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108배 보다 도 알아차림이 더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24. 09:49

 

108배 보다 도 '알아차림'이 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남편도 내 뜻대로 돼야 하고, 자식도 내 뜻대로 돼야 하고, 돈도 내 뜻대로 잘 벌려야 하고, 어느 모임에서건 내 주장이 관철돼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어느 인터넷 신문의 '사는 이야기'에 난 기사 내용이다. 제목은 '4년째, 매일 아침 108배 하는 까닭'이다. 이 기사의 필자는 늘 마음속으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를 외치고 살았지만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화내고, 짜증내고, 상대를 원망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은 물론 자신의 인생도 무척 피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불교단체에 들어 가서 마음공부를 시작 하였고 지금은 매일 108배를 하면서 마음을 추스리고 있다고 하였다.

 

불자들의 신행방법 중의 하나가 108배이다. 거의 매일 법당에 나와서 하는 사람도 있고, 집에서 하는 사람도 있다. 20분정도 108배를 하고 나면 그렇게 가쁜 할 수 없고 '해 냈다'라고 하는 자신감도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을 한 없이 낮춤으로서 '참회'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사찰이나 어느 신행 단체든지 108배는 빠짐 없는 신행 수단이 되었다. 그런 108배 하는 마음이 지속 되면 좋으련만 끝까지 지속 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108배 할 때의 마음과 평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 술과 담배를 못 끊을까

 

술과 담배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피 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권해서 마시거나 호기심으로 피워 보지만 자꾸 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도저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저녁에 네온싸인이 밝혀지고 추적 추적 비라도 내리는 날이 되면 한잔 하고픈 욕구가 발동 하게 된다. 또 심각한 회의 중에 있거나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화기'가 머리 끝까지 올라 온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 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습관화 되어 버린 음주와 흡연은 그것이 나쁜 것인지 알면서도 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몸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술과 담배에 끄달려 다니다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그 마음은 무너져 버린다. 그 사이에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알콜중독자가 술을 끊기 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 하고, 담배중독자가 금연학교에 가서 폐가 망가지는 영상물을 보기도 하지만 그때 뿐이다. 그런데 단 한가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알콜중독자가 고백한 책을 읽어 보면 '알콜중독자 모임'에 참석 하고 난 후부터 효과가 있었다고 말한다. 일종의 심리극, 즉 사이코드라마를 함으로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 결정적 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일종의 '알아차림' 일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봄으로서 또 하나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시시 각각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무언가 변하지 않은 고정된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영원하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그 변하지 않은 영원한 마음을 내마음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그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다. 과거의 기억된 것을 꺼집어 낸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싶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도 과거의 마음에 기록된 기억을 불러 오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는 매우 쉽게 끊을 수 있다. 심리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가능하다. 어떻게 끊는가 바로 마음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된다.

 

마음은 일어 났다 사라지는 것

 

우리마음은 한마음이 아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다르다. 또 지금 이순간의 마음도 같은 마음이 아니다. 즉 내마음이 내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은 일어 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지면서 마음의 과보가 다음 마음으로 전달 된다. 이렇게 상속 되면서 마음은 흘러 가게 되어 있다. 이런 마음은 매우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마음을 '찰라생 찰라멸'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은 '무상(無常)' 한 것이다.

 

술을 마시고 싶거나 담배를 피우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일어 날 수 있다. 그러나 내버려 두면 슬며시 사라지고 그 대신에 다른 마음이 치고 들어 온다. 1분전의 마음이 지금의 내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1분전의 마음과 1분후의 마음이 같지 않아서 어느 것이 내마음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 한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순간은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 가지 않는다. 기분이 좋은 순간이 영원히 지속 되지 않고 금방 끊나 버리고 나면 허전하고 괴롭기 까지 하다. 여기에서 '()'를 본다. 괴로움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겁다고 느껴졌던 것도 알고 나면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술과 담배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 불교의 기본교리인 '무상 고 무아' 3법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슴의 콩닥거림을 보았을 때

 

불교를 믿는 다고 말하기 보다 '마음공부' 한다고들 한다. 108배를 하는 것도 일종의 마음공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을 집중을 하는 것과 대상을 알아 차리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 되야 하는데 내 뜻대로 안되었을 때 참회 하기 위하여 108배를 한다는 것은 마음을 진정 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불선(不善)'한 마음이 일어 났을 때 일시적으로 억압 하는 것이다. 이런 수행을 전문용어로 '사마타' 수행이라 한다.

 

그러나 불선한 마음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알아차림'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 데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화가 치민다. 그 때 그 마음을 보는 것이다. 콩닥 거리는 가슴에 마음을 갖다 놓으면 화가 사라질 수 있다. 왜냐 하면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콩닥거리는 가슴에 마음을 두고 그 콩닥거림을 보았을 때 그 순간 만큼 시간을 버는 것이다. 일종의 시간차 작전이다. 그 사이에 다른 마음이 치고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화가 치민 마음 대신에 다른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알아차림은 반드시 특정한 장소에서 할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서든지 알아 차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알아차리면 번뇌를 말려 버릴 수 있다. 이런 알아차림을 '위빠사나' 수행이라 한다.

 

'알아차림'인가

 

불자들이 즐겨 듣는 방송은 불교방송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프로를 들라면 저녁 7에 방송 하는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일 것이다. 이 프로에서 스님은 '알아차림'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말하고, 즐거웠을 때도 알아차리고, 무덤덤한 마음일 때도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108배를 하라거나 다라니기도를 열심히 하러거나 하지 않고 왜 알아차리라고 말할까. 아마도 그 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해서 일 것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고 보면 정목스님은 초기불교의 전법사처럼 느껴진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객관화 시켜 알아차리게 되면 왠만한 것은 다 해결 된다. 술이나 담배도 끊을 수 도 있고 자신의 뜻대로 안된다고 화내는 마음도 다스릴 수 있다. 알아차림이야 말로 사악도의 문을 닫고 열반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 알아차림의 핵심은 마음이다. 즉 마음은 항상 하지 않고 단지 '일어 났다 사라질 뿐'이라는 사실이다.

 

 

2009-03-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