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사야도법문

수행은 번뇌와의 전쟁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10. 10:44

수행은 번뇌와의 전쟁

 

 

싸띠가 어느 때나 유지될 수 있을까? 이것이 현재 나의 화두이다. 일상에서도 한순간 한순간 새김(sati)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언젠가 어떤 위빠사나 지도사를 만났다. 글에서 본 것이 있어서 선생님은 어느 때나 항상 싸띠가 유지되고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그 위빠사나 지도사는 유지되고 있다고 답했다. 이런 답에 절망했다.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잘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위빠사나 한다고 행선도 해보고 좌선도 해보았지만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싸띠가 항상 유지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매순간 싸띠를 할 수 있을까?

 

아라한들은 새김이 항상 현전

 

요즘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을 읽고 있다. 머리맡에 놓고 읽는다. 오늘 새벽 읽은 법문에서 새김(싸띠)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라한들은 새김이 항상 현전하는 이들입니다. 일부는 아나함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함은 새김이 4분의 3정도 구족된 이들입니다. 일부는 사다함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다함은 새김이 반 정도 구족된 이들입니다. 일부는 수다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다원은 새김이 4분의 1정도 구족된 이들입니다. 또한 나머지 일부도 새김확립 수행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아리야와사법문, 144)

 

 

아라한의 새김은 항상 현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어느 순간에도 새김(싸띠)를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아나함은 4분의 3구족이고, 사다함은 4분의 2구족이고, 수다원은 4분의 1구족이라고 한다. 일반 수행자는 이 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그 위빠사나 지도자는 싸띠가 항상 현전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선생은 아라한이란 말인가?

 

장로가 폈던 팔을 다시 구부린 것은

 

새김이 항상 현전하는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자도 새김을 놓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런 케이스이다.

 

 

어떤 장로스님이 많은 제자들과 말을 하다가 손을 갑자기 굽혔다가 원래대로 천천히 펴신 후에 다시 천천히 구부리셨다고 한다그때 제자들이 “스님손을 왜 원래대로 펴셨다가 다시 천천히 굽히십니까?”라고 물었다. “여보게들나는 수행을 처음 시작한 이래로 수행주제를 놓치고 손을 굽힌 적이 없었네. (그런데지금 그대들과 이야기하면서 수행주제를 놓쳐 버리고 손을 굽혀 버렸네그래서 원래대로 편 후에 다시 굽힌 것일세라고 말하였다그러자 제자들이 “훌륭하십니다스님비구라면 응당 이런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464-465)

 

 

장로스님은 무심코 팔을 굽혔다. 이를 나중에 알았다. 장로스님은 다시 굽혔다. 새김을 유지하며 굽힌 것이다. 위빠사나 스승도 새김을 놓칠 때가 있는 것이다.

 

항상 새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누군가 4분의 1일이라도 새김을 유지한다면 그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하물며 일반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얼마나 많이 놓칠까?

 

수행은 번뇌와의 전쟁

 

새김을 놓치지 않을 때가 있다. 행선할 때와 좌선할 때이다.

 

행선할 때 육단계 행선을 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동작을 말한다. 이렇게 행선 했을 때 새김이 유지된다. 새김이 계속 유지 됐을 때 날아갈 것 같다.

 

사람이 가장 성스러울 때가 있다. 그것은 명상할 때이다. 행선할 때도 느낀다.

 

몸이 찌뿌둥 할 때 행선한다. 생각이 많아 혼란스러울 때도 행선한다. 발에 마음을 두어서 육단계 행선을 하면 갑자기 상황이 바뀐다. 마치 자신이 고귀한 사람, 성스러운 사람처럼 되는 것 같다.

 

행선을 하면 번뇌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새김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을 놓치지 않고 새긴다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좌선을 하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왜 그럴까? 새김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과 정신이 생겨날 때 따라가며 새김하는 것이다.

 

배가 부풀 때의 물질적 현상과 부푼다고 알 때의 정신적 현상이 있게 된다. 이를 모두 따라가며 새김하면 번뇌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마하시사야도는 수행하는 것은 번뇌와의 전쟁입니다.”(아리야와사법문, 129)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일까? 이 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미인이 가장 아름다울까?

 

어떤 이는 셀카놀이를 한다. 얼굴에 자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보기에도 잘 생겼다. 셀카로 찍어서 매일 페이스북에 올릴 만 하다. 그러나 자주 보면 식상하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음식도 매일 먹으면 식상한다. 미인도 자주 보면 덤덤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 있다. 잘 생긴 것과 상관 없다. 명상할 때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불상은 대부분 명상하는 모습이다. 불상이 아름다운 것은 명상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명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고귀해 보이고 성스러워 보인다. 왜 그럴까? 고귀하고 성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끈하게 절수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행선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무엇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리야와사법문 각주에 이런 일화가 있다.

 

 

수행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도 있다. 미얀마의 어떤 수행센터 경행대에서 남성 수행자들과 여성 수행자들이 서로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경행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한 할아버지가 옆에서 감독하던 스님에게저 사람들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잃어버려서 찾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말에 장난기가 발동한 스님은천 원짜리 지폐가 없어져서 수행자들이 그것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가그렇다면 여기 천 원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경행하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스님은저한테 맡기시면 됩니다라고 하며 할아버지를 말렸다고 한다.”(아리야와사법문, 109, 78번 각주)

 

 

이 일화는 법의 맛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하면 법의 맛을 알 수 있다. 육단계 행선하며 발생되는 정신과 물질현상을 새길 때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 행선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래를 바라 보며 천천히 걷는 것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까? 일화에서는 바닥에 무엇인가 떨어진 것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에 위빠사나가 소개 된지 수십년 되었다. 그러나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불교신자 중에도 많을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갖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그 중에는 사경도 있고 주력수행도 있고 절수행도 있을 것이다.

 

절수행하는 사람이 행선하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려서 밀고 내리고 디디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학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화끈하게 절수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싱겁다고 느껴질 것이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 보았는데

 

새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무심코 하는 경우가 많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 보는 것도 해당된다.

 

오늘 아침 하늘은 쾌청했다. 어제 비가 와서 세상이 깨끗해진 것 같다. 하늘에는 흰구름이 떠 있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여기에 햇살이 비치니 살맛 나는 날씨가 되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보았다. 무심코 쳐다 본 것이다. 새김을 놓친 것이다.

 

새김을 놓치지 않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거수일투족을 싸띠해야 한다. 길을 걸을 때도 왼발, 오른발 가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길을 걷다가 생각이 나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라한이 아닌한 불가능한 일이다.

 

어드벤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꿈

 

새김을 놓치지 않을 때 어떤 이득이 있을까?

 

어제 밤에 잘 때 새김을 놓치지 않고자 했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수면제를 먹고 자는 경우도 종종 있다. 더 나아가 신경안정제를 먹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약물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약물에 의존하면 폐해가 있다. 잠을 잘 때 끌려 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새김을 유지하며 잠자리에 들면 반대가 되는 것 같다.

 

어제 꿈은 어드벤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 같았다. 마치 롤플레잉게임(role playing game)’하는 것 같았다. 잠자는 동안에도 새김을 유지하려는 것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새김을 유지하는 삶과 유지하지 못하는 삶은 극명하다. 새김을 유지하는 삶은 리드하는 삶이 되고 새김을 유지하지 못하는 삶은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싸띠(sati)에 대하여 새김이라 하는 것은?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은 늘 새김을 유지하라고 했다. 그런데 아라한은 늘 새김이 현전한다는 것이다. 매순간 싸띠와 쌈빠자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새김이란 무엇일까? 이는 싸띠란 무엇일까?”라고 의문하는 것과 같다. 과연 싸띠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한 새김과 항상 함께 하는 쌈빠자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오늘 아침 백권당에서 좌선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새김이라는 것은 정신물질 현상을 새기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 모른다.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하여 마하시사야도의 논서를 참고한다. 마하시사야도와 관련된 저술과 법문은 백권 가량 된다. 그런데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 번역을 보면 싸띠(sati)’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일창스님은 왜 싸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을까? 아마 그것은 새김이라는 말이 싸띠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일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싸띠는 본래 뜻은 기억(memory)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상당수 사람들은 마음챙김으로 알고 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영어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일종의 신조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싸띠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싸띠를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했을 때 문제가 있다. 물질과 정신현상을 새기는 것이 싸띠이다. 그럼에도 싸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했을 때 마음이 마음챙김하는 것으로 되어서 이중으로 마음챙김하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은 챙기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

 

마하시사야도의 논서를 보면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 많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한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 구분되어서 작용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좌선한다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행선한다면 발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를 보라고 한다. 호흡을 보는 것이 아니다. 호흡을 보면 사마타가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면 위빠사나가 된다. 배의 부품은 물질적 현상이다. 배가 부푼다고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중요시한다. 좌선을 한시간 하면 행선을 반드시 한시간 하라고 한다. 수행시간표를 보면 짝수 시간은 좌선시간이고 홀수 시간은 행선시간이다. 오전 8시에 좌선하면 오전 9시에는 행선하는 것이다.

 

행선할 때 육단계 행선을 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의 동작이다.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그런데 동시에 아는 마음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 현상이다. 이때 물질과 정신이 발생하는 것을 면밀하게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싸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배의 부품이라는 물질적 현상과 부품이라고 아는 정신적 현상이 있게 된다. 이 둘 다 모두 싸띠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챙김한다고 하면 이는 부품이라는 물질적 현상을 마음챙김하는 것이 되고, 부품이라고 아는 마음을 마음챙김하는 것이 된다. 특히 후지는 이중으로 마음을 챙기는 것이 된다.

 

마음은 챙기는 대상이 아니다. 마음은 관찰 대상이다. 어떤 마음도 챙김할 수 없다. 단지 지켜만 보는 것이다. 가만 눈을 감고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지켜 볼 뿐이다. 이것이 싸띠 하는 것이다. 이를 새김한다라고 말한다.

 

마음챙김한다고 말하면 마음이 마음을 챙김하는 것이 되어 이중으로 챙기는 것이 된다. 이는 지켜 보는 것 또는 관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싸띠하는 것

 

좌선하면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잡념도 있지만 경전에서 읽었던 것도 떠오른다. 논서에서 읽었던 것도 떠오른다. 법문이나 강연 들었던 것도 떠오른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사념처에 법념처가 있다. 법념처는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법이라고 했을 때 광범위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하여 법념처라고 말한다.

 

대념처경에서 법념처에 대한 것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오개, 육처, 칠각지, 사성제 등 부처님 핵심가르침이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좌선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념처에서 법념처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고.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해서 새김하면 법념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문이든지 외우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르침도 기억하고 더 나아가 외워야 한다. 이렇게 기억하고 외워 두면 어느 때 문득 떠 오른다. 이를 싸띠하는 것으로 본다.

 

싸띠의 제1의 뜻은 기억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싸띠가 된다. 행선하거나 좌선하는 것만이 싸띠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말도 싸띠하며 해야

 

싸띠와 쌈빠자나,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누구나 아는 용어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특히 쌈빠자나가 그렇다.

 

싸띠와 쌈빠자나에 대해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새김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분명한 앎으로 번역했다.

 

싸띠와 쌈빠자나는 어떤 관계일까? 수많은 설명을 보았다. 수많은 해설을 보았다. 그러나 주석만 못할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을 보다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싸띠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말하려는 마음을 말하려 한다, 말하려 한다라고 새깁니다.”(145)라는 구절을 말한다.

 

사람들은 말 할 때 막 말을 한다. 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것과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뱉고 보는 것이다. 이는 싸띠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된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말도 가려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그래서 말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다시 말하더라도 말하는 것을 새기고 있어서,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14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말도 새기며 하라고 한다. 이는 말도 싸띠하며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싸띠하다 보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이익 바른 앎과 관련 있다고 한다.

 

쌈빠자나란 무엇인가?

 

수행을 왜 하는가? 이익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고행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쌈빠자나에 대한 것이다. 주석에서는 쌈빠자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바른 앎(sampajañña)에는 네 종류가 있다. ① 이익 바른 앎(sātthaka sampajañña)은 어떤 행위가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바르게 아는 것이다. ② 적당함 바른 앎(sappāya sampajañña)은 이익이 있더라도 적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아는 것이다. ③ 영역 바른 앎(gocara sampajañña)은 관찰 대상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다. ‘영역이란 분명하게 드러나는 몸, 느낌, 마음, 법 등의 물질-정신 대상이다. ④ 미혹없음 바른 앎(asammoha sampajañña)은 관찰을 통해 무상 등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이다.”(아리야와사법문, 145, 95번 각주)

 

 

일창스님은 쌈빠자나에 대하여 바른 앎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쌈빠자나(sampajāna) 또는 쌈빠잔냐(sampajañña)라는 말 자체가 바른(sam)과 앎(añña)의 결합어이기 때문이다.

 

쌈빠자나는 바른 앎또는 올바른 알아차림또는 분명한 앎등으로 번역된다. 한역으로는 정지(正知)가 된다. 그런데 빠알리어 삼(sam)‘With, together’의 뜻도 있어서 함께 아는 것이 된다.

 

주석에서는 쌈빠자나에 대하여 삿타까(sātthaka), 삽빠야(sappāya), 고짜라(gocara), 아쌈모하(asammoha)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 빠알리 용어는 외워야 한다.

 

네 가지 쌈빠자나가 있는데

 

말 할 때 싸띠하며 말하면 이득이 있다. 이는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145)라고 구절로 알 수 있다. 이것이 삿타까쌈빠자나, 이익 바른 앎에 대한 것이다.

 

삽빠야삼빠자나는 무엇을 말할까? 이를 일창스님은 적당함 바른 앎(sappāya sampajañña)’이라 번역하여 이익이 있더라도 적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말을 할 때 새김을 유지한다면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수행자에게는 이득이 된다. 이득이 된다는 것은 적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수단의 적합성이라고 번역했다.  새김은 이익의 적합성과 관련 되어 있다.

 

고짜라쌈빠자나는 이해하기 쉽다. 이는 관찰대상의 영역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 , , 법 네 가지 영역이 있다.

 

아쌈모아쌈빠자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 같다. 삼빠자나하는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 목적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미혹없음 바른 앎(asammoha sampajañña)’이라 하여 관찰을 통해 무상 등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이다.”라고 했다.

 

싸띠와 쌈빠자나는 늘 함께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바늘가는 데 실 가는 것과 같다. 싸띠만 있고 쌈빠자나가 없다면 바른 위빠사나가 아니다. 쌈빠자나만 있는 위빠사나는 있을 수 없다.

 

올 여름 우안거 들어가려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올 여름 우안거 들어가려 한다. 714일 담마와나선원에서 입재법회가 있는데 참석하고자 한다.

 

올해 우안거는 720일에 시작된다. 음력으로 6월 보름날이다. 우안거가 시작되면 백권당 명상홀에서 하루에 한시간 좌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안거는 세 달 진행된다. 테라와다 우안거를 말한다. 한국불교의 하안거는 아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일년에 한번 있는 안거이다.

 

작년에 우안거를 지낸바 있다. 88일동안 매일 한시간 좌선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재가자가 생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한계이다.

 

늘 싸띠와 함께 네 가지 쌈빠자나가 현전하기를

 

늘 새김을 유지하고자 한다. 매순간 새김이 현전한다면 아라한이라고 한다. 수다원이라면 4분의 1일은 새김이 구족된다고 한다. 일반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떤 장로는 무심코 팔을 굽혔다. 나중에 이를 알고 다시 굽혔다. 새김하며 굽힌 것이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늘 아침 무심코 하늘을 쳐다 보았다.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의 하늘은 살맛 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새김을 놓쳤다.

 

늘 새김을 유지하면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싸띠와 함께 쌈빠자나가 있는 것이다.

 

새김과 쌈빠자나는 늘 함께 간다. 새김 있는 곳에 삼빠자나가 있어야 한다. 이는 새김을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이득이 있어서 새김한다. 이는 삿타까삼빠자나가 된다. 새김은 이득이 되기 위한 적합한 수단이 된다. 그래서 쌉빠야쌈빠자나가 된다. 또한 새김은 늘 네 가지 대상, 즉 심, , , 법에 대한 것이어서 고짜라쌈빠자나가 된다. 그리고 새김을 하면 물질과 정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나가 없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아쌈모하쌈빠자나가 된다.

 

 

늘 새김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잘 때도 새김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더니 꿈속에서 마치 어드벤처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었다. 또한 롤플레잉게임하는 것처럼 되었다.

 

어떤 이는 늘 새김이 현전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그와 같이 될 수 있을까?

 

 

2024-07-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