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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권 경전암송 I, 한때 경을 밥 먹듯이 외웠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9. 12:05

136권 경전암송 I, 한때 경을 밥 먹듯이 외웠는데
 
 
백권당에 변화가 있다. 그것은 시계를 옮긴 것이다. 창측 벽면에 있는 것을 출입구측 벽면으로 옮겼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시계를 보기 위한 것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백권당에서는 큰 변화이다.
 

 
재가우안거 52일째이다. 이렇게 매일 안거일자를 카운트한다. 이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매일 밥 먹는 것과 똑같다. 수행도 생활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백권당에서 매일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재가우안거를 하고 있다. 이런 것도 인생에 있어서 큰 변화이다. 이전에는 이런 것을 생각도 못했다.
 
나는 수행자인가? 수행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수행이라 하여 깊은 산속에서 세상과 인연 끊고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른바 재가수행자가 되고자 한다.
 
재가수행자는 현실의 삶을 무시할 수 없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현실적인 삶을 떠날 수 없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듯이, 재가수행자는 생업을 하면서 수행하고 수행하면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현재의 자리에 내리 17년째 앉아 있다. 2007년 현재의 위치에 사무실을 임대하여 입주한 이래 68번째 계절을 맞고 있다. 이렇게 한자리에 오래 있는 것은 처음이다.
 
직장생활을 20년 했다. 1985년 7월부터 2005년 5월까지 강산이 두 번 바뀔 때까지 월급생활자로 산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무려 직장을 열한 군데 다녔다.
 
첫 직장에서 가장 오래 있었다. 수원 S전자단지에 있는 S사는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 있었던 것이다. 이후 직장생활은 ‘일이년이 멀다’하고 옮겼다. 그 가운데 가장 긴 것은 안양에 있는 T사로 1995년부터 1999년까지 4년간 있었다. 이때가 삼십대 후반기로 직장생활의 황금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직장생활 할 때 자신만만했다. 그것은 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십대 후반기 되었을 때 어긋나기 시작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 크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이 필요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중학교 때 불교학교에 배정 받았다. 중학교 일학년 때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절에 한번도 가본적 없는 청소년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처님의 탄생부터 배웠다. 사문유관에 대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강렬하다. 처음 접한 불교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마치 흰 옷감에 염색 되듯이, 열세 살 청소년에게 저항 없이 물들어갔다.
 
중학교 때 불교를 접한 것은 인생에 있어서 ‘인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십대 후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불교에 의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 배정 받아 다녔지만 기독교는 답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 불교를 접한 인연이 있어서 불교와 다시 결합하고자 했다. 삼십대 후반부터 불교를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이 나지 않았다. 직장생활은 늦게 끝나는 때가 많아서 저녁에 시간 내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디서 배워야 할지 몰랐다.
 
직장생활 할 때는 오로지 직장과 집만 왕래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보냈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하루 빨리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2004년 봄에 결단을 내렸다. 능인선원 야간불교교양대학을 찾아 간 것이다.
 
능인선원에 다닌 것은 시간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다녔던 직장에서 연구소가 분당 야탑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기업의 연구소가 분당에 있었는데 연구소장으로 있게 되어서 시간 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강남에 있는 능인선원에 다녔다.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일찍 퇴근하여 차를 몰고 간 것이다. 내가 제일 높았기 때문에 일찍 나가도 터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능인선원에서 사개월 동안 들었다. 처음에는 원장스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만 했다. 삼백명 가량 되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뒤에 앉아 들었다. 듣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마치 원맨쇼 하듯이 말하는 원장스님의 말이 재미 있었던 것이다.
 
실로 31년만에 불교를 다시 접했다. 능인선원에서도 부처님의 일생을 가르쳐 주었다. 중학교 때 이미 배운 것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뀐 후에 들어도 새로웠다.
 
능인선원에서는 온 사람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역별로 모임을 만들었다. 안양에서 온 사람들도 열 명 이상 되었다. 안양에서 안양사람들이 모였다. 차가 없는 사람들에게 카풀해서 데려다 주기도 했다.
 
절에 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불교를 공부하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알았다. 불교교양대학을 졸업하자 경전반이 시작되었다. 원장스님이 금강경을 일주일에 한번 강의했다.
 
2004년 가을 어느 날의 일이다. 금강경 강의 휴식시간에 어떤 이의 말을 들었다. 금강경을 외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솔깃했다. “나도 한번 외워 볼까?”라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금강경을 외우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인터넷에서도 금강경을 독송하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글도 보았다. 외우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다. 하루에 한분씩 외는 것이다.
 
금강경외우기 도전했다. 매일 하루에 한분씩 외우기로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경을 해야 했다.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옮겨 적었다. 지금도 그 원고를 가지고 있다.
 

 
금강경을 외울 때는 원고지를 보고 외웠다. 한자로 쓴 원고지이다. 마치 사진찍듯이 입체적으로 외우고자 했다.
 
하루에 한분씩 외웠다. 밤낮으로 외웠다. 새로운 분을 외울 때는 전날 외운 것을 확인하고 들어갔다. 전날 외운 것을 확인하면 전전날 외운 것도 확인하는 것이다.
 
금강경 20분을 외우고자 한다면 1분부터 19분까지 모두 외운 것을 확인한 다음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외우다 보면 32분을 외웠을 때 1분부터 32분까지 모두 다 외우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한달 보름에 걸쳐 다 외웠다. 2004년 11월의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기록해 놓지 않았다. 블로그에 글을 쓴 것은 2006년의 일이다. 블로그에 글쓰기를 하면서 2년 전에 있었던 것을 회상하며 느낌을 적어 놓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6분까지 외우면서 외우는 요령도 생기고 공덕도 쌓는다는 마음으로 나머지 32분까지 죽 밀고 나갔다.  그 결과 한달 보름에 걸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울 수 있었다. 즉 한달 보름 되는 날에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는데 1시간 30정도 걸렸는데 뿌듯하고 감격스러워서 마치 득도한 것처럼 또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만족감을 느낀 하루이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금강경 외우기, 능인선원과의 인연14, 2006.10.25)
 
 
금강경을 다 외우고 났을 때 득도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무려 5,249자에 달하는 경을 다 외운 것이다.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었는데 해낸 것이다.
 
금강경을 외우면 큰 공덕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금강경을 매일매일 독송하면 공덕을 쌓는 것이 된다고 했디. 어렵게 외웠으니 그 다음 부터는 잊어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암송했다. 일터에 갈 때도 암송하고, 산책할 때고 암송하고, 버스나 지하철 타고 갈 때도 암송했다. 직장에서도 암송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탈이 나는 것 같다. 직장에서 불교공부한다는 소문이 사장 귀에 들어 갔다. 다음 해 2005년 봄이 되자 직장을 나오게 되었다.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해서 쫓겨난 것이나 다름 없다. 어쩌면 직장에서 불교공부한 티를 낸 것이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직장생활은 2005년이 마지막이 되었다. 실업급여를 타먹으면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려 했지만 오라는 데는 없었다. 이후 2년 동안 방황했다.
 
직장생활 하면서 익힌 기술을 이용하여 국내 판매용 셋톱박스를 소량 만들어 보았다. 이를 위성안테나업자에게 납품했다. 그런데 제 때에 결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제조업을 혼자서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자본이 들지 않는 사업이 요청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직장 다닐 때 개발과정 가운데 하나인 ‘인쇄회로기판설계(PCB)’가 나에게 가장 맞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돈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인쇄회로기판설계용 캐드(CAD)툴만 있으면 일 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쇄회로기판설계로 먹고 살기로 했다. 캐드는 크랙버전을 구했다. 그러나 직장에서 배운 것은 양면설계가 고작이었다. 이 일로 먹고 살려면 4층 이상 다층설계기법을 익혀야 했다.
 
인쇄회로기판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월급 130만원 받고 일했다. 삼개월 있었다. 그때 배운 기법으로 지금까지 먹고 살고 있다.
 
현재 사무실에 2007년 11월에 입주했다. 지금까지 내리 17년째 같은 장소에 앉아 있다. 직장생활 20년 동안 11번 옮겼는데 인쇄회로기판설계업을 하면서부터는 17년동안 내리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2006년 이후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07년 현재의 오피스텔로 자리를 옮기면서 글쓰기는 가속화 되었다.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일을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엄청난 글이 축적 되었다. 18년동안 무려 7,800개 가량의 글을 쓴 것이다.
 
한장소에서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수행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경을 암송하는 것도 수행 가운데 하나로 본다. 2004년 금강경을 외운 이래 천수경, 반야심경, 법성게 등 수많은 대승경전을 외웠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을 만년필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경했다. 사경하면 사경공덕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대승불교만 있는 줄 알았다. 불교에 대하여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초기불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테라와다불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09년부터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부니까야를 갖추기 시작했다. 법구경과 수타니파타와 같은 쿳다까니까야 계열의 경전도 갖추었다.
 
초기불교를 알게 되자 쓸거리도 풍성하게 되었다. 초기불교는 신천지나 다름 없었다. 논서와 니까야를 읽으면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 같았다. 블로그에 담마에 대한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고 매일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매일 썼다. 그런데 어떤 이가 글만 쓰고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토를 달았다. 이에 수행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2009년 한국명상원에 일년 다닌 것이 전부였다.
 
삶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생업을 해야만 했다. 멀리 떨어져 수행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오로지 현재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경을 외우는 것이었다.
 
경외우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2004년에 금강경을 외웠기 때문에 맛을 본 것이다. 이런 경험을 살려서 빠알리 경외우기에 도전했다. 경을 외우는 것도 수행으로 본 것이다. 2011년 라따나경(Sn2.1)을 빠알리원문으로 외운 것이 시발점이다.
 
현재 백권당에는 126권의 책이 있다. 백권의 책이 있어서 백권당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불교작가 정찬주 선생이 이름 지어 준 것이다. 그런데 피디에프(pdf) 파일로는 135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136번째 책을 만들고자 한다. 책 제목을 ‘136 경전암송 I’이름 붙였다. 2011부터 2021년 9월까지 경외우기에 대한 기록이다. 목차는 30개이고 299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라따나경(寶石經)을 외우고
2. 번뇌탈출과 빠알리 게송 암송하기
3. 빠알리 독송용 초전법륜경
4. 초전법륜경을 외우고
5. 시대의 사명을 다한 반야심경
6. 빠알리법구경외우기에 도전하며
7. 경전외우기와 치매예방
8. “암기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왜 외워야 하는가?
9. 한문게송이 시시해 보일 때, 왜 빠알리 게송을 독송하는가?
10. 삼장법사 순다라빅쿠의 암송능력
11. 경을 외우고 암송하는 것도 바른집중
12. 머리맡에 두고 매일 한게송씩, 예경지송을 구입하고
13. 경송을 외울 때는 매우 비장한 각오로 
14. 외워야 힘이 생긴다
15.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의 분석의 길
16. 오늘은 빠알리 팔정도경 외우기 시동 거는 날
17. 신묘장구대다라니 외우듯이 빠알리 팔정도경 외우기
18. 새벽에 경전외우기를 하면
19. 경을 외울 때는 입체적으로
20. 누구도 가져 갈 수 없는 배움의 재물, 빠알리 팔정도경을 외우고
21. 암송하는 즐거움
22. 자타가 수호되는 암송(暗誦)의 행복
23. 시간이 철철 남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24. 법구경 찟따왁가(마음의 품) 외우기를 시작하며
25. 내가 경을 암송하는 이유
26. 게송외우기와 마음밭갈기
27. 진리의 말씀은 외워야
28. 왕도 없는 게송외우기
29. 나는 오늘도 외운다
30. 내가 오늘 경전 외운 맛은

136 경전암송 I_240801.pdf
2.70MB


 
라따나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이는 라따나경 음악을 좋아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다. 세계적인 불자가수 이미우이(Imee Ooi)가 부른 라따나경이 너무 좋아서 외워 보기로 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2000년대 중반은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직장을 잃고서 방황하던 시기였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것을 해보고자 했으나 무엇을 할지 몰랐다. 그때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아니 불교음악에 의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우이음악을 알게 된 것은 2007년의 일이다. 블로그에도 이미우이음악을 접한 이야기를 올려 놓았다. 수많은 주옥 같은 이미우이의 불교음악 중에서도 라따나경(寶石經, Sn2,1)과 자야망갈라가타(吉祥勝利偈)가 가장 좋았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17년 동안 라따나경과 자야망갈라가타를 아침 저녁으로 들었다. 내가 좋으면 남도 좋을 것 같았다. 이미우이 음악을 선곡해서 씨디로 만들었다. 대량으로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2008년 이후 지금까지 계속 해오고 있는 일이다.
 
암울한 시절 이미우이음악을 들으면 힘이 되었다. 특히 라따나경과 자야망갈가타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잔잔한 기쁨이 일어났다. “이런 음악의 가사를 외우면 어떨까?”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라따나경 음악은 빠알리원문으로 되어 있다. 라따나경은 보배경 또는 보석경이라고 번역되는데 수타니파타에 실려 있다.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천수경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경이다.
 
라따나경 외우기에 도전했다. 2004년 금강경 외울 때처럼 각개격파 식으로 외우기로 했다. 17개의 게송이 있는데 하루에 한 게송씩 외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어게송은 한문보다 외우기가 더 힘들었다. 한문은 어느 정도 뜻이 파악되었으나 빠알리어는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신묘장구대다라니 외우듯이 생짜배기로 외었다.
 
경을 외우고 나면 마치 큰 깨달음을 이룬 것 같다. 금강경을 다 외웠을 때 그랬다. 라따나경을 빠알리원문으로 다 외웠을 때 벅찬 감흥이 일어났다. 그때 느낌에 대하여 목차 1번에서 ‘라따나경(寶石經)을 외우고’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그리고 말미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한 번 외워 놓으면 평생간다. 이는 가수들이 자신의 히트곡을 평생 써 먹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경도 한 번 외워 놓으면 평생자신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평생재산이나 다름없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경전 외우기는 무형의 재산과 같다.” (라따나경(寶石經)을 외우고, 2011-06-08)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다. 한번 방법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쉬어진다. 라따나경을 외우고 나자 자신이 붙었다. 이후 자야망갈라가타, 멧따경, 망갈라경 등을 외웠다.
 
2013년에는 초전법륜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을 외우고’ (2013-07-09)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글의 말미에 “선정삼매 수행, 간화선 수행, 위빠사나 수행이 좋다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경전외우기만한 수행이 없다고 본다. 일단 외우고 나서 느끼는 그 희열은 경에서 말하는 선정삼매의 희열, 행복, 평온에 못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써 놓았다.
 
2011년 이후 수많은 경과 게송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경 외우기는 일상이 되었다. 매일 밥 먹듯이, 경을 밥 먹듯이 외웠다. 경 외우기는 나에게 있어서는 수행이었다. 인내력 테스트도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싸움이었다. 경을 외움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금강경을 외울 때 감흥을 잊을 수 없다. 특히 ‘대승정종분’을 외울 때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 중에서도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이득멸도자”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내가 모두 다 남김 없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무수히 많으며 끝없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느니라.”라고 말했다. 특히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느니라.”라는 말에 매료 되었다. 마지막까지 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각오가 마음에 든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사자후를 보면 ‘입보리행론’에서 ‘샨티 데바’가 말한 것이 떠오른다. 샨티 데바는 “이 세상이 남아있고 중생들이 남아 있는 한, 저도 계속남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몰아내게 하옵소서!”라고 말했다. 이 말은 아마도 금강경 대승정종분에 있는 부처님의 사자후를 차용해서 말한 것이라 보여진다.
 
대승불교에서는 한중생도 남김없이 제도하고자 서원한다. 지장보살의 서원도 이에 해당된다. 이 모두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이득멸도자”라는 말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전법륜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을 때도 감흥이 있었다. 특히 부처님이 깨달음 선포한 내용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세상에 선포했다. 특히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아라한송을 암송할 때 가슴이 벅찼다. 금강경에 있는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이득멸도자”라는 말 못지 않은 감흥이 일었다.
 
대승불교의 부처님과 초기불교의 부처님은 다르다. 금강경에서의 부처님은 한사람의 중생도 제도하지 못한다면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의 부처님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대승의 우월성을 말한다.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었다. 오늘 읽은 것 중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와 관련하여 알아야 할 진리 지혜 네 가지, 역할 지혜 네 가지, 완수 지혜 네 가지, 모두 열두 가지 양상이 있는 여실지견이 완전하게 청정하게 됐을 때라야 ‘제일 거룩한 정등각의 지혜를 얻었다. 깨달았다. 붓다의 지위에 이르렀다’라고 선언하셨다.”(435쪽)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여로 모로 금강경의 부처님과 비교된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깨달음을 선포했다. 이에 대하여 온 세상 전체에 당당하게 선언했다고 말한다. 사성제에서 어느 하나라도 하자가 있었다면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한중생도 건지지 못하는 한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커다란 사건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듦으로 인하여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만약 부처님이 열반에 들지 않고 모든 중생이 열반에 들 때까지 기다렸다면 사람들은 열반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열반은 큰 사건이다.
 
오랜 세월 불교와 함께 살아 왔다. 중학교 때 불교와 맺은 인연이 평생 가는 것 같다. 마치 오랜 세월 방황하다 제집 찾아간 것 같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불교에 입문했다. 그 과정에서 사경도 하고 암송도 하고 절도 했다. 지금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길 따라 가고 있다.
 
한때 경 외우기를 생활화 했다. 밥 먹듯이 경을 외우고 암송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느낀 것을 글로 남겼다. 세월이 흘러 이제 한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것도 하나의 삶의 결실일 것이다.
 
 
2024-09-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