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믿지 않으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4. 10:30

믿지 않으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
 
 
평온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방금 좌선을 마쳤다. 오래 한 것은 아니다. 불과 22분 앉아 있었다. 그리고 10여분 누워 있었다.
 
매일 아침 좌선을 하기로 했다. 이전에는 글 쓰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백권당에 도착하면 하루일과 가운데 가장 먼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좌선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 결과 좌선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안되면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전에 회사 다닐 때 늘 듣던 말이 있다. 이는 “3일 쑤셔 보아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방법을 바꾸어라.”라는 말이다. 전자제품을 개발할 때 듣던 말이다. 선배사원들로부터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하루일과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좌선을 가장 먼저 하기로 한 것이다. 그 다음에 글도 쓰고 업무도 보는 것이다. 며칠 되었다.
 
수행은 젊었을 때 하라는 말이 있다. 요새 이런 말을 실감한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노화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건강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일까? 심리적인 것일까? 그러나 아침에 샤워를 하고 길로 나서면 마음은 새로워진다. 무엇보다 좌선이다.
 
앉아 있는다고 해서 집중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치고 들어 온다. 가만 내버려 두면 한편의 드라마를 만든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한다.
 
좌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평온해질 때가 있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기회가 된다. 그 기회를 잡고 놓치지 않는 것이다.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부품과 꺼짐이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렇다고 배의 모양이나 형태를 보는 것은 아니다. 풍대를 보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이라는 바람의 세계를 말한다.
 
좌선에서 일시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되었을 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면부족도 해결되는 것 같다. 아주 짧은 기간 정신과 물질의 현상만 보았을 뿐인데 피로가 해소되는 것이다. 마치 숙면을 취한 것 같은 기분이다.
 
올해 우안거는 7월 20일부터
 
매일 아침 좌선하는 것은 우안거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일종의 몸풀기라고도 볼 수 있다.
 
올해 우안거는 7월 20일 시작된다. 테라와다 안거를 말한다. 이에 담마와나선원밴드에 들어가 보았다.
 
밴드에 우안거에 대한 소식이 없다. 그 대신 울주에 있는 ‘붓다의길따라선원’ 밴드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우안거 입재법회가 열린다고 공지가 떠있다.
 
작년 생애 최초로 우안거를 했다. 재가우안거를 말한다. 사무실에서 좌선 한시간 하는 것을 우안거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올해도 우안거를 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입재법회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담마와나선원 밴드에 소식이 없었다. 이에 “올해 우안거 법회는 없는지요?”라고 문의한 것이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 같다. 밴드에 남긴 글이 영향을 준 것 같다. 담마와나선원 재가운영위원회 최광희 회장이 글을 올렸다. 글의 제목은‘2024년 7월 14일 특별초청탁발법회’이다. 이는 다름 아닌 ‘우안거 입재법회’를 말한다.
 
담마와나선원에서 우안거를 앞두고 탁발법회가 열린다. 빤냐와로 스님을 비롯하여 열두 분의 상가 스님을 모시고 우안거 입재법회가 열리는 것이다. 안거시작 날자 보다 일주일 앞서 열리는 것이다.
 
좌선은 일순위 글쓰기는 이순위
 
글쓰기와 좌선하는 것,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이제까지 글쓰기를 우선시 해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 태도를 바꾸려 한다. 좌선을 더 우선시 하는 것이다. 좌선이 일순위가 되고 글쓰기가 이순위가 되는 것이다.
 
글은 언제든지 쓸 수 있다. 그러나 좌선은 언제든지 앉을 수 없다. 오전 아홉시가 되면 앉아 있기 힘들다. 업체 담당들의 출근시간이다. 언제 어떤 전화 걸려 올지 모른다. 메일을 열면 어떤 일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좌선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오전 일곱 시에서 아홉 시 사이이다. 이 두 시간 안에 좌선을 하면 방해 받지 않는다. 무엇보다 효율적이다. 오전 좌선은 오후나 저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까지 글쓰기 위주의 삶을 살아 왔지만 명상위주로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명상은 행선과 좌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말한다. 일상에서 늘 새기는 삶, 싸띠하는 삶이다.
 
자기와 비교해서 거칠지 않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명상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승이 있어서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나 스승이 없는 사람은 책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마하시사야도의 저술이나 법문집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오늘 새벽 머리맡에 있는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을 읽다가 인상적인 각주를 발견했다. 이런 글을 접하면 항상 새겨 두고 싶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는 마하시사야도에 대하여 이론가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다. 백권에 달하는 저술을 했으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하시사야도는 철저하게 수행을 강조한다. 수행에서 우러나온 것을 쓴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책을 비난한다는 말이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부처님은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라든가.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만 본다’라든가, ‘남의 소나 세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수행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한다. 이론적으로 알고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직접 경험하지 못해서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84쪽)라고 써 놓았다.
 
흔히 이렇게 말한다. 자동차는 운전해 보아야 하고 수영은 헤엄쳐 보아야 하고 사과는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론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말한다. 이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영향도 크다. 이런 사람에게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신통이나 초월적 이야기는 어떠할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미얀마 속담에 “자기와 비교하면 거칠지 않다.”(79쪽)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무학대사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는 말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 위주로 판단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다원일지라도 살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사악도에 떨어질 정도의 중죄는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연구해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범부는 성자의 경지를 알 수 없다. 범부의 마음으로 성자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은 가능하다. 왜 그런가? 성자의 정신세계는 범부의 정신세계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낮은 데를 내려다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지도가 가능할 것이다.
 
범부가 성자를 비방하면 구업이 된다. 정신적인 경지가 낮은 자가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려 했을 때 자신의 수준에서 보게 된다. 수다원이라도 오계를 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자기와 비교해서 거칠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거친 사람이 자기보다 조금 덜 거친사람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새기고 싶은 문구가 있는데
 
경전을 보지 않은 사람이 경전만 본다고 비방한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수행만한다고 비난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경전을 보지 않은 사람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무상, 고, 무아에 대한 믿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직접 경험하지 못해서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84쪽)라고 했다. 그런데 책의 각주를 보면 이 문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 놓았다.
 
 
“ ‘없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어렵다. 모르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라는 미얀마 속담이 있다. 없는 것은 있게 할 수 있지만 모르면 곤란하다. 또 모르는 것은 알게 해 줄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 더욱 어찌해 줄 수 없다. 여기에 ‘하지 않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첨가할 수 있다. 믿지 않으면 도저히 어떻게 해 줄 수 없다.”(84쪽, 56번 각주)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다. 길이 새기고 싶은 말이다. 각주에 써 있는 말이지만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결국 믿음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았거나 자신의 귀로 듣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체험을 해보면 사실로서 받아 들인다.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진리를 설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이는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럽고, 미묘한 진리”(S6.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런 진리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逆流道)’이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욕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부처님은 욕망을 내려 놓으라고 했다. 세상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사람들이 싸움을 걸어 올 수 있다.
 
부처님은 세상사람들과 싸우지 않았다. 다만 진리를 설했을 뿐이다. 문제가 있다면 세상사람들이다. 왜 그런가? 이는 부처님이 욕망으로 사는 세상사람들에 대하여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S6.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했다. 하느님(Brahma) 싸함빠띠의 간청에 따른 것이다. 하느님이 무릎을 꿇고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S6.1)라며 청원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고자 했을 때 하나의 조건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예 소따반떼 빠뭇짠뚜 삿당(ye sotavante pamuccantu saddha)”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S6.1)라는 말이다.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앙이나 사상을 먼저 버리라는 말이다.
 
기독교를 믿으면서 불교를 믿을 수 있을까? 불교를 믿으면서 기독교를 믿을 수 있을까? 서로 상충되는 교리로 인하여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둘 중에 하나는 버려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말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부처님의 진리를 받아 들이려면 기존 사상체계나 신앙체계를 비워 내야 한다. 마치 머리를 초기상태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청소년 시기가 좋다. 나이가 들면 여러 사상이나 신앙으로 인하여 자신만의 세계가 확립되어서 부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부처님의 진리를 받아 들이려면 먼저 머리 속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절의 주련을 보면 ‘입차문래막존지해’라고 했을 것이다. 이 문에 들어서거든 알고 있는 지식을 버리라는 말이다.
 


한번 의심이 나면
 
새로운 믿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확고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말했을 때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체험을 하면 받아 들일 수 있다. 자아 또는 영혼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해서 그런 것은 없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수행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무아를 말했을 때 위빠사나 수행을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런데 한번 믿게 되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다는 사실이다.
 
한번 의심이 나면 걷잡을 수 없다. 의처증이나 의부증 같은 것이다. 마찬가 지로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면 믿음이 생겨날 수 없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열반’에 대하여 수없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열반은 정말 있는 것일까?’라며 의심한다면 어떻게 될까? 믿음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열반을 체험한다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지식은 머리로 지혜는 몸으로
 
우리 속담에 말을 물가에 까지 데려 가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와 유사한 말은 미얀마 속담에도 있다. 이는 각주에 “있는 없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어렵다. 모르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라는 말이다.
 
미얀마 속담에 “있는 없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하여 “없는 것은 있게 할 수 있지만 모르면 곤란하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이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모르면 답답하지만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식의 습득이 그렇다. 이는 어쩌면 머리로 아는 것이 된다. 문제는 실천이다.
 
말을 물가에 데려 올 수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다. 그래서 각주에서는 “또 모르는 것은 알게 해 줄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 더욱 어찌해 줄 수 없다.”라고 했다. 이는 지식과 지혜에 대한 것이다.
 
지식은 머리로 아는 것이다. 지혜는 몸으로 아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고 책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삶의 지혜는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알게 해 줄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 더욱 어찌해 줄 수 없다.”라고 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교학(pariyatti)과 수행(paipatti)이라는 양날개가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여 나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통찰(paivedha)이 있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때 믿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체험을 통한 믿음이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
 
믿기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아무리 믿으라고 하지만 믿기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합리적 믿음 삿다(saddha)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서 다녔다. 삼년동안 기독교를 체험했다. 그러나 믿음이 오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전체예배가 있었는데 교목이 설교할 때 어느 학생들은 “믿사옵니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동시에 믿음의 종교이다. 어떤 믿음인가? 합리적인 믿음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며 사고와 팔고를 설했다. 이런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며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자는 부처님이 설한 사고와 팔고에 대하여 자신의 현실에 대입해 볼 것이다.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진리로서 받아 들이면 믿음이 생겨난다. 이런 믿음은 맹목적인믿음과 다른 것이다. 이성적 판단에 의한 믿음이다. 사실에 근거한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삿다(saddha)라고 한다.
 
수행자가 법에 대하여 의심하면
 
수행자도 법에 대하여 의심할 수 있다. 이는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이다. "성자의경지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있을까?"라고 의문하는 것이다. 이는 열반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유신견과 의심과 계금취견을 버려야 한다. 여기서 의심은 법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의심은 확실하게 믿지 않아서 발생된다. 수행방법에 대하여 이리저리 숙고하는 것도 해당된다.
 
흔히 수행은 스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먼저 체험해 보아서 알기 때문이다. 스승이 말한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수행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말을 물에 데려 갈 수 있다. 물까지 먹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은 아니다. 수행처에 가서 수행을 할 수는 있지만 수행의 경지나 수행방법에 대하여 의심하게 된다면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하지 않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했고, 또한 “믿지 않으면 도저히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라고 했을 것이다.
 
방석에 앉을 때 가장 마음이 가장 편안
 
매일 아침 백권당에 오면 먼저 좌선하고자 한다. 당연히 아침을 먼저 먹어야 한다. 준비해 온 삶은 계란 하나, 고구마 조그마한 것 하나, 그리고 치즈한장과 토스트 한 개가 전부이다. 이를 꿀물과 함께 먹는다.
 
아침을 마치면 대략 일곱 시가 넘는다. 이때부터 아홉시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이 시간은 방해받지 않는다. 전화도 걸려 오지 않는다. 일체 뉴스도 보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먼저 행선을 한다. 그리고 방석에 앉는다.
 
방석에 앉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하다. 이 세상을 벗어난 것 같다. 눈을 감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몸관찰하는 것이다.
 


마하시 방식은 몸관찰에 대한 것
 
마하시 방식은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느낌을 본다거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에 대하여 마하시시야도는 “실제 경험에 의하면 몸 거듭관찰(kāyānupassanā)을 기본으로 해서 관찰하는 것이 지금 시대의 대부분 수행자들에게 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598쪽)라고 써 놓았다.
 
마하시방식으로 수행한다. 몸관찰이 기본이다. 이는 ‘지혜는 체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지식은 머리로 얻어지지만 지혜는 몸을 통해서 얻어짐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하시방식의 몸관찰은 무상, 고, 무아의 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인 것 같다.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
 
오늘 새벽에 읽은 하나의 각주를 보고서 길이 새기고자 했다.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수행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다. 머리로 이해하여 합리적인 믿음 삿다(saddha)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체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험을 하면 부처님 그분이 말씀하신 진리가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스승이 말한 것도 믿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없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어렵다.
2)모르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3)하지 않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어떤 종교이든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믿음이 가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믿기면 믿는다는 것이다. 믿음이 가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도저히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2024-07-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