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네
매일 깨달음의 연속이다. 작은 깨달음이다. 경전을 보고서 기억하고 사유한 것에서 일어나는 것도 깨달음이다. 오늘 행선과 좌선에서도 그랬다.
오늘 떨어진 모과 하나를 발견했다. 아파트 모과나무에서 떨어진 것이다. 모과가 익어서 떨어진 것이다. 정말로 가을이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도 가을이 익어 간다.
떨어진 모과 한과를 보았을 때 경전의 한구절이 생각났다. 수타니파타 ‘화살의 경’(Sn.3.8)에서 죽음에 대하여 “결국 익은 과일처럼 아침에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Stn.575)라고 했다. 죽음을 떨어진 과일로 비유한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커다란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끝장난다. 더 극적인 것은 과일의 떨어짐이다. 오늘 아침에 본 모과 한과가 그렇다. 그러나 모과가 떨어지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모과가 떨어진 장면을 보았다면 더 실감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부유하고,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고, 칭송이 있는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죽음의 두려움에 떤다.
죽음은 죽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주변에서 죽어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감 나지 않는다.
경전에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옹기의 비유도 그렇다. 이는 “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 듯, 사람의 목숨도 그러합니다.”(Stn.577)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옹기는 언젠가는 깨질 운명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는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것이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든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오늘 죽는다면 억울할 것 같다. 가장 좋은 것은 해야 할 일을 마치는 것이다. 여한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마치 잉여인간처럼 나머지 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내 뜻과는 무관하게 모두 다 변해 버려
화살의 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Yena yena hi maññanti, tato taṃ hoti aññathā)”(Stn.588)라는 말이다. 참으로 정말적인 말이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한다.
위 문장에 대하여 빠알리어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참으로 난해하다. 주석에서는 “ ‘오래 살길 바란다. 병이 없길 바란다.’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결국 죽게 마련이고 병들게 마련이다.”(PRJ.II.461)라고 설명해 놓았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이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여기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 몸이 정말 내것이라면 늙지도 말아야 하고 병들지도 말아야 하고 죽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마련이다. 이러하니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한번 빠알리구문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Yena yena hi maññanti’는 “정말로(hi) 어떻게(yena) 어떻게(yena) 생각할 것이다(maññanti)”라는 뜻이다. 여기서 ‘만냔띠(maññanti)’는 삼인칭단수‘maññati’에서 ‘nti’가 붙어서‘미래 복수 삼인칭 동사’가 된다. 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라고 해석된다.
사람들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아개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당장 자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남편이나 아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 뜻대로 하고자 한다.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한 대로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나 예나 히 만냔띠”라 하여, “그들은 이러저러 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간다. 그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tato taṃ hoti aññathā’라고 했는데, 이는 ‘저기로부터 저기로 다른 상태가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해석된다.
빠알리어 안냐타(aññathā)는 ‘añña+athā’로 보여진다. 안냐(añña)는 ‘other’의 뜻이다. 여기에 ‘athā’가 붙으면 ‘미래 이인칭 복수’가 된다. 그래서 “너희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다른 것으로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athā’가 붙은 것을 과거 이인칭 복수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너희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다른 것으로 있게 되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안냐타(aññathā)가 미래형이든 과거형이든 ‘내 뜻과는 무관하게 모두 다 다른 것으로 변해 버렸다’라는 뜻이 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라고 의역한 것 같다.
커피잔을 잡기 위해서 팔을 뻗었을 때
매일 아침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행선과 좌선으로만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행선과 좌선에서 새긴 것을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어떻게 새김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의도적으로도 시행해 보아야 한다. 커피잔을 잡을 때 생각해 볼 수 있다.
커피잔을 잡을 때 팔을 뻗친다. 이때 사람들은 내가 팔을 뻗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나라는 개념을 배제한다. 명색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팔을 뻗을 때는 내가 뻗는 것이 아니라 의도가 있어서 뻗는 것이다. 여기서 의도는 명색에 있어서 정신에 해당되는 것이다. 정신이 원인이 되어서 팔을 뻗는 결과가 있게 된다. 여기서 팔을 뻗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팔을 뻗는 행위로 인하여 두 가지 지혜를 알게 된다. 하나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고, 또 하나는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이다.
팔을 뻗기 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팔이 움직였다. 이런 의도는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의도라는 정신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의도한 것이라면 팔은 뻗기 전이나 뻗은 후나 같은 팔이 된다. 왜 그런가? 내 팔이기 때문이다.
팔을 뻗었을 때 뻗기 전의 팔과는 무관한 것이다. 단지 정신과 물질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움직임이 있음을 아는 앎이 있다. 여기서 움직임은 물질이고 앎은 정신이다.
명색은 항상 함께 한다. 명색은 항상 함께 생겨났다가 함께 소멸한다. 생겨난 것이 다음 단계로 전달되지 않는다. 다만 조건발생할 뿐이다.
커피잔을 잡기 위해서 팔을 뻗었다. 의도와 움직임과 아는 앎이 있다. 이는 정신과 물질과 정신임을 말한다. 이 모든 과정을 새겨야 한다. 의도를 새겨야 하고, 움직임을 새겨야 하고, 앎을 새겨야 한다. 이는 “대상에 밀착시켜 잊어버리지 않게 함”이다. 이것을 새김(sati)리고 한다.
마음이 충만 될 때
행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허전했던 마음, 공허했던 마음은 행선하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왜 그럴까? 마음을 주관찰대상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늘 감각대상에 가 있는다. 이런 마음은 다스려야 한다. 수행을 하면 마음은 제어된다.
행선할 때 발을 움직인다. 이는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를 말한다. 몰입하다 보면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가 있을 수 없다. 마음은 늘 현재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현재 상태에 있으면 마음은 편안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새김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명색을 새기고 있으면 마음은 들뜨지 않는다. 명색을 새기고 있다 보면 마음은 채워지는 것 같다.
서양에서는 명상에 대하여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고 말하기도 한다. 직역하면 ‘마음충만’이다. 이를 ‘마음채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행선이나 좌선을 해서 명색을 새기고 있다 보면 마음은 꽉 찬 것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공허할 때가 있다. 커피를 마셔봐도 공허하다. 이는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머리 속에만 있다. 마음이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면 행선이나 좌선을 해야 한다. 명상을 하고 나면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명색과정을 새겼기 때문이다. 명색과정을 새기면 더 이상 나라는 개념은 발 붙이지 못한다. 내가 사라졌기 때문에 근심, 걱정, 슬픔도 사라졌다.
존재론적 사고방식
일상에서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일상 따로 수행 따로’가 되면 공허한 마음 채움이 있는 마음이 번갈아 교대 된다. 항상 충만한 마음 상태가 되려면 일상에서도 명색을 새겨야 한다.
커피잔을 잡기 위해서 팔을 뻗을 때 내가 뻗은 것은 아니다. 의도가 있어서 팔을 뻗은 것이다. 커피잔을 잡은 것도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의 출처를 따진다면 ‘존재론’이 된다.
존재론은 ‘있다’와 ‘없다’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까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는 ‘절대유’와 ‘절대무’로 설명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또한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없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영혼’ 같은 것이다. 몸이 무너져도 영혼만은 죽지 않고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단멸론도 있을 수 없다.
커피잔을 잡기 위해서 팔을 뻗을 때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굽힌 팔이 뻗기 전에도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커피잔을 잡고 굽힐 때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굽히기 전에도 뻗은 팔이 움직여 온다고 생각할 것이다. 팔을 펼 때나 굽힐 때나 팔은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기적 관계속에서만 존재
커피잔 잡는 것 하나로도 일상에서 사띠할 수 있다. 커피잔 잡는 과정에 대하여 명색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내가 팔을 뻗어서 잡는 것이 아니라 명색이 팔을 뻗어서 잡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에서 명색으로 바뀌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팔을 뻗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존재론적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그 굽힌 팔이 아래로 내려간다’라거나, ‘내려 놓은 곳에서도 그대로 존재한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팔은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이 항상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른바 존재론이다.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항상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모두 관계와 관계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적 관계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팔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존재한다면 연기적 관계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커피잔을 잡기 위해 팔을 뻗을 때 이를 명색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명색이 조건이 되어서 명색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색과정은 생멸하는 것이다. 생겨난 것은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생성되는 즉시 소멸한다. 다만 이전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다음 명색이 발생할 뿐이다. 그래서 상속된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명색이 가는 것
오늘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모과 한과 떨어진 것을 보고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죽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Yena yena hi maññanti, tato taṃ hoti aññathā)”(Stn.588)라고 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생각대로 된다면 환상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된다면 나는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된다면 자식은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남편이나 아내도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한다. 대통령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내 뜻대로 되는 그런 나는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새김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걸을 때는 걷는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새겨야 한다. 여기서 ‘분명히 안다(pajanati)’라는 것은 명색을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한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명색이 가는 것이다.
2024-11-01
담마다사 이병욱
최상의 웰빙음식 만들기
제철에 나는 것은 최상의 식재료이다. 오늘 고구마순줄기무침을 만들어 보았다. 이번 한번만이 아니다. 전에도 만들어 보았다.
무침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유튜브를 보면 거기서 거기이다. 줄기를 끓는 물에 5분가량 데친다. 찬물에 행구어서 차게 만든다. 그리고 준비된 양념을 버무려서 만들면 된다.
고구마순줄기는 안양중앙시장에서 산 것이다. 정확하게 이천일아웃렛 노점에서 샀다. 시장 가는 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산 것이다. 한봉다리에 삼천원이다.
고구마순줄기는 사놓고 보니 양이 꽤 된다. 원래 된장국 끓여 먹으려고 산 것이다. 된장국보다 더 좋은 것은 무침이다. 잘 버무려 놓으면 최상의 웰빙음식이 된다.
제철에 나는 것은 모두 최상의 웰빙음식이다. 노점에서 파는 것은 방부제 처리 된 것은 없다. 노점에서는 제철에 나는 것만 팔기 때문에 최상의 웰빙식재료가 된다.
노점 상인의 손은 까맣다. 고구마순줄기를 계속 까다 보니 손에 물이 든 것이다. 마치 도인처럼 일없이 까는 것 같다. 내 돈주고 사서 먹는다고는 하지만 상인의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침은 손맛이라고 한다. 비닐장갑을 끼고 버무렸다. 양념은 생각해서 만든 것이다. 된장, 고추장, 고추가루, 다진마늘, 간장, 들기름, 식초, 올리고당, 설탕 등 집에 있는 양념을 총동원 했다. 그야말로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것이다.
잘 먹은 밥 한끼는 삶의 활력을 불어 넣는다. 무엇보다 제철에 나는 음식은 보약과도 같다. 남자라고 해서 못할 것이 없다. 해야 할 일이면 지금 해야 하고, 이왕 할 것이라면 잘 해야 한다. 오늘 저녁에는 고구마순줄기무침에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2024-10-31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69만원대 트렌치코트를 16만원대에 샀는데 (3) | 2024.11.03 |
---|---|
50년전통의 순대국을 먹어보니, 안양중앙시장 서울식당 (4) | 2024.11.01 |
사업보국(事業報國), 작문보국(作文報國) 수행보국(修行報國)의 삶을 위하여 (3) | 2024.10.31 |
모닝을 타고 다녀도 벤츠가 부럽지 않은 것은 (7) | 2024.10.20 |
20년동안 우정이 변치 않은 것은 (3) | 2024.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