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필업(筆業), 또 다른 죄업(罪業)

담마다사 이병욱 2007. 10. 16. 06:37

 

필업(筆業), 또 다른 죄업(罪業)

 

 

인터넷시대에 익명성을 전제로 쓴 글도 낱낱이 저장되고

결국은 그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3업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즉 몸으로 짓는 업인 신업(身業), 말로 짓는 업인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업인 의업(意業)을 말한다. 혹자는 생각으로 짓는 것도 업이 되느냐고 말 할 사람이 있겠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 가면서 무수히 생멸하는 생각 즉 번뇌를 여위며 살아 가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럴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미 깨달은 경지에 올라 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쓰는 것도 하나의 낙(樂)이다

 

글을 자주 쓰다 보면 이것도 일종의 취미 비슷 하게 되어 가는 것 같다. 단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종의 좋은 취미라 여기고 싶다.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그 반응을 보는 것도 살아가는 하나의 낙(樂)이다.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또 좋은 반응을 받으면 뿌듯 하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표현한 글에 대하여 반드시 이의를 제기하고 심지어는 갖은 욕설이 붙은 댓글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댓글을 접하면 사람들의 다양성을 따지기 전에 기분이 몹시 상함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 댓글도 인신공격성일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모독감을 준다면 이미 그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댓글에 대한 폐해는 자주 매스콤에 거론된 바 있다. 심지어는 어떤 연예인은 댓글로 인하여 자살기도까지 하기도 하고 심약한 사람은 자살까지 했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을 전제로 한 인터넷공간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은 익명성을 전제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신의 아이디 즉 필명을 가지고 얼굴을 드러냄 없이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댓글을 통하여 욕설도 할 수 있고 억지주장뿐만 아니라 심지어 없는 사실도 꾸며서 오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익명성을 전제로 작성된 글은 그대로 기록에 남는 다는 특성이 있다. 남는 기록은 누군가 퍼 가서 다른 사이트로 옮길 수 있어서 인터넷의 바다를 둥둥 떠다닌다는 것이다. 만일 익명성을 전제로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인 기분으로 작성된 글도 언젠가는 인연이 되면 자신이 다시 볼 수 있고 자신과 인연이 있는 주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싸질로 놓은 글이 결국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에 대한 과보는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정도 되면 과히 새로운 업을 글로서 짓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지은 업은 아뢰야식에 낱낱이 저장된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불교식으로 말한 다면 지은 업(業)에 따라 그에 대한 보(報)를 받게끔 되어 있다고 한다. 즉 내가 한 행동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에 대한 결과를 되받는 다는 것이다. 그 업이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 것이든 말로 행한 것이든 생각으로 한 것이든 낱낱이 기록되는 것이다. 소위 제8식이라 불리우는 아뢰야식 즉 저장식에 하나도 빠짐 없이 저장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몸과 입으로 지은 업은 증거가 확실한데 마음으로 지은 업이 어떻게 저장 되는 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몸과 임으로 지은 업은 비디오나 녹음기를 이용 하여 실제로 저장 되어서 증거로 활용 하지만 마음으로 지은 업을 저장 했다는 기기는 아직까지 발명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때에 마음을 읽는 기계가 발명 될지 누가 아는가.

 

불교의 위대성 중의 하나가 바로 마음으로 짓는 업도 낱낱이 저장되어서 그에 대한 업보를 받는 다는 데 있다. 몸과 입으로 짓는 업은 바로 나타나기 때문에 숨길 수 없고 또한 기계장치를 이용하면 증거로 고스란히 남는다. 그러나 마음으로 짓는 업은 누군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옛 속담에 ‘열길 물속의 깊이는 알 수 있어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라는 말이 딱 맞는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익명성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음대로 상상 하고 마음대로 생각 하게 된다. 그것이 다 저장되어서 나중에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런점을 알려 주고 있다. 제8식 아룅야식에 낱낱이 저장된 업은 결국은 그 것이 씨앗이 되어서 그에 대한 과보로 작용하여 끝없이 윤회 하는 단초를 제공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해탈 하려면 이뢰야식을 정화 해야 한다고 하지 않은가.

 

인터넷시대에 새로운 업으로 등장한  필업(筆業)

 

인터넷시대가 되면서 누구나 새로운 아이디를 부여 받고 익명으로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자신의 이름 석자 걸어 놓고 당당 하게 걸림없이 쓰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대다수는 자신의 얼굴은 숨기고 마치 몰래 뒤져 먹는 들쥐처럼 비방과 욕설을 내 뱉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만일 이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낱낱이 저장 되어서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 다고 생각 한다면 그와 같이 쓸 수 있을까.

 

시대가 바뀌면서 과거의 종교적인 가르침도 하나씩 둘씩 추가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이를테면 계율에는 담배피우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다. 부처님 당시에는 담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지로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던 글쓰기가 인터넷이 일반화 되면서 익명성을 전제로 누구나 자유로이 글을 올리는 시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신구의 3업에 이어 필업이 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한다. 천수경에 보면 신구의 3업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나에 대한 참회게가 있다.

 

 

참회게[懺悔偈]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아득히 먼 옛날부터 내가 지은 모든 악업
 我昔所造諸惡業 皆有無始貪瞋癡  크고 작은 그것 모두 탐진치로 생기었고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몸과 입과 뜻을 따라 무명으로 지었기에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나는 지금 지심으로 참회하고 비옵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생사윤회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신구의3업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몸과 입과 생각을 조심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제4업인 필업도 마찬가지 가 아닐까.

 

 

200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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