 이해하도록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아리야와사법문, 161)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이런 법문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라는 말은 단지 불방일정진인줄 알았다. 주석에서는 새김을 잃어버리지 말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Smv.593)라고 했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불방일로 구족하라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 새김만으로 관찰하고 노력해도 다른 법들은 저절로 구족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흔히 지혜가 이끌어 준다라는 말을 한다. 위빠사나 지혜가 성숙되면 가만 있어도 지혜가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항상 새김이 현전했을 때 다른 법들은 저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은 타당한 것이다.

 

좌선을 하면 달리 할 것이 없다. 오로지 지켜만 볼 뿐이다. 눈을 감은 채로 꼼작도 하지 않고 배의 부품과 꺼짐만 지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새기고만 있다 보면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삼매에서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새김이 유지 되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

 

글쓰기는 생활이 되었다. 한번 썼다 하면 A48장 가량 된다. 오전이 다 간다. 그렇다고 백권당에 오자마자 글쓰기에 매달리면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

 

마음을 채우는데 있어서 수행만한 것이 없다. 행선을 하는 순간 갑자기 고귀한 자가 되는 것 같다. 좌선을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행선과 좌선을 하면 근심걱정이 없다. 새김이 유지 되었을 때 번뇌가 있을 수 없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다. 충만한 마음이 된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아픈 줄 모른다. 아마 이런 것도 글쓰기삼매에 해당될 것이다.

 

늘 새김이 현전되도록 하고자 한다. 새김을 잃어 버리면 허탈한 것 같다. 그러나 새김이 유지되면 마음이 꽉 차 있는 것 같다.

 

일상에서 새김이 유지되기가 쉽지 않다. 행선이나 좌선에서는 가능하지만 일상에서 새김이 항상 현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은 최후의 말씀에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에 대하여 불방일정진으로 해석하지만 마하시사야도는 불방일로 구족하라라고 했다.

 

불방일은 새김이 항상 현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김이 항상 현전하면 다른 법들은 저절로 구족된다는 것이다. 지혜가 이끄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새김이 항상 현전하는 때가 있을까? 가능하지 않더라도 노력하고자 한다. 무심코 하다가 알아차리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새김이 유지 되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2024-07-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