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근본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
가사 입었다고 모두 다 스님일까? 재가불자는 스님이라 칭할 수 없을까? 놀랍게도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스님이라 칭할 수 있다고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아리야와사 법문’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놀라운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다.
“아리야와사숫따에서의 비구는 경장에 따른 비구입니다. 경전에 따라 말하면 갈마를 통해 출가한 스님이든 재가자든 법을 실천하고 있는 이는 모두 비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의 비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욕계천신과 범천들까지도 포함합니다.”(아리야와사 법문, 62쪽)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다. 구족계를 받은, 가사를 입은 사람만 스님인줄 알았는데 재가자도 스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천신도 스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가 비구라고 한다. 반대로 구족계를 받은 비구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비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종류의 비구가 있는데
마하시사야도가 말한 비구는 경장에 따른 비구이다. 이는 두 종류의 비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율장의 비구와 경장의 비구를 말한다.
율장의 비구 조건은 무엇인가? 이는 “율장에 일치하게 수계해서 가사를 두르고 바르게 실천하고 있는 출가자들을 말합니다.”(62쪽)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비구 되기는 쉬웠다. 부처님께서 “에히 빅쿠(ehi bhikkhu)”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수행승(비구)이 되었다. 이 말은 “비구여 오라”라는 말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구 되기가 쉽지 않았다.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 오게 됨에 따라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다. 승가모임에서 공식 갈마를 통해 구족계를 준 것이다.
경장비구는 경장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아리야와사경’(A10.20)을 예로 들었다.
아리야와사경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다섯 가지 고리를 끊고, 여섯 가지 고리를 갖추고, 한 가지를 수호하고, 네 가지에 의존하고, 모든 독단을 제거하고, 갈망의 추구를 종식하고, 사유하는데 더러움을 없애고, 신체적 형성을 고요히 하고, 마음에 의한 해탈을 잘 이루고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잘 이루는 것이다.”(A10.20)
여기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라고 부른 것은 경장의 비구를 부른 것이다. 반드시 구족계를 받은 출가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 가지 고리를 끊는 등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하여 비구라 칭하는 것이다.
비구에 대한 정의
청정도론을 보면 비구에 대한 정의가 있다. 청정도론 1장에 “삼사레 바양 익카띠띠 빅쿠(saṃsāre bhayaṃ ikkhatiti bhikkhu)”(Vism.1.7)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말은 “윤회에서 위험을 본다. 그래서 비구이다.”라는 뜻이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를 비구라고 한다. 이는 비구의 개념을 대폭 확장한 것이다. 누구든지 윤회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자는 비구가 된다. 누구든지 존재의 두려움을 보는 자는 비구가 된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니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ItA.61’라는 말이다. 이띠붓따까 주석에서 유래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띠붓따까 주석을 찾아 보았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실려 있는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Yoniso manasikāroti gāthāya ayaṃ saṅkhepattho – sikkhati, sikkhāpadāni tassa atthi, sikkhanasīloti vā sekho. Saṃsāre bhayaṃ ikkhatīti bhikkhu. Tassa sekhassa bhikkhuno uttamatthassa arahattassa pattiyā adhigamāya yathā yoniso manasikāro, evaṃ bahukāro bahūpakāro añño koci dhammo natthi. Kasmā? Yasmā yoniso upāyena manasikāraṃ purakkhatvā padahaṃ catubbidhasammappadhānavasena padahanto, khayaṃ dukkhassa pāpuṇe saṃkilesavaṭṭadukkhassa parikkhayaṃ pariyosānaṃ nibbānaṃ pāpuṇe adhigaccheyya, tasmā yoniso manasikāro bahukāroti.”
주석에 “Saṃsāre bhayaṃ ikkhatīti bhikkhu”라는 문구가 보인다. 관련된 경을 찾아 보니 ‘Paṭhamasekhasutta’이다 이 경은 ‘학인의 경2’(It.10)이라 불리운다.
이띠붓따까 ‘학인의 경’을 찾아 보았다.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
아직 배울 것이 남아있는 수행승의 원리이니,
최상의 목표에 이르는데,
이것밖에 달리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수행승은
괴로움의 소멸에 도달하는 것이다.”(It.10)
게송에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빠알리어 ‘요니소마나씨까라(Yonisomanasikāra)’를 번역한 말이다.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학인(sekha)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여 최상의 목표에 도달해야 함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는 윤회의 그침이기도 하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모두 비구인 것이다.
윤회의 두려움은 존재의 두려움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어 보면 존재에 대하여 두려움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대표적으로 맛지마니까야 49번경이다. 게송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를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
부처님은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았다. 그런데 존재는 윤회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윤회의 두려움을 말한다. 윤회의 두려움은 존재의 두려움인 것이다.
윤회의 두려움은 존재의 두려움이다. 그런데 존재하는 것이 두렵고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존재는 근본적으로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
존재는 괴로움이다. 이런 이유로 존재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존재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장 먼저 고성제를 설했다.
사성제는 인과(因果)로 구성되어 있다. 원인은 집성제에 대한 것이고 결과는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결과에 해당되는 고성제부터 먼저 설했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사고와 팔고를 가장 먼저 설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존재는 괴로울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존재는 괴로움임을 말한다.
결과를 먼저 던진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성제에서 가장 먼저 던진 것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말이다. 원인과 결과에서 결과를 먼저 던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심오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 존재는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다음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다.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성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당연히 부처님 가르침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괴로움이 세팅된 채로 태어났음을 말한다. 요새 말로 하면 하면 ‘디폴트’가 된다. 괴로움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태어났음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사고와 팔고는 디폴트
인간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부처님은 사고와 팔고로 설명했다. 생, 노, 병, 사, 사고에다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를 더해서 팔고가 된다. 이와 같은 사고와 팔고는 디폴트이다. 태어날 때부터 ‘기본설정’된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문제를 풀 수 있다. 인간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면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멸성제와 도성제를 설했다.
궁극적 체험을 해야 하는 이유
멸성제와 도성제의 관계는 인과관계이다. 여기서 인은 도성제가 되고 과는 도성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부처님은 과를 먼저 설하고 인을 나중에 설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궁극적 체험과 관련 있다고 본다.
멸성제는 갈애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궁극적 경지에 해당된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 누구든지 궁극적 경지, 즉 열반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아 있는 번뇌가 모두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학인은 배우는 사람을 말한다. 아라한을 제외하고 모두 학인이 된다. 사향사과의 성자에서 아라한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종류의 사람을 학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궁극적 체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열반체험을 말한다. 이를 견도(見道)라고 한다. 수다원의 경지가 이에 해당된다.
열반을 체험했다고 하여 번뇌가 모두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번뇌가 소멸된 궁극적 경지를 맛 보았을 뿐이다. 반조하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을 하게 된다. 이를 수행도(修行道)라고 한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경지가 이에 해당된다.
윤회에서 두려움과 존재의 두려움을 느끼는 자
학인은 아라한을 제외한 수다원과, 사다함, 아나함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경의 게송을 보면 “아직 배울 것이 남아있는 수행승(dhammo sekhassa bhikkhuno)”(It.10)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수행승은 빅쿠를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이띠붓따까 각주를 보면 수행승에 대하여 “”ItA.64에 따르면, 윤회에서 두려움(bhaya)을 보기(ikkhati) 때문에 수행승(bhikkhu)이다.”(479번 각주)라고 써 놓았다. 이띠붓따까 주석을 인용하여 수행승을 설명해 놓은 것이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를 수행승이라고 한다. 이는 수행승의 개념을 대폭 확장한 것이다. 경장에서 말하는 수행승, 빅쿠, 비구는 윤회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자, 존재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자는 모두 수행승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법문집에서 디가니까야 주석서를 대역하여 “천신이든 사람이든 실천하는 이는, 법을 수행하는 이는 비구라는 용어에 포함된다.”(DA.ii.346)라고 소개했다. 이 말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 천신이든 인간이든 윤회의 위험을 내다보고 그 윤회로부터 벗어나려고 법을 실천하고 있으면 그러한 이는 모두 비구라고 부를 수 있다.”(61쪽)라고 해석을 달았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를 비구라고 한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논서 위방가 주석을 인용하여 하나 더 추가 했다. 어떤 것인가? 이는 “낄레세 빈다띠띠 빅쿠(kilese bhindatiti bhikkhu)”(VbhA.314)라는 말이다. 이 말은 “번뇌들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비구이다.”라고 번역된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를 비구라 하는데 하나 더 추가 되었다. 번뇌를 무너뜨리는 자 역시 비구로 보는 것이다. 이는 구족계 받은 것과 관련 없다. 경장에서 비구를 말한다. 누구든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고 번뇌를 부수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설령 그가 재가자이더라도 비구로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천신도 비구로 본다.
위범번뇌, 현전번뇌, 잠재번뇌
왜 수행을 하는가?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하는 또 하나의 목적은 번뇌를 부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세 가지 번뇌의 부숨으로 설명한다. 위범번뇌, 현전번뇌, 잠재번뇌를 말한다.
위범번뇌(vītikkama kilesa)란 무엇인가? 법문집에 따르면 살생이나 도둑질 등 몸과 말로 그릇된 실천을 하도록 부추기는 탐욕이나 성냄 등의 번뇌를 말한다. 계를 잘 실천하고 있으면 매우 거친 위법번뇌들을 없앨 수 있다.
현전번뇌(pariyuṭṭhāna kilesa)란 무엇인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망상하면서 생겨나는 탐욕이나 성냄 등의 번뇌들을 말한다. 삼매수행을 잘 실천하고 있으면 삼매와 관계된 현전번뇌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잠재번뇌(anusaya kilesa)란 무엇인가? 조건이 형성될 때마다. 기회를 얻을 때마다 생겨날 수 있는 탐욕이나 성냄 등의 번뇌들을 말한다. 위빳사나 관찰을 하고 있으면 계속해서 관찰할 때마다 그렇게 미세한 잠재번뇌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가지 종류의 번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친 것, 중간 것, 미세한 것의 번뇌에 대한 것이다. 거친 것은 오계를 지키는 것에 의해서 없앨 수 있고, 중간 것은 삼매를 통해서, 그리고 미세한 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제거할 수 있다. 번뇌는 계, 정, 혜 삼학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법구경에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Dhp.260)라고 했다. 가사를 둘렀다고 해서 모두 비구는 아닐 것이다. 누구든지 윤회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자, 번뇌를 부수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비구라고 말할 수 있다.
찌릿찌릿한 법희열(法喜悅)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논서를 읽어 보면 담마의 진수를 알게 된다. 그 중에서도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읽으면 법의 맛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08년 12월의 일이다. 그때 한국명상원 묘원선생으로부터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법문집을 접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는 선원 교재로 활용되었다. 매주 토요일 들었다. 2009년 말까지 일년 들었다. 처음으로 부처님 가르침이 무엇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다.
마하시시야도와 관련된 책은 백권이 넘는다. 최근에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한국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불교에서도 볼 수 없다. 세계가 글로벌화됨에 따라, 교통과 인터넷이 발달됨에 따라 최근에 접하게 되었다.
마하시사야도의 저술이나 법문집을 접하면 ‘법의 맛’을 느낀다. 그런데 아리야와사 법문에서는 이를 ‘법희열(法喜悅)’으로 설명하고 있다.
법희열이란 무엇인가? 이는 담마삐띠(dhamma piti)를 번역한 말이다. 어떤 것인가? 법문집에 따르면 “찌릿찌릿함”으로 설명해 놓았다. 빠알리 경전을 접했을 때 찌릿찌릿함이다. 이를 법희열이라고 했다.
법의 맛보다 더 강한 것은 법희열이다. 니까야에서 하나의 게송을 접할 때 충만된다. 이를 찌릿찌릿함, 법희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의 저술이나 법문집을 접할 때도 찌릿찌릿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2024-07-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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