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전생의 축적된 성향 때문에, 십이연기와 삼세양중인과를 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21. 08:05

 

전생의 '축적된 성향' 때문에, 십이연기와 '삼세양중인과'를 보며

 

 

 

빨리어로 된 십이연기 삼세양중인과 도표.   picture; search.daum.net/

 

 

 

 

불교에서는 갈애와 집착을 매우 경계한다. 십이연기법에서 갈애와 집착은 윤회 하는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을 버려야 될 것으로 가르쳐 왔고, 갈애와 집착을 버리면 윤회의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십이연기에 대한 자세한 강의를 불교tv에서 들을 수 있었다.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62)에 관한 법문이다. 이 프로는 인터넷으로   보았다. 인터넷의 장점은 자주 열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거나 모르고 지나친 내용도 다시 돌려 보면 된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십이연기를 쉬운 말로 표현 하면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에 관한 것이다. 이 법칙은 부처님이 최초로 발견한 법칙으로서 불교의  핵심사상중의 하나이다. 부처님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 사항은 후대의 주석서에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

 

불교는 '괴로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해서 말한다. 만일 '괴로움'에 대하여만 말하고 만다면 '염세주의' 내지는 '허무주의' 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명확하게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괴로움은 왜 일어 나는가.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갈애'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십이연기는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 놓고 있다. 또한 십이연기는 사성제를 구체적으로 또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누로마' '빠띠로마'

 

십이연기는 순관과 역관이 있다. 순관은 괴로움의 발생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것을 '유전문(流轉門)'이라 하고 빨리어로는 '아누로마(anuloma)'라 한다. 또 순관은 사성제의 고성제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십이연기의 역관은 괴로움의 소멸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환멸문(還滅門)'이라 하고 빨리어로는 '빠띠로마(patiloma)'라 한다. 이 역관은 사성제에서 멸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십이연기는 심오한 가르침

 

연기라는 말은 어떤 말일까. 빨리어로 연기는 '빠띠짜 사무빠다(paticca samuppada)'라 한다. 여기서 빠띠짜는 '()'을 말하고 우리말로 풀이 한다면 '조건지워짐'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사무빠다는 sam '~함께' 라는 뜻이고, up은 '위로'의 뜻이고, pad '간다(to go)'라는 어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종합해 보면 '조건지어져 발생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괴로움은 조건지워져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런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는 것이 십이연기를 아는 것이다.

 

십이연기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부처님께서도 십이연기는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말하였다. 제자 아난에게도 '십이연기는 심오한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는 장면이 '디가니까야' 14경에 나온다. 즉 십이연기는 평생을 두고 알아야 할 근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란 무엇일까

 

십이연기는 근본적으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삼세양중인과는 남방과 북방의 불교를 통틀어 보았을 때 확인 될 수 있는 사항이다. 그렇다면 삼세양중인과란 무엇일까. 우선 십이연기의 순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단계-무명(아윗자, avijja)

2 단계-(상카라, sankhara)

--------------------------여기까지가 과거생

3 단계-(윈냐나, vinnana)

4 단계-명색(나마루빠, nama-rupa)

5 단계-육입(사라야따나, salayatana)

6 단계-(파사, phassa)

7 단계-(웨다나, vedana)

8 단계-(따나, tanha)

9 단계-(우빠다나, upadana)

10 단계-(바와, bhava)

--------------------------여기까지가 현생

11 단계-(자띠, jati)

12 단계-노사(자라마라나, jara-marana)

--------------------------여기까지가 미래생

 

 

1단계와 2단계의 무명과 행은 과거생의 ''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3단계의 식에서 7단계의 수'까지가 현생에서 받게 되는 ''가 된다. 다음의' 8단계인 애에서 부터 10단계의 유'까지가 현생에서 발생 하는 ''이 된다. 마지막으로 '11단계와 12단계의 생노사'는 미래생에서 받게 될 ''가 된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 3세에 걸쳐서 두번의 ''  받게 되므로 삼세양중인과라 한다.

 

삼세양중인과 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여기에서 11단계를 주목해야 한다. 빨리어로 분명히 '자띠(jati)'로 표기 되어 있다. 보통 생을 한자로 표기 하였을 때 '태어남'인지 '일어남'인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빨리어로 엄격하게 구분 되어 있다. 즉 태아남은 '자띠(jati)'이고, 일어남은 '우다야(udaya)'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에서 분명히 자띠라고 표기 되어 있기 때문에 태어남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래서 11단계의 ''은 미래생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 즉 현생에서 미래생으로 한생이 바뀌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주목해야 될 단계는 3단계의 식이다. 여기에서 식은 한생에 있어서 '최초로 일어 나는 식()'이다. 즉 과거생으로 부터 현생이 시작 되는 단계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아비담마 주석서에 상세하게 설명 되어 있다. 따라서 1단계와 2단계는 전생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상식적으로 삼세양중인과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장스님이 쓴 북방불교의 '성유식론'에서는 '이세일중인과(二世一重因果)'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인과가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단계의 무명에서 10단계의 유까지가 현생의 인에 해당되고, 11단계와 12단계의 생노사가 미래의 과가 된다는 것이다. 이경우도 11단계의 생을 다음 생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현장 스님은 이세일중인과를 말하면서 삼세양중인과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11단계의 생이 일어남이 아니라 태어난 다는 것이다.

 

각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으로 십이연기의 각 단계에 대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단계-무명(아윗자, avijja)

 

십이연기의 출발은 무명에서 시작 된다. 무명은 사성제의 무지 때문에 기인한다. 즉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생사 윤회 하는 것이다. 중생이 되는 이유는 사성제를 철견 하지 못해서 그렇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철견 하여 깨달은 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가라앉고 순수하며, 청명하고, 순수직관적이고, 청정하고, 순일하며,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견고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나는 괴로움(죽음에 이르는 강, 번뇌 망상)의 소멸을 위한 관찰 쪽으로 마음을 챙겨 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을 보았다. 이것이 고()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이것이 고의 소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 이것이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내 마음은 관능적인 삶을 동경하는 망상에서 벗어났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풀려났으며, 무명에서 비롯된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리하여 이 같은 자유와 해탈 안에서 나는 명백히 깨달았다. 윤회는 이제 끝났다. 더 높은 삶이 성취되었다."

 

- 맛지마 니까야 중에서 -

 

 

"수많은 태어남, 그 윤회 속을 헤매어 왔네

집을 짓는 자(사대와 오온)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이다, 헤매이다 찾지 못하였네

거듭거듭 태어남은 괴로움이어라.(153)

 

! 집을 짓는 자여!

마침내 너를 찾아냈노라.

너는 이제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모든 서까래(번뇌)는 부서졌고

대들보(무명)은 산산조각 났도다.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갈애는 사라졌다네."(154)

 

- 법구경 중에서 -

 

 

 

맛지마니까야와 법구경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사성제를 통찰 하여 무명을 타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로서 나의 윤회는 끝났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생생 하게 묘사 되고 있다.

 

2 단계-(상카라, sankhara)

 

여기에서 행은 의도적인 행을 말한다. 즉 신구의 3업으로 비롯되는 업을 말한다.

 

3 단계-(비냐나, vinnana)

 

육식을 말한다. 한생에 있어서 최초의 마음이다.

 

4 단계-명색(나마루빠, nama-rupa)

 

명은 정신현상으러서 수상행식을 말한다. 보통 12연기에서 식은 제외 한다.

색은 물질을 말한다. 크게 '지수화풍'과 같은 근본물질과 '눈귀코혀몸'과 같은 파생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5 단계-육입(사라야따나, salayatana)

 

육내처를 말한다. 즉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말하고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이라고 한다.

 

6 단계-(팟, phassa)

 

감각적 접촉을 말한다. 즉 감각적 기능이 감각적 대상과 만남으로서 알음알이가 발생 하는 데 이를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 한다.

 

7 단계-(웨다나, vedana)

 

느낌을 말한다. 느낌은 정서적 토대라 볼 수 있다.

 

8 단계-(딴하, tanha)

 

갈애를 말한다. 이 것은 촉과 수를 조건으로 일어 난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끌어 들이는 욕망이 발생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밀쳐 내는 특성이 있다.

 

9 단계-(우빠다나, upadana)

 

취착이라고 말한다. 취착을 크게 4가지로 보면,

첫째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둘째가 사견에 대한 취착

셋째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

넷째가 자아가 있다는 취착을 말한다.

 

그렇다면 애와 취는 어떻게 다른가. 일반적으로 갈애가 더 강화 된 것이 취착이라고 볼 수 있다.

 

 

10 단계-(바와, bhava)

 

'업유''생유'로 구분 할 수 있다. 업유는 선하거나 악한 의도적인 행위를 함으로서 생긴 업으로서의 존재를 말하고, 생유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받는 과보로서의 새로운 생을 말한다.

 

11 단계-(자띠, jati)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의미 한다.

 

12 단계-노사(자라마라나, jara-marana)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말한다.

 

 

십이연기는 근본적으로 오온의 흐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전체가 오온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부분을 단계별로 설명 하고 있는 것이 12연기이다. 이것을 '분위 연기'라 한다. 이외에도 십이연기가 한꺼번에 다 일어 난다는 '찰라연기'가 있다. 그러나 생노사에 대하여 언어학적인 설명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 다른 십이연기중에 '연박연기'가 있다. 이 연기법은 한 찰나에 하나씩 일어나서 연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것 역시 생노사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있다. 다음으로 '원속연기'라는 것이 있다. 이연기법은 3세에 걸쳐서 멀리 떨어져서 일어 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연기설이 있지만 '분위연기'를 남북방 공히 정설로 간주 하고 있다.

 

'참나'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를 부정 하는 12연기

 

십이연기는 '무상 고 무아'를 극명하게 보아서 염오 하고 이욕함으서 열반을 실현 시켜 줄 수 있다.  또한 12연기는 무명이 '빛바래서 소멸'함을 말한다. 이를 빨리어로 '비라가 니로다(viraga-niroda)'라고 말한다. 십이연기를 말하는 것은 결국 무아를 드러내는 강력한 수단이다. 또한 십이연기는 '자아' '참나' 또는 '대아'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를 상정하고 그 것과 하나가 되려는 것은 착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십이연기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참나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십이연기는 '법계연기'와 같은 우주론적인 연기법으로 설명하는 것도 맞지 않다. 십이연기는 오로지 괴로움과 관계 되어 있고 그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생의 '축적된 성향'때문에

 

이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이연기법칙은 삼세양중인과이다. 이중 과거생에 해당 되는 무명과 행이 있다. 이 무명과 행으로 인하여 현재의 내가 태어 나게 되었다. 나의 의지 대로 태어 난 것이 아니라 과거생의 과보에 의하여 몸과 마음을 받게 된 것 이다.

 

이런 사실은 어찌 할 수 없는 과거생의 '축적된 성향'에 기인한다. 과거생에 있어서 평소의 생활태도나 습관등이 고스란히 과보로 전달 되었기 때문에 꼼짝 없이 받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 있어서 그 어떤 '신의 은총'이나 '불보살의 가피'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과거생에서 의도한 행위 즉, 업이 그대로 전달 되었기 때문에 부모 탓을 할 필요가 없다. 모두 다 자신이 지은 과보로 이 몸과 마음을 받게 된 것이다.

 

이미 이렇게 결정된 몸과 마음을 다시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십이연기와 삼세양중인과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즉 현생에서 새로운 과보를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촉수를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갈애와 집착을 차단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금생은 물론 미래생의 운명도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불교는 확실히 '희망의 메세지'를 주는 종교임에 틀림 없다.

 

 

 

2009-03-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