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궁극적 행복 빠라마 수까와 닙바나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16. 21:50

 

궁극적 행복 '빠라마 수까'와 닙바나 

 

 

 

 

 

 

보시와 지계, 재가 불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이다. 보시를 하고 지계를 하면 천상에 태어 난 다고 하였다. 여기서 천상이란 '욕계 천상'일 것이다. 설령 천상에 태어 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으로 태어 났을 때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이라 하였다. 그만치 재가 불자에게 있어서 보시와 지계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나' '실라'

 

요즈음은 빨리어 용어가 유행이다. 초기불교가 알려지고 초기경전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짐에 따라 한자어 보다 빨리어의 용어로 말하는 것이 좀더 품위 있고 격조 높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같은 표현이라도 한자나 영어를 곁들여 쓰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빨리어 용어를 사용 하는 목적은 그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함 일 것이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빨리어는 영어와 그 어근이나 체계가 매우 유사하다. 어근 만 보아서도 대충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요즘에 초기불교 공부를 한 사람들이 강의나 법문 하는 것을 보면 빨리어 용어가 빠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한자 보다 어느 면에 있어서 의미전달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보시와 지계라는 말 역시 빨리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시는 빨리어로 '다나(dana)'이다. 영어의 '도너(donner)'를 연상 하면 아주 쉽다. 도너는 '준다'라는 뜻이다. 준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봉사라는 말과도 같다. 중국식 한자로 표기 할 때 보시라고 하지만 현대식으로 바꾸어 표현 하면 '봉사'라고 하는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지계 역시 빨리어가 있다. 지계를 빨리어로 '실라(sila)'라 한다. 실라 역시 현대식으로 용어로 바꾼다면 '도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다나와 실라가  중국으로 들어 와서 보시와 지계로 번역 되었지만, 현대식으로 재번역 된다면 '봉사 하는 삶' '도덕적인 삶'으로 바꿀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각묵스님은 재가불자들이 '현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을 누리려면 '봉사 하는 삶' '도덕적인 삶'과 더불어 전문적인 기술을 가질것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초기 경전에 나오는 말이고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궁극적 행복 '빠라마 수카'

 

현생에서 보시하고 지계 하는 삶을 살아 간다면 현생의 행복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행복은 없을까. 초기불교경전에는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빠라마 수카(parama-sukha)'라 한다. 또 다른 말로는 '우따마 만갈라(uthama-mangala)'라고 한다. '수카' '만갈라' 모두 행복을 나타내는 말이다. 만갈라 할때의 ''은 한자어의 '()'자와 같은 의미라 한다.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은 열반을 성취 함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열반은 빨리어로 '닙바나(nibbana)'이다. 경전에서 열반에 대한 설명은 없다. 따라서 설명할 수 없다라는 뜻에서 '무기(無記)'라 한다. 무기의 빨리어는 '아봐까따(avyakata)'이고 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못하는 의미이다. 즉 선과 불선으로 판단 할 수 없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열반은 설명될 수 없고 또한 판단 될 수 도 없는 심리 현상이기 때문에 무기라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닙바나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궁극적인 행복인 닙바나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크게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가 사성제를 통찰 하는 것이다.

둘째가 8정도의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셋째가 온--계를 통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해서이다.

넷째가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통해서이다.

 

닙바나를 얻기 위해서 이와 같은 4가지의 방법을 통해야 하는데 위의 4가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다른 측면에서 보았을 때이다. 즉 서로가 '서로를 맞 물고 있는 구조'이다. 예를 든다면, 사성제 중의 '고성제'는 우리몸이 '오온'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다. 이말은 고성제와 온--계의 ''과 관련 되어 있다. 또한 '성제' 8정도의 '정견(正見)'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정견에 대한 설명으로서 '사성제를 아는 것이 연기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즉 연기법의 '순관'은 사성제의 '집성제'에 해당 되고, '역관' '멸성제'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성제, 8정도, 온처계, 연기법은 서로 맞 물려 돌아 가고 있다. 이렇게 우리 몸을 해체 하여 보는 이유는 '무상 고 무아'를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갈애를 일으키지 말고 탐진치를 소멸하여 궁극적으로는 닙바나에 이르자는 것이다. 닙바나야말로 불자들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행복이자 궁극적인 목표라 볼 수 있다.

 

진정한 복전(福田)의 의미는

 

재가불자로서 지계 하고 보시 하는 것도 지키기 어려운데 닙바나에 이르는 길은 지난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 경전에 보면 재가 불자들도 수다원이 되고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이르렀다고 기록 되어 있다. 반드시 출가 해야 하고 출가 수행자만이 닙바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재가 수행자라도 얼마 든지 자신의 노력의 여하에 따라 닙바나를  체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얀마에서 집중 수행을 하면 빠르게는 2달만에 닙바나 체험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고 들었다.

 

닙바나 체험을 하게 되면 수다원이 된다. 수다원은 빨리어로 소따빠나(sotapana)라 한다. 소따빠나가 되면 성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복전(福田)' 된다. 복전의 의미는 3귀의 에서 말하는 거룩한 스님이다.  흔히 불자들이 3귀의를 낭송 할 때 세번째의 귀의처를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따졌을 때 모든 스님에게 귀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도과를 증득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복전에 귀의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초기 경전에 나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자의 반열에 올라선 수다원은 어떤 특성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 명확히 밝혀 놓고 있다. 보통 중생을 붙들어 매는 10가지 족쇄가 있는데 그 중에 다음의 3가지의 족쇄를 푼 사람들이 수다원이라는 것이다.

 

첫째가 유신견(有身見)을 극복한 경지이다.

둘째가 계율 의식에 대한 집착을 극복한 경지이다.

셋째가 법에 대한 회의심을 극복한 경지이다.

 

3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사항은 유신견을 극복한 경지이다. 참나 진여 불성 자성 본래면목과 같은 영원불멸의 자아가 있다면, 즉 유신견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소따빠나라 볼 수 없고 또한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열반을 체험 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해탈 할 수도 없다는 말과 같다.

 

한 사람의 성자가 출현함으로 인하여

 

출가든지 재가든지 불자라면 닙바나를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닙바나로 가기 위해서는 가장 첫째 단계인 수다원을 목표로 해야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수다원이 되면 7생 이내에 열반에 이르게 되어 더 이상 세상에 태어 나지 않을 것이다. 열반을 추구 하는 것이 중생 구제와 관련이 없는 소승이라고 폄하 할지 모르지만 그 열반으로 가는 과정 자체가 커다란 중생 구제라 볼 수 있다. 옆에만 있어도 향기 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주변은 향기로 넘쳐 날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성자가 출현 하면 그 향내는 온 세상을 진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9-03-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