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두 집 살림하기
잃어버린 키를 찾았다. 티스토리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집이 있어도 열쇠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요즘은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키 역할을 한다. 블로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티스토리에 글이 있다. 거의 일년 전에 키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키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고객센터에 문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은 매일 쓰는 것이다. 티스토리에는 들어갈 수 없다. 네이버에 있는 블로그가 생각났다.
네이버에도 블로그가 있다. 오래 되었다. 아마 이십년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버려진 것이었다.
네이버블로그는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때 당시 블로그를 처음 만들었을 때 다음과 네이버는 세력이 엇비슷했다. 처음에 다음에서 시작했으므로 다음 블로그를 사용했다.
다음블로그는 망했다. 삼사년전 블로그를 티스토리로 이전하라고 했다.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스토리에서 새로운 블로그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음에 저장된 것은 모두 다 가져왔다. 그러나 댓글은 가져오지 못했다.
집을 옮기면 환경이 달라진다. 다음에서 티스토리로 옮겼을 때 손해가 있었다. 2012년 이전의 글은 검색이 되지 않는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배우자의 선택은 일생을 좌우할 것이다. 블로그를 만들 때 네이버에서 시작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작년 11월 네이버에서 새로운 블로그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버려져 있어서 폐가나 다름없는 블로그를 새집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네이버에서 제2의 블로그 인생을’(2024-11-08)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네이버에 글 쓴지 일년이 다 되어 간다. 나의 성적은 어떠할까? 그것은 조회수로 나타난다. 통계를 보니 25년 8월 일일평균 조회수는 169회로 나타난다.

그래프를 보면 극적이다. 작년 10월 이전에는 조회수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아무도 찾지 않던 폐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새로 들어가 글을 쓰다 보니 처음 두세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제 블로그는 네이버가 종가가 되었다. 티스토리는 폐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티스토리에는 조회수가 꾸준하다. 이는 이미 팔천개 가까이 되는 글이 있기 때문이다.
집이 있어도 열쇠가 없다면 들어갈 수 없다. 티스토리 들어가보지 못한지 일년이 다 되었다. 이삼일전 혹시나 해서 시도를 해 보았다. 어느 시트에 남겨 놓은 아이디가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티스토리 키를 찾았다. 남겨진 아이디를 근거로 해서 본인인증 확인을 여러 차례 걸쳐서 블로그를 되찾은 것이다.
블로그는 주인이 없어도 자체적으로 잘 굴러 간 것 같다. 방문통계를 보니 일간 조회수는 4백명대이다. 그러나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키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6백명대였다.

티스토리의 ‘진흙속의연꽃’ 블로그의 현재 누적조회수는 889만명에 달한다. 2005년 블로그를 개설한 이래 20년동안 누적된 것이다. 언제 9백만명에 도달할까?
2005년 블로그를 개설한 이래 블로그와 함께 하는 삶이 되었다. 블로그는 나의 삶의 전부와도 같다.
매일매일 글을 쓰고 있다. 2006년 6월부터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편의 글을 쓰기로 했다.
글은 매일 아침에 쓴다. 하루일과 가운데 정신이 가장 맑을 때 쓰는 것이다. 요즘은 행선과 좌선이 끝난 다음에 글을 쓴다.
글은 솔직하게 쓴다. 거리낄 것이 없다. 눈치 볼 것도 없다.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쓰고 싶은 것을 아는 만큼 능력껏 쓴다.
글을 쓰다 보면 종종 오해받을 때도 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근거로 해서 쓰다 보니 대승불교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점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사람과 댓글 논쟁을 했다. 그 사람은 보살의 삶을 살겠다고 했다.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보살행을 하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다. 누구나 모두 보살의 삶을 살면 정법이 파괴될 수 있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 사람은 서운했던 것 같다. “보살행을 하는 것이 정법을 파괴한다구요?”라며 답글을 달았다.
보살행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정법이 살아 있는 정법시대임에도 정득각자와 같은 보살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하여 우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발끈하듯이 되묻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국불교에서는 오랜세월 대승불교의 교리가 지배해 왔다. 선불교의 전통도 강하다. 이러다 보니 불자들은 인사말이 “성불하세요.”가 되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부처가 된다고 하여 반드시 석가모니부처님, 즉 정득각자와 같은 부처님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설법한 후 모두 아라한이 되었을 때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Vin.I.14)라고 설명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출가한 사람들만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재가불자들도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는 야사와 그의 친구들 등 재가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율장대품에서는 “이렇게 해서 예순 한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Vin.I.14)라고 설명되어 있다.
아라한이 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타인에게 실험해 보았는데 모두 똑 같은 결과를 얻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달음의 보편성이다. 누구나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를 맛보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열반을 체험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리 못잡아도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했다. 니까야에 실려 있는 말이다.
부처가 되는 길이 있다. 이는 정법시대에 가능한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빠알리삼장이 있고, 팔정도수행이 있고, 열반의 증득이 있으면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정법시대에는 부처가 출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과 같은 정등각자가 되려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다.
누군가는 부처님과 같은 정득각자가 되려 할 것이다. 마치 수메다존자가 디빵까라부처님(연등불) 앞에서 수기를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수기를 받으려면 살아 있는 부처님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살아 있는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르침은 남아 있다.
한국불교는 만나는 사람마다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라며 인사한다. 참 좋은 말이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부처님이 없어서 수기를 받을 수 없다.
정등각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설령 살아 있는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무려 사아승지십만겁 한량없는 세월동안 보살행을 행해야 한다.
보살로 살기 위해서는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지옥에 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무리 지계하고 보시하는 삶을 살았어도 천상은 보장되지 않는다. 가능성은 있지만 확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한 범부로 살면 과거에 지은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행을 강조한다.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이 우주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건지겠다고 서원했다. 이는 아마 화엄경에서 영향받았을 것이다.
화엄경에는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하도록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열반에 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열반을 말했다. 열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은 진리를 제자들도 따라 깨달아 열반에 이르기를 바랬다. 그러나 후대사람들은 열반에 들기를 거부했다. 자신도 부처님과 같이 정등각자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정등각자가 되려면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사람이 축생이 되기도 하고, 천신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지옥에도 떨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보살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보살행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대승의 육바라밀보다 더 수승한 십바라밀은 행해야 한다.
부처가 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령 목숨을 건다고 해도 어느 세상에 태어날지 모른다.
보살의 삶을 서원하여 축생으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도 받지 않은 자가 보살행을 한다고 하여 보살로 살 때 축생으로 태어나면 인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 그런가?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뚫린 멍에를 바다에 던져 넣는다. 동풍이 불면 그것은 서쪽으로 떠내려가고, 서풍이 불면 그것은 동쪽으로 떠내려가고, 북풍이 불면 그것은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남풍이 불면 그것은 북쪽으로 떠내려간다. 그런데 그곳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를 던져 넣었는데 그때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가 있겠는가?”(M129)
한번 축생으로 떨어지면 인간의 지위를 회복하기 어렵다. 맹구우목의 비유를 보면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M12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한번 축생이 되면 다시는 인간으로 되기 힘들다. 이럴 경우 인간으로 살면서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서 다행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보살도를 말하는 사람들은 열반을 거부하고 정등각자가 되고자 한다.
보살도를 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있다. 자신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이 우주계, 이 허공계가 다하도록 한존재도 남김없이 구제한 후에 열반에 들겠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물에 빠진 자는 물에 빠진 자를 구제할 수 없다. 마치 보살도를 실천하는 자가 세세생생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 않다.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지 않는 자가 어떻게 중생을 구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수련시키지 않고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M8)
수렁에 빠진자가 수렁에 빠진자를 구할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중생구제할 자격이 없는 자는 중생을 구할 수 없음을 말한다.
누가 중생을 구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 자이다. 그래서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M8)라고 말했다.
정득각자가 되려면 열반을 유보해야 한다. 세세생생 보살로 살고자 한다면 열반에 들어서는 안된다. 이는 자타카에서도 확인된다. 수메다 존자는 디빵까라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기 전에 진흙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서원했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일체의 번뇌를 불사르고 참모임의 신참자로서 람마 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겉모습을 통해, 내가 번뇌를 불 사르고 열반을 성취할 필요는 없다. 디빵까라 부처님처럼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의 배를 띄워 많은 사람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한 뒤, 나중에 완전 한 열반에 들어야겠다. 이것이 나에게 알맞은 것이다.”(Jat.I.13-14)
수메다 존자는 열반에 들려면 들수도 있었다. 그러나 디빵까라부처님(연등불)처럼 정득각자가 되기로 서원했다. 열반을 유보한 것이다.
정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어서 마침내 사라져 버린다. 또다시 암흑의 세월이 된다. 이런 때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자가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보살행을 하여 마침내 부처가 된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이에 해당된다.
위빠사나지혜 16단계에서 11단계는 형성평온의 지혜이다. 범부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상의 지혜이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열반이 실현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열반을 실현하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이 되어 윤회가 끝난다는 것이다.
보살로 살아 가는 사람은 11단계 형성평온의 지혜에서 멈춘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보살로 살고자 한다. 수메다 존자도 아마 11단계 상카루뻭카냐나, 형성평온의 지혜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보살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형성평온의 지혜에는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음에도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정법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보살행을 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이런 사람에게 정법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서운했을 것이다. 그래서 발끈한 것인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된다. 이를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 정법이 살아 있을 때 수행해서 윤회를 끝내야 한다. 부처님이 좋아하고 부처님이 바라는 일일 것이다.
정법을 따른다고 하여 보살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타니파타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준다.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질투심이 있는, 소인이나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 섬긴다면, 이 세상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다.”(Stn.318)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자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Stn.319)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님에게서 그 의미를 경청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런 자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Stn.320)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 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님들을 태워서 건네줄 수 있는 것과 같이,”(Stn.321)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참사람은,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려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다.”(Stn.322)
현명한 자만이 중생구제를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중생구제를 할 수 없음을 말한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명한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열반을 체험한 사향사과의 성자가 이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이 중생구제를 할 수 있다.
보살행은 좋은 것이다. 세세생생 보살로 살면서 이 중생계가 다하도록, 이 허공계가 다하도록 남김없이 제도하겠다는 서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다.
살아 있는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지 못했다면 정등각자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설령 세세생생 보살로 살더라도 축생의 지위에 떨어지면 인간되기가 힘들다. 그럴 경우 평범한 자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에 이르러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 훨씬 더 빠를지 모른다.
그 사람은 나를 원망할지 모른다. 세세생생 보살로 살 것을 서원했는데 정법을 파괴한 것 같다고 했으니 발끈한 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읽어 보았다. 현재 번역된 것은 모두 다 읽어 보았다. 어디를 읽어 보아도 보살로 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에 들라고 했다.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라는 말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바라고 부처님이 좋아하실 일이다.
잃어버린 키를 찾았다. 이제 티스토리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두 집이 되었다. 두 집 살림해야 할까?
네이버블로그에 글 쓴지 거의 일년 되었다. 이제 자리가 잡혀 간다. 현재 누적조회수는 3만명이다. 하루 평균 60-70명이 찾고 하루평균 조회수는 180명가량 된다. 그러나 수천명이 찾던 예전의 다음블로그만 못하다.
티스토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이중으로 글을 올릴 수는 없다. 네이버블로그를 메인으로 하고 티스토리블로그는 저장창고로 활용하고자 한다. 한가지 공용은 책에 대한 것이다.
블로그에 글 쓰는 것이 낙이다. 2006년 이후 쓴 글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블로그에 보관해 놓았다. 팔천개가량 된다. 이런 글은 전자책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검색하면 걸린다. 십년전에 쓴 글이라도 볼 수 있다.
한번 써 놓은 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다. 이런 글은 생명과도 같다. 하루일과 가운데 오전이 녹아 있다. 이런 글을 보전하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글을 오랫동안 보전할 수 있을까? 블로그에 올려 놓으면 안심이다. 더 좋은 것은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제까지 쓴 글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분류하여 만든다. 현재 165권 만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만들 것이다.
책은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피디에프(pdf)파일을 올려 놓았다. 누구나 다운 받아 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책은 두 블로그에 있다. 네이버에서도 다운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았고, 티스토리에서도 다운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티스토리에 매일 글을 올리지 못하지만 책은 올린다.
한번 쓴 글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란다. 만든 책도 영원하길 바란다. 특히 165권의 책은 보관할 가치가 있다. 유에스비(USB)에 다운 받아 놓았다.
USB도 믿을 것이 못된다. 포맷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 아마 웹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네이버에 마이박스(My Box)가 있다. 회원으로 가입하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30G를 준다. 여기에 책을 올려 놓았다. 원본과 피디에프를 집파일로 변환하여 165개 올려 놓은 것이다.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
마이박스를 적극활용하고자 한다. 사진도 웹에 올려 놓으면 안심이다. 12월 씨엠립성지순례를 앞두고 용량을 확장했다. 월 1,900원 내면 80G까지 가능하다.
블로그는 생명과도 같다. 이는 블로그에 최상의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이런 블로그도 블로거가 사망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이박스에 올려져 있는 파일도 사라질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글을 쓰고자 한다. 이렇게 아침에, 오전에 글을 쓰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점심시간이다.
2006년 이후 매일 오전에 글을 썼다. 쓴 글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 두었다. 그 결과 블로그에는 글이 쌓이고 쌓였다. 책으로 만들어 놓으니 책장으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 같다.
글을 쓸 때는 온 힘을 기울인다. 마음이 가장 청정한 상태에서 글을 쓴다. 후대에 길이 남을 글을 쓰고자 한다. 그래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한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설한 ‘전도선언’에 따른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이렇게 쓰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렇게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집을 찾아서 기쁘다. 이제 키를 찾았으니 다시 들어갈 수 있다.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다.
2025-10-17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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