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사야도법문

한걸음도 무심코 내딛어서는 안돼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18. 11:42

한걸음도 무심코 내딛어서는 안돼
 
 
지금 몸과 마음이 편안합니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듣던 말이다. 십여년전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했을 때 듣던 말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방금 좌선을 마쳤다. 오래 한 것은 아니다. 고작 삼십분 했다. 평좌한 몸이 가벼웠다. 몸이 가벼우니 마음도 가벼웠다.
 
좌선은 한시간 해야 한다. 행선도 한시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빨리 글을 쓰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글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한 늘 제자리 걸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언제나 글쓰기를 멈출 수 있을까?
 
수행이 체계화 되어 있는 위빠사나
 
어제저녁과 오늘새벽 머리맡에 있는 ‘아리야와사법문’을 읽었다. 새기고 싶은 구절이 있었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그것은 위빠사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를 알고 나서부터 접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십육단계 지혜이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듯이, 지혜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싸띠가 핵심이다. 새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싸띠를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새김이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새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마하시사야도는 아리야와사법문에서 이렇게 써 놓았다.
 
 
처음 수행을 시작해서는 <감; 듦. 감, 놓음; 굽힘: 폄> 등으로 거친 형태의 대상만 관찰해야 합니다. 나중에 삼매와 지혜가 무르익으면 여섯 문에서 물질과 정신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해서 그것을 모두 알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씩 계속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마치 염주 알들이 한 알씩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대상 하나가 드러나면 그것을 아는 마음이 생겨나고, 다시 그것을 관찰하여 새기는 마음이 생겨나고, 이렇게 앞뒤로 계속해서 생겨나서는 사라지는 것을 단계 단계 경험하여 알 수 있습니다.”(아리야와사법문, 86쪽)
 
 
이런 글은 한국불교에서 접할 수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처럼 “~없고, ~없고,..”라는 것만 접해 보았다. 한마디로 이론이 없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의 장점은 무엇일까? 이론이 있는 것이다. 이는 수행이 체계적임을 말한다. 수행이 체계화 되어 있어서 따라만 가면 된다. 초등학생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법문에서는 새김을 강조했다. 처음에는 거친 것부터 관찰한다. 나중에는 미세한 것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거친 것이란 행, 주, 좌, 와를 말한다. 미세한 것이란 육문에서 발생되는 정신과 물질적 현상을 말한다.
 
가면 간다고 알아야 한다.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너무나 쉬운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은 부처님이 말 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대념처경에서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라고 말했다.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고찰을 말한다.
 
열심히 기도만 하라는데
 
한국불교에 대하여 잘 모른다. “이뭐꼬?”하며 앉아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 비난이 될 것이다. 해보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 되어서 비난이 된다. 해보고 나서 말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 처음 정식으로 입문했을 때 들은 말이 있다. 이십년전의 일이다. 그때 원장스님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했다.
 
불교를 처음 접했을 때 들은 말은 기도이다. 수행하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관음정근하는 것이 불교인줄 알았다. 백팔배 하며 정근하는 것이 불교인줄 알았다. “나모라다나다라..”라며 신묘장구대다라니 백팔독 철야정진하는 것이 불교인줄 알았다.
 
불교를 접하고 사년을 보냈다. 아무리 해도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입문했는데 기도만 하라고 하니 양이 차지 않은 것이다.
 
미얀마불교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간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마하시사야도와 만났다. 책으로 만난 것이다. 한국명상원 교재는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였다.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미얀마에 가 본적이 있다. 2018년 12월 31일 양곤 근처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 도착했다. 보름 가량 있었다.
 
미얀마불자들은 수행을 했다. 아줌마들도 수행을 했다. 청소년도 수행을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 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 보름 집중수행이 끝났다. 일박이일로 선원과 성지 투어를 했다. 그때 어느 선원에서 행선을 하고 있는 미얀마 아줌마가 눈에 와 닿았다. 한국 같았으면 관음정근을 한다든가, 백팔배를 한다든가, 신묘장구대다라니 백팔독 철야정진 기도를 할 텐데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곡 수행센터 재가불자들)

 
미얀마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행선과 좌선을 했다. 청소년들도 행선과 좌선을 했다.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재가불자들도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고등학생이 아버지의 강요로 15일간 집중수행했는데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은 1962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마을에 갔었는데 법문 요청이 있어서 이틀 법문 했다. 이를 누군가 녹음 했다. 어느 의사가 이를 녹취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이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보게 되었다.
 
일창스님은 미얀마어가 유창하다. 우 소다나 사야도의 법문을 통역해 준다. 수많은 마하시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영문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미얀마어로 된 것을 직역한 것이다. 재가자의 수행과 관련해서 아리야와사법문에 이런 각주가 있다.
 
 
미얀마 수행센터에 한 고등학생이 아버지의 강요로 15일간의 집중수행에 들어왔다. 3,4일쯤 지나자 학생은 “다리도 너무 아프고 생각도 많고 졸음만 쏟아져 집에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도스승은 “그러면 경행은 30분만 하고 좌선도 15분만 해라”라고 수행 시간도 줄여 주고 중간중간 빵이나 바나나 등을 주면서 달랬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학생은 수행이 익숙해졌다. 한 시간 경행, 한 시간 좌선까지 할 수 있게 됐다. 들어온 지 10일째에는 위빳사나 지혜가 많이 향상됐다. 수행을 마치기 전날 인터뷰 때 다른 망상 없이 고요하게 부품과 꺼짐을 관찰 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좋다고 말하면서 처음에는 수행을 강요한 아버지가 미웠지만 지금은 매우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예경까지 올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집중수행에도 꼭 참가하겠다고 다짐했다.”(아리야와사법문, 141쪽 92번 각주)
 

 

(담마마마까 수행센터 청소년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동시에 부러운 말이다. 미얀마에서는 청소년들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1962년의 일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수행하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청소년은 집중수행을 했다. 행선과 좌선을 해서 법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이는 법문에서 “에히빳씨꼬(와서보라!)”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권유할만한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 가르침이 훌륭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한번 법의 맛을 보게 되면 법을 권유한 이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아들도 그랬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행을 강요한 아버지가 미웠지만 지금은 매우 감사하다.”라고 한 것이다.
 

(삿담마란시 재가여성 수행자)

 
미얀마는 위빠사나 성지
 
미얀마는 참으로 놀라운 나라이다. 군부독재로 인하여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불교에 관한 한 대국이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수행을 한다. 물론 기복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곤 쉐다곤파고다나 성지에 가면 두 손을 합장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미얀마는 위빠사나 성지와도 같다. 전세계 사람들이 미얀마로 가는 것은 자국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국의 수행법에 한계를 느껴서 마치 스승을 찾아 유학가듯이 떠났을 것이다.
 
오늘날 위빠사나 수행법은 마하시방식이 잘 알려져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주로 보는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이를 체계화 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등 수많은 저서가 이를 말해준다.
 
위빠사나를 접하면서 단계가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너무나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경전과 논서에 근거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수행법이 면면히 전승되어 온 것이다.
 
책을 보지 말라고 하는데
 
위빠사나 수행은 대념처경(D22)에 근거한다. 또한 수많은 수행관련 경에 근거한다. 그러나 초기경전, 즉 니까야 자체가 수행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수행은 앉아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론과 실제가 있어야 한다. 이는 교학과 실천이다. 교학과 실천이 있어야 통찰이 있게 된다.
 
한국불교에서는 책을 보지 말라고 한다.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전도 보지 말라고 말한다. 이는 불교에 입문했을 때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들은 것이다. ‘이뭐꼬’ 수행을 지도하던 S선사가 말한 것이다.
 
책을 보지 않으면 진전이 없다. 이때 책은 경전과 논서를 말한다. 그럼에도 책을 보지 말라고 했다고 하여 경전이나 논서를 금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면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오늘날 경전을 통해서 알 수밖에 없다. 수행자가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한 논서를 가까이 하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이 앎과 관련하여 금한 것이 있다. 이는 율장에서  “수행승들이여, 세속철학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배우면 악작죄가 된다.” (VIN.II.139, 율장소품, 제5장 사소한 것의 다발, 32삼림)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또한 새겨야 한다. 그럼에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하여 책을 보지 말라고 한다고 하여 경전까지 금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부처님이 금한 것은 세속철학이다.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등과 같은 질문에 대한 것이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질문과 의문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익히고 기억하고 새겨야 한다. 매일매일 경전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논서를 보아야 한다. 통찰은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했을 때 이루어진다. 증득은 교학과 수행이라는 양날개로 성취된다.
 
지혜는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스승이 없다면 선지식이 남겨 놓은 저작물을 이용해서 아는 수밖에 없다. 마하시사야도의 저작물이 대표적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저술이나 법문을 보면 읽는 맛이 난다. 오래오래 새기고 싶어진다. 이렇게 글로 쓰지 않을 수 없다. 행선이나 좌선 중에도 떠 올라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그 중에 위빠사나 지혜에 대한 것이 있다.
 
어떤 것이든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일도 단계적으로 한다.
 
일감이 있을 때 일을 한다. 간단한 도면이라도 이삼일 걸린다. 사이즈가 큰 도면은 일주일 이상 걸린다. 오늘 이만큼 해 놓고 다음 날 또 이만큼 해 놓다 보면 어느덧 다 한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목표가 100이라면 99에 이르렀을 때 다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한다. 요즘은 차량을 이용해서 단번에 가지만 옛날에는 걸어 갔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M70)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
 
위빠사나 수행에도 단계가 있다.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볼 때 <본다>라고 관찰하면 눈과 형색은 물질이고 보는 것과 아는 것은 정신이라고 구별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들을 때 <듣는다; 들린다>라고 관찰하면 귀와 소리는 물질이고 듣는 것과 아는 것은 정신, 맡을 때 코와 냄새가 물질이고 맡는 것과 아는 것은 정신, 먹어서 알 때 혀와 맛은 물질이고 맛이 드러나는 것과 아는 것은 정신, 닿을 때 몸과 감촉은 물질이고 닿는 것과 아는 것은 정신이라고 각각 구별해서 알 수 있습니다. 감촉을 아는 것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온 몸 어디서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굽힘, 폄, 움직임, 감 등도 닿아서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팔과 다리를 굽힐 때 <굽힌다. 굽힌다>라고 관찰하면 굽히는 동작과 뻣뻣함과 움직임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정신, 갈 때도 <간다. 뻗는다>라고 관찰하면 뻣뻣함과 움직임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정신, 배가 부풀 때 <부푼다>라고 관찰하면 팽팽함과 움직임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정신, 배가 꺼질 때 <꺼진다>라고 관찰하면 홀쭉해짐과 움직임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정신이라고 각각 구 별해서 알 수 있습니다. 걷는 한 동작에도 다리를 들 때 가벼움이 불 요소, 앞으로 나아갈 때 뻣뻣함과 움직임이 바람 요소, 다리를 내릴 때 무거움이 물 요소, 다리를 디뎌서 바닥에 닿아 누를 때 지지함이 땅 요소, 이렇게 네 가지 요소로 구분돼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몸의 여러 동작, 물질의 여러 양상을 새길 때마다 계속해서 대상을 알지 못하는 몸과 물질이 따로, 아는 정신이 따로, 이렇게 구분돼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nāmarūpapariccheda ñāa)입니다.”(아리야와사법문, 224-225쪽)
 
 
참으로 명쾌한 법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에 대하여 나마루빠빠릿체다냐나(nāmarūpapariccheda ñāa), 즉 정신과 물질을 구별의 지혜라고 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은 열반이다.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한 것이 위빠사나 지혜이다. 논서에서는 16단계로 구분했다. 그런데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테라와다불교에 특징이 있다. 그것은 경전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또한 논서를 근거로 한다. 그리고 율장에 근거한다. 테라와다불교는 빠알리 삼장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스님의 글에 불교는 없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스님은 자신의 스승이야기만 한다. 스승이 마치 부처님처럼 보인다. 그 스님의 글에 부처님은 없고 스승만 있다. 그 스승의 불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스님은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만 말한다. 그 어디를 보아도 부처님 가르침은 없다. 자신이 부처님이고 자신의 말이 불교인 것 같다.
 
어느 스님은 차 이야기만 한다. 그 어디에도 부처님 가르침은 없다. 오로지 차만 마시는 것 같다. 차가 부처님이고 차 이야기가 경전인 것 같다.
 
테라와다에서는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한다. 경전에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도 경전에 근거한다. 대념처경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이는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
 
수행은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경전은 방향과 목적지를 알려 주는 지도와 같은 것이다. 이때 부처님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가이드와도 같다. 가이드로서 부처님은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무리에 있어서 우두머리와도 같다. 그래서 ‘신과 인간의 스승(Sattha devamanussanam: 天人師)’이라고 했을 것이다.
 
2단계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
 
위빠사나 지혜는 단계적으로 계발된다. 한단계가 완성되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먼저 계발되어야 2단계 지혜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2단계는 어떤 것일까?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렇게 정신과 물질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안 뒤 삼매와 지혜가 더 무르익으면 조건과 결과도 관찰하는 중에 분명하게 구별해서 알게 됩니다. 팔이나 다리를 굽히거나 펼 때 그전에는 굽히고 펴는 것을 관찰 하도록 매우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지혜가 무르익으면 굽히거나 펴기 전에 굽히려 하고 펴려 하는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을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을 <굽히려 함, 굽히려 함; 펴려 함, 펴려 함> 등으로 먼저 새겨야 합니다. 그 뒤 굽히고 펴는 동작들을 <굽힌다. 굽힌다; 편다. 편다>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굽힘과 폄 이라는 동작은 굽히려 하고 펴려 하는 마음이 있어서 생기는구나. 조건이 있어서 결과가 있구나. 굽히거나 펴도록 만드는 어떤 실체는 없구나. 굽히고 있고 펴고 있는 어떠한 존재도 없구나. 조건과 결과만 있구나’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 손가락을 조금 굽혔다 폈다 해보십시오. 굽히려는 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경험할 수 없습니까? 아직 새김과 삼매를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관찰하는 수행자라면 새김과 삼매를 이미 닦은 상태이기 때문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과 결과만 있는 것을 진실로 알 고 싶으면 끊임없이 관찰해서 닦아 보십시오. 정확하게 노력하면 2~3 일 안에, 혹은 4~6일 안에 조건과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본다>라고 새기면 ‘눈과 형색이 있어서 봄이 생기는구나’라고 압니다. <듣는다>라 고 새기면 ‘귀와 소리가 있어서 들음이 생기는구나’라고 압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새길 때마다 계속해서 ‘조건과 결과일 뿐이구나’라고 이해 합니다. 이것이 조건파악의 지혜(paccayapariggaha ñāa)입니다.” (아리야와사법문, 226-227쪽)
 
 
수 없이 본 내용이다. 위빠사나 관련 서적을 볼 때 마다 접했다. 그런데 늘 보아도 새롭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직 체득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지혜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을 보면 명확하다. 불분명한 것이 없다. 이는 한국선사들의 법문과 대조된다.
 
난해하기 때문에 심오해 보여
 
오늘 페이스북에서 어느 선사의 게송을 보았다. 이는 “마음의 법 있으면 병이 있고 마음의 법 없으면 병도 없네. 내 부촉한 마음의 법에는 마음의 법 있는 것 아니로세”라는 게송이다. 임제의현의 게송이라고 한다. 참으로 심오해 보인다.
 
심오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심오하기 때문에 심오한 것이다. 한번도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난해하기 때문에 심오해 보이는 것이다. 경전에서 한 줄이 빠져 있다면 뜻이 통하지 않아 해석이 어렵다. 해석이 어렵다 보니 난해해 보인다. 난해해 보이기 때문에 심오해 보이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스님은 똑 같은 말만 반복한다. 스님은 오로지 “없다, 없다,…”라고만 쓴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스님의 글을 보면 반야심경을 보는 것 같다. 대단히 심오해 보인다. 그러나 알 수 없다. 난해한 것이다. 난해해서 심오해 보인다. 여기에서 부처님 가르침은 찾아 볼 수 없다.
 
11단계 형성평온의 지혜까지
 
마하시사야도의 글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명쾌하다. 왜 그럴까? 경전과 논서를 근거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체험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빳짜야빠릭가하냐나(paccayapariggaha ñāa), 즉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도 그렇다.
 
위빠사나 수행은 단계가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이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다 읽지 말라고 말한다. 1권에서 그치라는 것이다. 2권에서는 16단계 지혜에 대한 설명인데 열반에 대한 것도 있다. 아마 미리 알면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 염려는 없을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무리 많이 알아도 지나치지 않다. 마치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과 같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가 어떤 것인지 아는 것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마하시사야도는 2단계 이후의 지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1) 새길 때마다 그렇게 처음 생겨나서 끝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 ‘항상하지 않은 무상(anicca)의 법일 뿐이다’라고 숙고합니다. 이것이 명상의 지혜(sammasana ñāņa)입니다. (위빠사나 3단계 지혜)
 
2) 새길 때마다 계속해서 새겨지는 물질-정신 대상들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구별해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ņa)입니다. (위빠사나 4단계 지혜)

3) 어떤 대상을 새겨도 대상이나, 그것을 새겨 아는 마음이나, 앞과 뒤로 계속 사라져 버리는 것만 경험합니다. 다리의 모습, 몸의 모습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 니다. 이것이 무너짐의 지혜(bhanga ñ
āņa)입니다. (위빠사나 5단계 지혜)
 
4) 무너짐의 지혜 단계에서 계속 사라지는 것만 경험해서 ‘두려운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두려움의 지혜(bhaya ñāņa)입니다. (위빠사나 6단계 지혜)
 
5) 두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허물을 봅니다. 그것이 허물의 지혜(ādīnava ñāna)입니다. (위빠사나 7단계 지혜)
 
6) 허물을 보기 때문에 더 이상 즐기지 못합니다. 염오합니다. 그것이 염오의 지혜(nibbidā nāņa)입니다. (위빠사나 8단계 지혜)
 
7) 염오하기 때문에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것이 벗어나려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ņa)입니다. (위빠사나 9단계 지혜)
 
8) 벗어나 고자 하기 때문에 벗어나려고 다시 특별히 관찰합니다. 그것이 재성찰 의 지혜(pațisańkhā ñāņa)입니다. (위빠사나 10단계 지혜)
 
9) 재성찰의 지혜로 다시 관찰하기 때문에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의 성품들을 확실히 알고 보게 돼 형성평온의 지혜(sańkhārupekkhā nāņa)에 도달합니다. (위빠사나 11단계 지혜)
 
 
위빠사나 11단계 지혜까지 소개 되어 있다. 이후 12단계 수순의 지혜(anuloma ñāna)에 들어가면 걷잡을 수 없다. 지혜가 이끄는 대로 간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뜀뛰기 비유’로 설명했다. 뜀뛰기까지가 11단계라면 이후는 자동으로, 저절로 열반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알아야
 
나는 어느 위치에 와 있을까? 나는 어느 단계의 지혜에 있을까? 늘 볼 때 마다 새로운 것으로 보아 아직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위빠사나수행을 접한지 16년 되었다. 한국명상원에서 2008년 12월에 접한 이래 16년 된 것이다. 그러나 진척이 없다. 아직까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나 마하시사야도의 논서를 보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 가장 많다.
 
자칭타칭 명상 지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튜브 등에서 그들의 영상을 본다. 마하시명상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모두 빗나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할 것이다. 하루일과에서 수행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글을 쓰고자 한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삼십분에 끝낼 수 있다. 그 대신에 자주 앉아 있으면 된다.
 
앉아 있을 준비는 되어 있다. 사무실을 반으로 잘라서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앉아 있을 수 있다. 점심 먹고 난 다음에도 앉아 있고자 한다. 더 나아가 저녁에도 앉아 있고자 한다.
 
명상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앉아 있는 다고 해서 다 수행이 아니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갈 때는 나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 (Gacchanto vā gacchamīti pajānāti)”(D22)라고 했다. 한걸음도 무심코 내딛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2024-07-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