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남방으로 가는 현대판 구법승 (求法僧)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18. 10:24

 

남방으로 가는 현대판 구법승(求法僧)

 

 

 

 

 

영험담과 가피 이야기

 

오랜만에 법우들 모임이 있었다. 보통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사가 대부분이지만 신행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면 '영험담'류가 주류이다.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하던 일이 잘 되었다"라든가, "사고를 당했는데 불보살의 가피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되었으니 다행으로 생각 한다"와 같은 내용이다. 다들 기도 열심히 하고 때에 따라 보시 하면 불자로서 역할을 다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항상 불보살의 가피에 대하여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기복적인 신앙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법우중의 한분에게 '마음 알아차림'에 대하여 이야기 하여 보았다. "마음은 일어 났다 곧 바로 사라진다"라고 간단 하게 이야기 하고 모든 분야에 적용 될 수 있음을 말하였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피고 싶은 순간만 넘기면 된다든지, 화가 났을 때 그 순간만 넘기면 다른 마음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피해 갈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하였더니 매우 공감하는 것이었다.

 

근본가르침과 180도 다른 말

 

흔히들 불자들은 마음공부 한다고들 한다. '불교를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마음공부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만치 마음은 불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 하고 커다란 관심거리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마음에 대하여 잘 모른다. 불교의 가장 기본교리인 '무상 고 무아' 3법인에 대하여도 정확하게 개념을 잘 아는 것 같지 않다. 심지어는 3법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 한 것 같다. 이렇게 된 요인은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문을 할 때 '무상 고 무아'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고 거꾸로 '나가 있다'거나 '즐거움'에 대하여 또는 '영원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는 180도 다른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대승경전의 영향의 탓이 가장 크고, 불교가 중국화 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중국불교를 받아 들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천태대사의 '교상판석'을 보면

 

'참나를 찾아서' 이런 말을 종종 보고 듣는다. 템플스테이 관련기사나 큰스님들의 법문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이다. 불교에서 '참나'는 무엇일까. 참나와 비슷한 개념은 본래면목, 진여, 자성, 대아, 불성과 같은 말도 있다. 이들 용어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변치 않는 영원불멸의 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참나를 주장 하는 것이 과연 불교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 되면서 당나라 시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때 왠만한 대승불교는 모두 다 수입 되어서 각 종파 마다 우열비교를 하게 된다. 이때 나온 유명한 비교가 천태대사의 '교상판석'이다. '아함경'은 지금의 교육체계로 따진다면 '초등학교' 수준에 해당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학교 수준이 '방등경', 고등학교 수준이 '반야경', 대학수준이 '법화경', 대학원 수준이 '화엄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열반경을 믿는 사람들은 화엄경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간주 하였다. 부처님이 3일낮 3일밤에 걸쳐서 최후로 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굳이 교육체계에 집어 넣자면 화엄경이 대학원의 석사과정 정도가 된다면, 열반경은 박사과정 정도가 될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의 열반경

 

이와 같이 가장 수승한 경전으로 치고 있는 열반경의 핵심사상을 보면 아함경과 비교 하였을 때 180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아함경이 무상 고 무아를 주장 하였다면 열반경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주장 하였다. 열반의 경지는 항상 하고, 즐거운 곳이고, 변치 않는 영원한 나가 있고, 그 어느 곳 보다 깨끗한 곳이라고 말한다. 열반은 설명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해서 '무기(無記)'로 표현한 '니까야'와는 대조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열반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고 부처님은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 한다. 즉 열반경의 핵심사상은 '불신상주' '실유불성' '상락아정'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항상 변치 않는 영원한 나와 같은 불성이 있다고 주장 한다. 대승불교의 대미를 장식하는 열반경의 경전에 영원히 변치 않는 나가 있다는 사상은 중국불교화한 '선불교'에서도 여전하다. 선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참나, 진여, 본래면목이라 한다. 불교tv의 큰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한결 같이 주장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참나, 불성, 진여, 본래면목과 같은 말은 초기경전에는 없는 말이다. 초기경전은 아함경도 있지만 최근에는 니까야를 더 알아 준다. 빨리어로 된 니까야는 부처님의 음성이 직접 담긴 경전으로 간주 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 빨리어로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멸후 아쇼카왕의 3차결집 때 완성된 원형을 2300년동안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불교에서는 왜 초기경전인 빨리삼장에 주목할까. 바로 그것은 지금의 한국불교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남방으로 떠나는 현대판 구법승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시대에 해외에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행기만 타면 하루 만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시대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초기불교와의 접촉은 역사의 필연이다. 더구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전세계의 모든 지식과 자료가 공개 되고 공유화 되기에 이르렀다. 불교 역시 과거 1600년동안 오로지 대승불교와 선불교만 있는 줄 알았으나 이제는 부처님 당시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부처님이 깨달은 수행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불교와 선불교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행체계에 한계를 느낀 수 많은 사람들이 직접 남방의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에 직접 가서 배워 오기에 이르렀다. 과거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 왔을 때 당나라에 불교를 배우러 떠 났던 구법승의 모습이 연상 되기도 한다.

 

너무나 멀리 나간 한국불교

 

그런데 당나라로 떠났던 구법승 들이 배워온 불교가 대승불교나 선불교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행방법이었다면 현대판 구법승들이 배워온 불교는 초기불교와 그와 관련된 수행방법이다.  당나라 당시에는 대승불교와 중국불교화한 선불교 밖에 없었다. 아함경과 같은 부처님의 육성이 담긴 경전이 있었지만 가장 소승경전이라 해서 무시하고 대승불교와 선불교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수행체계만이 최상승법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불교가 그 때 당시에는 최상승법이었지만 1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비판 받고 있다. 초기의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멀리 나갔다는 것이다.

 

'형해화(形骸化)'된 한국불교

 

그래서 1000년동안 모르고 지내 왔던 부처님의 원음과 수행을 다시 알게 된것은 전적으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크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승불교와 선불교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행체계의 문제일 것이다. 현재와 같은 이념으로는 종교시장화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살아 남기 힘들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 일 것 이다. 참나를 주장 하고 오로지 깨달음 하나를 위하여 심산유곡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불교는 거의 '형해화(形骸化)' 되었다. 살은 다 떨어져 나가고 뼈다귀만 남은 모습이다. 도시에서 보는 풍경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보이는 것은 십자가 천지이지만 어느 곳 하나 둘러 보아도 사찰은 보이지 않는다.

 

왜 심산유곡에 머물러 있을까

 

한국불교는 왜 도시에 나오기를 꺼려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없어서 일 것 이다. 참나와 같은 영원한 나가 있다고 생각 하는 '유신견(有身見)' 유일신 사상에서 볼수 있는 영혼불멸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유일신사상은 영원을 추구 한다. 그래서 변치 않는 영혼불멸을 믿고 있고 천국이나 지옥 또한 변하지 않는 영원한 곳이다. 만일 불교가 유일신교의 개념과 유사한 참나 진여 불성 본래면목 대아와 같은 영혼불멸의 사상을 주장한다면 유일신교와 경쟁해서 게임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이 도시로 나오지 못하고 심산유곡에서 언제 깨우칠지 모르는 도를 닦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분명하게 이야기 하였다. 나란 것은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라고 수도 없이 말하였다. '무상'하고 '무아'인가는 초기경전에 너무나 상세히 나와 있고, 특히 나가 여러 개로 이루어진 무더기에 지나지 않다는 '오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경전에 무려 6700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그만치 나가 없음을 강조 하였고 몸과 마음을 해체하여 관찰 한 것이다. 과연 참나와 무아의 두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부처님의 말씀에 더 가까울까. 교통과 통신이 발달 되지 않고 모든 정보가 공개 되지 않은 근세 이전이라면 참나와 같은 주장이 여전히 유효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종교백화점 같은 시장경쟁의 원리가 적용 되는 종교시장이다. 기존의 타종교와 확실히 차별화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아무리 부처님 법이 훌륭하고 교리가 완벽하더라라도 알려 지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다. 인식되지 않는 모든 것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처님 법대로, 부처님 당시로

 

한국불교는 이제 큰 전환점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산유곡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언제 깨달을지도 알 수 없는 화두를 붙잡고 있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 하는 세상에 맞추어서 불교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불교는 이제 너무나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더이상 흥미도 감동도 없는 '선문답'식 교리로는 설득이 되지 않는다. 한국불교가 살아 남으려면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기존의 종단에 패러다임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기득권과 관성이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로 되돌아가자'든가 '부처님 법대로' 라는 슬로건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왜 일부 스님들이나 재가불자들이 남방국가에 구름처럼 달려 가는지는 그들이 너무도 한국불교의 한계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앞으로의 한국불교는 이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심산유곡에서 선문답식 도를 닦는 것은 도시의 재가 불자들에게 감동도 주지 못할 뿐더러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를 배우고 수행방법을 병행 했을 때 불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의식 또한 고양 될 것이다.

 

 

2009-03-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