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국불교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三法印)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14. 15:38

 

한국불교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三法印)

 

 

 

 

 

 

세명의 선지식으로 부터 들은 초기불교

 

'각묵스님'의 동영상강의를 다 들었다. 불광사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은 10개인데 불과 1주일도 되지 않아 다 들은 것이다. 동영상 분량은 시간으로 따진다면 회당 2시간이 넘는다. 원래 2시간 강의 인데 대부분 초과 되어서 2시간 이상인 경우가 허다 하다. 이렇게 10회를 듣다 보니 몰랐던 사실을 엄청 나게 많이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알음알이로 알고 있었던 불교에 관한 지식이 정리 되었고, 초기불교의 대하여 매우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수확은 '한국불교에 문제가 있다'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인터넷으로 강의된 동영상이라서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은 삼가 하고 있었지만 종종 나온 이야기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의 법문은 하나 같이 열정적이다. 한국불교의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나라도 전해 주려고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의욕에서 일 것이다. 이러한 초기불교를 최초로 접한 곳은 불자모임에서이다. 1회 정기적으로 모임이 있는 날에 초청인사 형식으로 모셔 온 분이 미얀마에서 공부 하고 오신 '김진태교수'이다. 그 분의 강의는 1년동안 이루어졌다. 그래 보았자 총 12회에 지나지 않는다. 한달에 한번 법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영향력은 매우 컷다. 대승불교의 교리만 접하다가 초기불교의 교리와 남방수행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고 신선하였다. 특히 법문을 듣고 있다 보면 불자로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의식이 고양되었다. 이런 원동력이 어디서 나왔을까를 생각 해 보니 불교의 가장 근본 가르침인 '무상 고 무아'를 설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또 한분의 강사는 위빠사나 수행지도를 하고 있는 '묘원법사'이다. 이 분 역시 미얀마에서 7년간 수행하고 오신 분이다. 이분의 법문은 카페에 음성법문이 올라와 있는데 총20여회이다. 이 법문을 3주에 걸쳐서 다 들었다. 들으면 들을 수록 새롭고 계속 듣고 싶어서 듣다 보니 수개월에 걸쳐서 한 이야기를 단 몇 주 만에 책상에서 다 들은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터넷의 영향이고, 들으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 세분이 설한 법문은 모두 초기불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승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부처님당시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니까야' '아비담마'논설, 그리고 '연기법'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까지 천수경이나 금강경만 있는 줄 알았는데 소승이라고 비하 하던 남방불교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고스란히 전승 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더구나 수행방법에 있어서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위빠사나'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매력이었다. 사실 재가 불자들이 수행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라니독송'이나 '관음정근' '절수행' '사경수행' 또는 기도 정도이다. 참선과 같이 수승한 수행방법은 접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재가불자들에게도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일까

 

이런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느낀 점은 왜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무상 고 무아' 3법인에 대하여 인색 하느냐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 '보살행'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중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보시'에 관한 사항이다. 사찰을 운영 하고 유지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말일 것이다. 또한 대형불사를 앞에 두고 자금이 필요해서 하는 말일 수 있다. 그런데 꼭 교회의 이야기를 곁들여서 말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회의 '십일조'와 대비 하여 불자들의 보시의 행태에 대하여 비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다 지켜보고 있다'든가 '부처님은 다 알고 있다'라는 식의 말도 많이 한다. 아마도 금강경에 나와 있는 '여래실지실견(如來 悉知悉見)'이라는 말의 영향에서 일 것이다.

 

그런 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마치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지켜 보고 있다는 착각에 들 때가 있다. 부처님이 지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절대자가 지켜 보고 있는 착각이 든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유일신으로 슬쩍 바꿔 놓으면 교회에서 하는 말이나 하등의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불자로서 심한 열등감을 느낀다. 불교가 훌륭한 교리를 가지고 있고 그 어느 종교 보다도 가장 수승한 종교라고 알고 있는데 보시 문제에 있어서 유일신교 보다 못하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열등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유치원동화 같은 교리를 가진 유일신교는 어느모로 보나 불교와 철학적으로 보나 과학적으로 보나 게임이 안되는 종교로 알고 있는데 보시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이 든다는 것이다. 왜 스님들은 불교의 3법인에 대하여 이야기는 하지 않고 보시 이야기 아니면 부처님이나 보살을 마치 절대자와 같은 위치에 놓고 이야기를 하는 지에 대하여 초기불교을 공부 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스님들은 왜 '무상 고 무아'에 인색할까

 

초기불교에 대하여 법문 하는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이다. 법문을 해도 주어진 시간을 지키는 경우가 별로 없다. 늘 시간이 부족 해서 주어진 시간을 넘기기 일쑤이다. 그만치 알려 주고 싶은 사항이 많아서 일 것이다. 이제 까지 전혀 접해 보지 못하였던 부처님의 생생한 육성이 담긴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불교와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가 불교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큰 감명은 12연기법에 관해서이다. 천수경이나 금강경에 관하여 법문 하는 곳은 많아도 12연기법에 대하여 강의 하는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재가 불자들에게 있어서이다. 초기불교를 접하다 보면 12연기법 뿐만 아니라 '니까야'와 같은 경장, '아비담마'와 같은 논장도 접하게 된다. 이들 법문에서 나오는 공통적인 주제는 한결같이 '무상 고 무아'에 관한 사항이다.

 

그런데 '무상 고 무아' 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불교의 진수를 맛본 다는 것이다.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설법을 듣다 보면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과보'를 피할 수 없다.  이런 과보는 3세 제불도 해결 해 줄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지 '선법' '불선법'을 판단하여 불선법이라 생각되면 과감히 잘라 버리고, 선법이라 생각 되면 증장 시켜서 새로운 선업을 쌓아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지 기도 하거나 바란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피를 바란다는 것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신의 은총을 바란 다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동경하는 '영원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 일것이다. 부처님의 가피나 신의 은총 역시 영원에 대한 집착의 다른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모든 것이 '변함'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유위법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불교에서 유일신이 없고 절대자가 존재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제행무상'에 있다. 제행무상에 걸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열반이다. 열반은 무위법으로서 열반을 제외한 모든 것은 유위법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 영원불멸하는 신이나 아()가 있을 수 없다. 고정된 특별한 법이 업기 때문에 또한 제법무아이다. 여기서 제법은 제행과는 달리 유입법과 무위법 모두를 포함한다. 즉 열반도 제법무아의 범주안에 들어간다. 일체개고는 열반을 제외한 유위법이 그 대상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무상 고 무아'에 대하여 설하는 데 있어서 매우 인색한 한국불교는 두가지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무상 고 무아' 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기 때문에 불보살의 가피가 적용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든가, 아니면 초기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무지 하기 때문에 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불교의 교리 그 중에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불자로서 가장 큰 자부심을 느끼고 정신도 고양 될 뿐더러 불교야 말로 미래의 가장 강력한 정신세계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2009-03-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