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성제에 말하는 집성제-왜 ‘집착하지 마라’ 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7. 10. 24. 12:35

 

사성제에 말하는 집성제-집착하지 마라 인가

 

 

 

사전적 의미의 사성제

 

사성제(四聖諦)'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보았다

 

사성제(四聖諦); ()Catvāri-ārya-satyāni.

불교 교의의 핵심으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인도 베나레스(옛 이름은 바라나시) 근처의 녹야원에서 행한 최초의 설법 내용.

사성제의 첫째는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dukkha)이라는 고성제(苦聖諦)이다. 둘째는 그 괴로움에는 원인(samudaya)이 있다는 것으로, 즐거움을 탐하고 추구하는 갈애(渴愛), 살아남으려고 하는 갈애, 삶에서 떠나고자 하는 갈애 등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하는 집성제(集聖諦)이다. 셋째는 괴로움은 완전히 멸할 수 있으며 괴로움을 없앤 상태가 해탈이라고 하는 멸성제(滅聖諦)이다. 넷째는 괴로움을 멸하기 위한 8가지의 바른 수행방법, 8정도가 있다는 멸도성제(滅道聖諦)이다. 4가지 진리는 불교의 여러 교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괴로움의 원인은 12가지 상호의존적인 단계(十二緣起 paîcca-samuppāda)로 설명하는 경우도 많다. 무지[無明], 잠재적 형성력[], 식별작용[], 명칭과 형태[名色], 눈·귀·코·혀·몸·마음 등의 6가지 감각기관[六處], 접촉[], 느끼어 받아들이는 작용[], 갈애[], 집착[], 생존[], 태어나는 것[], 늙고 죽는 것[老死] 등의 그 12가지 요소는 무한하게 반복 순환한다. 이 순환과정을 끊는 사람은 윤회로부터 해탈하여 괴로움이 그치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부분이 집성제(集聖諦)이다. 사전에서는 갈애를 집성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무명,,...으로 이어 지는 12연기의 반복으로 고통을 받는 다고 말하고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 만 본다면 결국 줄거움을 추구 하는 삶에 대한 열망이 고통의 뿌리인 셈이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줄거움 즉 오욕락을 추구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의 뿌리인 것만은 확실하다.

 

사성제의 집성제집착하지 마라라는 의미로 해석

 

사람들은 고통을 멀리하고 즐거움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 본능이다. 그래서 재물을 모으려 하고 식욕과 성욕이 충족 되어야 만족 한다. 이런 기본적인 요건이 충족 되면 편하게 살고싶어 하는 수면욕과 이름을 날리 고져 하는 명예욕를 추구하는 수순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소위 성공 했다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정확히 일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욕락의 추구가 사람들에게 즐거움만을 주고 고통은 멀리 사라지게 한다고 단정 할 수 있을까.

 

오욕락의 추구는 갈애의 다른 표현이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나는 갈애 말이다. 갈애를 다른말로 표현 하면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돈과 사랑과 명예도 역시 집착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사성제의 집성제는 바로 집착에 관한 문제제기라 볼 수 있다. ()자 자체가 무언가 모은다는 뜻 아닌가. 집성제를 갈애니 12연기니 하며 어렵게 설명 하는 것보다 한마디로 표현 하라고 하면 집착하지 마라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들 포기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다 안되면 포기 하고 설득 하다 안되면 포기 한다고 한다. 그런데 포기한다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인격무시의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결코 좋은 표현이라 볼 수 없다. 이럴 때도 포기 한다 라는 말 대신에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쓰면 어떨까.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할말은 다 하는 훌륭한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티벳사자의서에서도 집착하지 마라고 한다

 

티벳사자의서는 죽은 다음에 일어날 행동지침에 관한 글이다. 누구도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그래서 두려워 하고 무서워 하는 것이다. 현실과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의 일은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벳사자의서는 죽은 다음에 어떻게 행동 해야 될 것인가를 상세히 날짜 별로 기록해 놓았다. 마치 죽음을 체험한 사람의 기록모양으로 말이다. 책에서는 사람이 죽어서도 살아 생전의 습관과 행동을 버리지 못 한다고 표현 되어 있다. 죽어서 보는 장면이 환영일지라도 그 장면에 집착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들이 교미 하는 장면이 좋아 보이면 그쪽으로 쏠리게 되는데 다음 생에서는 동물로 태어 난다 는 식이다. 그래서 티벳사자의서에서 하는 이야기는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죽어서 뿐만 아니라 살아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돈과 사랑과 명예 즉 오욕락 추구를  인생의 최대 목표로 한다. 그래서 기도 하고 빌기도 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도 한꺼풀 벗겨 보면 결국 오욕락을 만족시켜 달라고 기도 하고 비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종교도 버리라고 말 하지 않는다. 가능 하면 많이 달라고 기도 하기 때문이다.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인연이 없는 것으로 간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는 종교가 있다. 바로 불교이다. 즉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와 동일 한 것이다. 불교의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 된다고 말이다. 갈애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집착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를 말함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도 끝도 없는 갈망을 위하여 오늘도 몰입하며서 사는 것이 현대인이다. 아니 과거에서 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갈망을 끊어 버려야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있다고 2500년 전부터 주장 해 왔건만 아는 사람만 알고 대부분은 모르는채 인생을 마감 한다. 이것이 바로 무명 아닐까.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성제의 집성제는 집착하지마라라는 의미로 해석 된 것을 말이다. 지금 당장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조바심 낼 것도 없다. 뿌려 놓으면 언젠가 연이 맺어져 연결될 날이 있을 것이다. 집착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욕락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 그 오욕락으로 인하여 또 다른 고통의 시작 된다면 차라리 누리지 않는 것이 다음생을 위해서도 바람직 할 것이다. 단 어느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경우는 예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삶이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것도 알고 보면 본인의 업보라고 보아야한다. 누구 탓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탓을 한다면 불교의 진리를 모르고 살아온 죄가 가장 큰 것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무명이라는 것이다. 미혹과 무명은 같은 말이다. 몰라서 지은 죄가 더 크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무명도 대죄임에 틀림 없다.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아 있지만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미래가 걱정되고 두렵기도 하지만 그 때 가 보아야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다. 과거는 흘러 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언제나 현재만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인과 연이 만나면 다 이루어 지게 되어 있다. 해도 안되면 인연이 없는 것으로 간주 하면 그만이다.

 

 

200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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