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사야도법문

셀카놀이로 미모 확인하는 사람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8. 12:01

셀카놀이로 미모 확인하는 사람들
 
 
마음이 심란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음악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음악에는 치유효과가 있다. 특히 이미우이 음악이 그렇다. 라따나경 등 이미우이 음악을 들어 보면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음이 평온해진다. 산란했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요즘 TV를 보지 않는다. 거실에 있는 TV의 안테나 케이블을 빼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대선이 있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뉴스는 일방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일방적인 드라마나 음악도 차단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것이다.
 
유튜브를 즐겨본다. 가장 큰 장점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사실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
 
한때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었다. 흘러간 노래나 7080노래를 들었다. 신세대 노래는 모른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 해소용으로 들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사랑타령, 이별타령이 대부분이다.
 
요즘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다. 이미우이 음악 외에는 일체 듣지 않는다. 왜 그런가? 지나치게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미우이음악은 불교음악이다. 명상음악도 되고 또한 치유음악도 된다. 왜 그런가? 경이나 게송을 음악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듣는 것만으로 공덕을 쌓는 것이 된다.
 
감성을 자극 하는 음악, 감정을 자극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일체 보지 않는다. 불교 경전을 보면 볼수록 심화되는 것 같다. 또한 행선이나 좌선 등 명상을 하면 할수록 멀리하는 것 같다.
 
나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노래, 음악, 영화, 드라마 등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한다. 일년 이상 되었다.
 
삶이 단순해졌다. 경전을 보고 글을 쓰고 명상을 하고 책을 만드는 것 등이 일상이 되었다. 오로지 담마(dhamma)에 대한 것이다. 하루 24시간 부처님 가르침의 바다에 빠져 살아 간다.
 
물질과 정신이 생겨날 때마다
 
책도 가려서 본다. 경전이나 논서 이외에는 잘 보지 않는다. 그저 그렇고 뻔한 이야기들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경전에서 심오한 가르침을 접했을 때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이는 것이다.
 
수많은 논서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해서도 수많은 논서가 있다. 그 중에서도 마하시사야도 논서가 최상이다.
 
요즘 머리맡에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이 있다. 잠들기 전과 잠에 깨고 난 후에 읽어 본다. 새기면서 읽는다. 진도는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마하시사야도의 저서나 법문집을 읽어 보면 새기고 싶은 것이 많다. 가능하면 외우고자 한다. 짧은 문구는 외우기가 가능하다. 그런 것 가운데 하나는 “물질과 정신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 따라가며 끊임없이 관찰하라.”(119쪽)라는 말이 있다.
 
물질과 정신이 일어날 때마다 새기라고 했다. 이렇게 하려면 가능하면 천천히 해야 한다.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뒤를 돌아 볼 때도 “획”하며 돌아 보면 안된다. 코끼리가 방향을 바꾸듯이 천천히 돌아야 한다.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은 자아개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나’라는 개념이 들어가면 힘들어진다.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은 위빠사나수행자에게는 우문이다. 우문이므로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러저러하게 답을 한다면 우답이 되어 버린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나는 어떤 나인가? 크게 세 가지로 본다. 이는 자아로서의 나, 자만으로서 나, 그리고 세상에서 통용되는 명칭으로서 나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모두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로서의 나는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견해를 뜻하는 딧티는 사견으로 간주된다.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이다. 자만으로서 나는 비교에 따른 것이다. 이는 “내가 누군데” 또는 “내가 누군데 감히!”라는 우월적 자만에 따른다.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통용되는 나는 관습적으로 부르는 나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세운다. 몸도 내몸이고 마음도 내마음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얼굴도 내얼굴이다.
 
얼굴에 상처가 날 수 있다.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안절부절 못할 것이다.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여기 얼굴이 예쁜 사람이 있다. 누가 보기에도 매혹적인 미모이다. 바라 보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어떤 미인은 자신의 얼굴을 끊임 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셀카놀이로 미모를 확인하는 사람
 
페이스북에는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매일 올려 놓는다. 이른바 ‘셀카놀이’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다 보면 식상하게 된다. 아무리 예쁜 얼굴도 자주 보면 무덤덤하게 된다. 그럼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셀카놀이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누구나 예뻐지고 싶어 한다. 성형외과가 성업 중인 이유에 해당된다. 이런 배경에는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에 있다. 이는 초기불교 경전에서도 확인 된다.
 
오온 중에 물질이 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1)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2)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3)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4)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S22.1)라고 생각한다. 이 네 가지에 대하여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정형구이라고 한다.
 
유신견이란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당연히 개체는 있을 수 없다. 연기적 세계에서 생생과 소멸, 그리고 상속만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개체, 독립적으로 홀로 있는 개체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미인인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끔찍이 사랑한다. 얼굴에 종기라도 나면 큰일 나는 것이다. 얼굴은 자신의 모든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유신견 정형구에 대입해 보면 “1)얼굴을 자아로 여기거나, 2) 얼굴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3)자아 가운데 얼굴이 있다고 여기거나, 4) 얼굴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라는 문장이 성립된다.
 
자신의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에 상처가 나면 안된다. 여드름 하나라도 나면 마음 상해 할 것이다. 이는 얼굴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됩니다.”(S22.1)라고 했다.
 
여기 몸짱이 있다. 그의 몸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고 탄탄하다. 그는 이런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운동한다. 이런 사람에게 몸은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는 ‘나는 몸이고 몸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됩니다.”가 된다.
 
속박되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속박된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한 속박되는데 그 결말은 어떠할까? 이는 “그 물질이 변화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라고 했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얼굴에 모든 것을 걸었다면 슬퍼질 것이다. 왜 그런가? 얼굴이 변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피부는 탄력을 잃고 쭈굴쭈굴 해졌을 때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세 종류의 나가 있다고 했다. 자아라 하여 사견(diṭṭhi)으로서 집착하는 ‘나’가 있고, ‘나’라고 자만(māna)으로 집착하는 ‘나’가 있고, 세상에서 쓰는 명칭으로서의 ‘나’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 가지 나로 살아간다.
 
사견으로서 집착하는 자아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어떤 변치 않는 실체를 상정하는 것이다. 영혼 같은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나는 없다. 왜 그런가? 연기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는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한참 후에 알았다. 대승불교 교리를 신봉할 때는 알 수 없었다. 초기불교를 접하고서 비로서 알게 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 실려 있는 위와 같은 짤막한 가르침으로 인한 것이다.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에 대하여 ‘조건발생의 법칙’이라고 번역했다. 조건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뜻이다.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조건이 빠지면 연기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관계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법임을 말한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TV에서 보는 자연인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결되어서 존재한다. 진짜 홀로 있게 된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연기법을 벗어난 것이 있다. 그것은 명칭이다. 오로지 이름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 그런데 신은 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은 연기법적 관계의 그물망에서 있을 수 없다. 만약 신이 연기법적 그물망에 있다면 그는 절대자가 될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존재한다면 이름이나 명칭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홀로 존재한다면 관계의 그물망 밖에 있기 때문에 실재 하지 않는 것이 된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이런 질문을 해 본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답은 없다. 여기서 나라는 말 때문이다. 이때 나는 자아로서의 나와 자만으로서 나가 해당된다.
 
자아로서의 나는 있을 수 없다. 스스로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나는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관계를 떠나 홀로 존재한다면 이는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에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생멸이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관계속에서 생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자아나 자만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언어적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미인인 사람이 얼굴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다. 그렇다고 나를 세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했을 때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세상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말하는 나에 대한 것이다.
 
무아의 성자가 설법할 때 나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라는 것에 대하여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S1.25)라고 했다.
 
불교인들이 대화할 때 나라는 명칭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나는 어떤 변치 않은 자아로서의 나가 아니라 세상의 관례에 따라 부르는 나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S22.94)라고 말하는 것이다.
 
얼굴만 바라보고 살 수 없다
 
페이스북에서 셀카놀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얼굴을 매일 올리는 것이다. 대체로 미남미녀들이 많다. 그러나 자주 보면 식상한다. 불상도 그럴까?
 
불교인들인 법당에 가면 삼배하며 참배한다. 그때 부처님 상호를 바라다 본다. 그렇다고 돌로 된 불상, 나무로 된 불상, 철로 된 불상에게 절한다면 우상숭배가 된다.
 
불교역사에 있어서 무불상시대가 있다. 부처님 사후 대략 오백년동안 불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부처님을 기리는 상징이 필요 했다. 그것은 족적, 보리수, 법륜 등으로 나타났다.
 
지난 봄 용산에 있는 국립현대박물관에서 ‘남인도스투파전’이 열렸다. 그때 무불상 시대의 상징인 족적, 보리수, 법륜 등을 보았다. 그런데 후대로 감에 따라 불상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스투파전 마지막 코스에 불상이 있었다. 인자해 보이는 불상이다. 과연 저 불상이 부처님 당시의 부처님 얼굴일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성현들의 얼굴은 알 수 없다. 조각이나 초상화 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얼굴은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이다.
 
오늘 얼굴은 어제와 다르다. 십년전과는 아주 다르다. 하물며 이천오백년전의 부처님 얼굴은 어떠했을까?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상호에 푹 빠진 제자가 있었다. 제자는 부처님 상호의 아름다움에 빠져 설법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교실에서 수업 중에 어떤 남학생이 미모의 여선생 얼굴만 빤히 쳐다 보는 것과 같다.
 
학생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한마디 할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얼굴만 빤히 쳐다 보는 학생에게 “학생은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지요?”라며 주의 줄 것이다. 부처님도 그랬다.
 
부처님은 설법 중에 자신의 얼굴만 바라 보고 있는 제자에게 주의 주었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S22.87)라고 말씀 하셨다.
 
사람이 얼굴만 바라보고 살 수 없다. 얼굴은 물질적인 것으로 부서져 가고 있다. 집중해야 할 것은 가르침이다. 불상을 바라보고 백배, 천배 하는 것보다 사구게 하나라도 외우는 것이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보리수를 불상처럼
 
부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거룩하신 부처님을 어떻게 사람의 얼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든 불상도 부처님 그분을 잘 표현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도 심오한 가르침을 설한 부처님을 잘 나타낼 수 없다.
 
절에 가면 불상 앞에서 삼배 한다. 그렇다고 불상의 아름다움에 삼배하지 않는다. 불상의 아름다움만 추구한다면 못 생긴 불상은 어찌해야 할까?
 
어느 누구도 부처님의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 아름다운 불상에서 종교적 신심을 내는 것은 우상숭배로 흐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부처님을 볼 수 있다.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실천이다. 가르침을 실천 했을 때 내가 부처가 된다. 그래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S22.87)라고 했을 것이다. 또한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는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라고 했을 것이다.
 
백권당에 불상은 없다. 그 대신 부처님 원음이라 불리우는 경전은 모두 다 갖추어 놓았다. 빠알리 니까야 번역된 것은 다 갖추어 놓았다. 그것도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와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 두 종류를 갖추어 놓았다.
 
매일 부처님을 만난다. 불상이 없어도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한다. 경전이 불상이고 불상이 경전인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 보리수가 있다.
 

 
 
보리수는 작녁 페이스북친구 박영빈 선생으로부터 받았다. 잘 키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잘 자라지 않는다. 싹이 나면 금방 말라 버린다.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보리수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 방법을 바꾸었다. 햇볕이 잘 드는 창을 피한 것이다. 약간 그늘 진 곳에 옮겨 놓았다. 물을 삼사일에 한번 주었다. 이전에는 일주일이나 이주, 심지어 삼주에 한번 주었다.
 
보리수에 새싹이 올라 왔다. 한번 올라오자 이후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방법이 맞는 것일까?
 
보리수가 무성하게 자라기 바란다. 보리수가 성장하면 부처님 가르침도 널리 퍼져 나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에서는 불상보다 보리수를 더 살핀다.
 
보리수는 부처님을 상징한다. 불상과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밀린다팡하 주석을 보면 보리수를 잘 관리하지 못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나와 있다.
 
보리수와 함께 하는 나날이다. 나에게는 보리수가 불상이다. 초기경전도 불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천이다. 오늘 마하시사야도의  “물질과 정신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 따라가며 끊임없이 관찰하라.”(119쪽)라는 말에 크게 사무쳤다.
 
 
2024-07-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