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국불교,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9. 12:08

 

한국불교,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초등생의 종교를 조사해 보니

 

같은 지역에 사는 법우님이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 법우는 매우 신심이 좋아서 아이들에게 불교를 많이 소개 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체험 하게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종종 야외학습을 갈 경우가 있느데 가급적이면 전통사찰로 유도 한다고 한다. 전통사찰이야말로 우리문화의 보고이자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 법우가 종종 한숨 짖는다. 타종교에 비하여 불교를 종교로 하는 아이들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사를 해보면 종교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 중에 거의 반이상이 개신교이고 그 반의 반이상은 천주교이고 나머지는 불교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종교인구에서 차지 하는 불교의 비율은 20%가 되지 않는 것이다. 대다수 80% 이상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는 유일신교 종교라는 것이다. 5년마다 발표 하는 전국단위의 종교인구 비율과는 매우 동떨어진 결과이다. 그 학교가 수도권에 있고, 그 중에서도 소득수준이 높은지역이어서 인지는 모르나 이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불교는 소소종교임에 틀림 없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불교

 

왜 이렇게 되었을까.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위성도시와 신도시로 이루어져 있는 수도권에서 유독 불교가 맥을 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불교의 역사가 1700년 이라고 하지만 그 역사가 무색하게 불교는 수도권에서 외면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타종교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 또는 상대적으로 덜 배운 계층, 부자동네 보다 가난한 동네에서 있을 뿐이고 그 비율도 타종교에 비하여 현저 하게 떨어진다. 사실 수도권 뿐만 아니라 이런 현상은 영남을 제외 하고 전국적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젊은 사람들과 기득권층의 외면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불교가 크게 어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불교의 '낡은 이미지'가 가장 크다. 17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때 당시의 사회적 또는 정치적요청에 따른 그 시대에 맞는 가치관이었을지 모르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런 역할을 하기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 500년간 배척을 받아 산중불교로 명맥을 유지 해 오면서 민중의 생활과 단절된 면이 있다. 지금도 역시 산중불교로서 현실과 매우 괴리감 있게 비추어 지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불교의 모습이다. 더구나 현실 속으로 오지도 않고, 민중과 함께 하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어서 아이들이 불교를 외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

 

또 하나 외면 받는 이유는 불교의 기복성에 있다. 오로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만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정작 불교의 교주인 부처님은 뒷전에 처진 듯한 느낌이다. 관음전이나 지장전과 더불어 산신각 또한 불자들의 순례코스중의 하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산신이 과연 어떤 관계가 있길래 빠지지 않고 찾는 것일까. 여기에는 단순히 복을 비는 기복신앙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사찰에서 '무상' '' '무아'의 성스러운 부처님의 법은 찾아 볼 수 없고 기복만 넘쳐 나는 것이 현실이다.

 

불교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타종교나 비신자들이 생각 하는 불교의 이미지는 이와 같이 낡고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복이나 비는 기복불교로서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타종교인이 생각 하는 불교의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는 미신행위나 하고 돌덩어리에 절이나 하는 우상숭배의 종교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된 데는 한국불교의 종단과 스님들의 책임 또한 매우 크다. 타종교인들이 약진 할 때 그 동안 무엇을 하였길래 1700년의 불교 역사와 전통이 무색하게 소수종교로 전락하게 되었는가이다. 중생교화는 거의 포기 하다 시피 하고 심산유곡에서 도나 닦는 모습이 대승불교의 자세인가 하는 점이다. 중생구제라는 대승불교를 표방 하면서도 가장 소승적인 생활을 하는 곳이 승가가 아닌지 의문스럽다. 수도권의 모든 동네가 십자가로 뒤덮혀도 오로지 산속에서 도나 닦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의 현실이다. 그 결과 수도권에서의 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 한 것이다. 지금의 불교는 현실을 리드 하기는 커녕 따라 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대는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알아 차리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000년전의 선불교 전통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으나 과연 재가 불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수행방법중에 가장 수승 하다는 참선이 있다. 그러나 참선은 스님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참선 방법 또한 지극히 어려워서 스님들 또한 깨우치기 어렵다고 한다. 단지 재가 불자들은 열심히 관음정근이나 하고 지장보살이나 찾는 기복에서 조금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태로 몇십년간 오다 보니 뒤로 쳐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가 시대와 맞게 변해야 하는 데 문제는 스스로 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변화를 주문 하는 목소리를 내어 보지만 조금도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1000년전에 형성된 선불교가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글로벌시대에 그리고 모든 정보가 공유 되고 있는 지식정보화시대에 조금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비관적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법에 목말라 하지만

 

정보통신시대와 지식정보화시대에 맞게 한국불교도 변화 하면 좋으련만 1000년전통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산속에서 내려와 중생 교화를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 하지만 항상 바램으로 그친다. 거대한 종단은 이러한 중생들의 부처님법에 목말라하는 것에 대하여 도무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 대신에 보시에 대하여 이야기를 무척 많이 한다. 소에서 나는 우유의 비유를 들어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어서 한꺼번에 보시 하려 하지 말고 있을 때 마다 조금씩 보시하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보시공덕에 이야기 하지만 정작 중생교화는 뒷전이다. 마치 크게 깨닫고 나면 가르치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보시도 있을 때 마다 조금씩 하듯이, 중생 교화 역시 중생들과 함께 하면서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심산유곡에서 언제 깨칠지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가고 중생들은 기복신앙에만 매달리다 보니 불교가 뒤쳐진 것이다.

 

1000년간 형성된 전통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심산유곡에서 내려와 중생과 함께 하자고 해도 이미 고착화된 제도를 고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렇다면 바꾸라고 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아 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전통이 그렇게 내려 왔다면 그런 전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억지로 바꿀 수 없다. 선불교도 선불교 나름의 전통을 유지 해 가야 한다. 선불교가 현실에 마지 않는 다면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즉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기존의 제도와 시스템이 현실과 괴리 되었을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 한다. 역사적으로 유럽의 중세시대에 구교에서 신교가 나온 것도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이 변화하지 않자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기존 질서는 변화를 거부 하고 전통과 역사를 지키고자 한다. 기존 질서가 그 시대와 맞는 다면 다행이나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 하고 옛질서를 지키고져 한다면 시대와 맞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낡고 오래된 이미지로 굳어져서 외면 받게 된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 하지만 현실과 괴리 되어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새로운 패러다임은 없는 것일까. 그 대안은 지금 유행 하고 있는 남방불교 즉 '상좌부불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남방불교를 소승이라고 비하하지만 대승불교가 일어 났을 때 그 소승 하고는 전혀 다른 불교이다. 또한 '무상' '' '무아'의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가장 잘 보존 하고 있는 불교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는 수행의 불교 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복이 들어갈 틈이 없다. 기존의 대승불교의 기복적인 요소와 개신교와 천주교로 대표 되는 유일신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부분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유행 하는 불교는 이와 같은 남방 근본 불교이고 수행방법 또한 간화선과 같은 선정수행, 즉 사마타 수행과 전혀 다른 위빠사나이다. 이 위빠사나는 수행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수행법이다. 선불교에서의 화두 참구와 같은 간화선은 매우 어렵고 재가불자들이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이르게 한 위빠사나 수행법은 매우 단순 하면서도 따라 하기 쉽다. '알아차림'이라는 단순한 방법으로 시작하지만 이 수행을 통하여 집중과 지혜가 성숙하여 탐진치가 소멸하면 수행의 가장 높은 경지인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법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수행을 하다 보면 현실에서 마주 치는 괴로운일이 어느 덧 해결됨을 느낄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리라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지만 현실에서의 복잡한 삶에서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직장에서 상사와의 갈등, 집안에서 부부간 또는 고부간 또는 부모 자식간에 미워하고 긴장되고 다투는 상황에서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단지 관세음보살을 찾고 절하는 것은 그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대상을 겨냥해서 대상과 일체가 되는 사마타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기도는 사마타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있다라는 가정하에 어떤 관념적인 대상을 설정 하여 놓고 기도 하는 행위는 모두 사마타라는 것이다.

 

그런면에 있어서 유일신교의 기도와 대승불교에 있어서의 기도는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기도의 대상이 유일신교는 신이고, 대승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는 차이점 뿐이다. 대상을 향하여 기도 한다거나 기도의 대상을 절대자로 여기는 듯한 모습은 유일신교나 대승불교가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이 든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를 여러가지 들 수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불교의 힌두화를 들 수 있다.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에서 발전한 대승불교가 나중에는 힌두교와 큰 차이점을 발견 하지 못 하였을 때 힌두교에 먹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먹힌 가장 큰 이유는 '()'의 개념에 있다고 한다. 불교의 근본 교리는 '무아'를 주장 하는 데 대승불교는 '참나(진여)'를 주장한다. 그런데 참나는 힌두교의 아트만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무언가 영원불변하여 변치 않은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윤회를 해도 몸을 바꿀 뿐이지 영혼 그 자체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과 멀어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나의 개념에 관한 것일 것이다. 우라나라 불자들이 관세음보살을 찾고, 산신각을 찾고, 기도 하는 이유도 나가 있다는 유신견에 사로 잡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테라와다' '위빠사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3법인에 있다. 그런 3법인에 가장 충실한 가르침이 남방상좌부 불교인 테라와다라 볼 수 있다. 위빠사나와 함께 수행위주로 가르치는 테라와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매우 충실하기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에 따른 과보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신의 은총도,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자신이 의도한 행위에 대한 과보, 즉 업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테라와다의 매력이고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이나 상류층에서 바람이 불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왜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테라와다에 관심을 갖게 되고 위빠사나 수행열풍이 불고 있는 것일까. 바로 그 것은 지금의 대승불교가 의식있는 불자들의 욕구를 충족 시켜 주기 못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힌두화 되면서 망했듯이, 우리나라에서 역시 그런 전철을 밟을 경향이 농후 하다. 변치 않는 영혼불멸의 자아를 인정 하는 한 유일신교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불교와 유일신교는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이라 한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 즉 한마음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슬람의 알라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종교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하나로 통합 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만일 불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불자는 대승불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나를 찾자고 주장하다 결국은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에서 먹혔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에 힌두교의 전신인 브라만교의 아트만 사상의 모순을 지적 하고 무아사상을 역설 하였다. 그 결과 나온 불교의 근본이론이 무상 고 무아로 대표 되는 3법인이다. 3법인을 이야기 하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요즈음의 대승불교는 부처님당시의 가르침과 너무나 멀리 와 있고 더구나 기독교와 천주교로 대표 되는 유일신교와 직면해 있다. 이들 유일신교가 들어 오기 전까지 대승불교는 관세음보살을 찾든 지장보살을 찾든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관세음보살을 찾는 것이나 유일신교에서 그들의 신을 찾는 것이나 어느 면에서 보면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점이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시대에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유일신교에 밀릴 뿐만 아니라 지식인층, 상류층, 기득권층에서 외면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 하면 낡고 오래되어서 가치 없는 이미지, 또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종교로서 생각 하는 것이다.

 

21세기는 불교의 시대가 될 것

 

유일신교가 들어 오고 나서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유일신교의 교세가 매우 미미한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대승불교국가들과 같은 경우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우라나라는 상황이 다르다. 독선적인 교리와 배타적인 구원관을 가진 매우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종교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가 살아 남으려면 타종교 하는 것과 같이 따라해서는 되지 않는다. 과감히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 하면 된다. 부처님의 마지막 하신 말씀이 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그리고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에 의지 하라" 이다. 여기서 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부처님이 말한 가장 성스런 무상 고 무아의 3법이다. 분명히 무아를 이야기 한 것이다. 참나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유신견을 버려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무슨 말인가 '열심히 기도 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열심히 수행 하라'는 말이다. 그 수행은 무엇인가 대상에 집중하고 하나가 되는 사마타 수행이 아니라 대상을 분리하여 알아 차리라는 위빠사나이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과보에 기인 한다. 한국불교가 부처님 당시로 바뀌기를 바라지만 이미 오래전 부터 내려온 전통과 역사,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습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가게 되면 한국불교는 소수만 믿는 소수종교로 남게 되고 산중의 사찰은 관광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은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로은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희망을 발견 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얀마로 구름처럼 몰려 가서 부처님 당시의 법과 수행법을 가지고 온 것이다.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급속하게 보급 되고 있는 것 또한 매우 전망이 밝은 일이다. 특히 재가불자들의 노력이 돋 보인다.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재가 불자들이고 또한 수행방법 또한 매우 체계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무상 고 무아의 성스러운 3법인을 들었을 때 불자로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고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근본적인 진리를 접하면 의식은 매우 고양됨을 느낀다. 21세기에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불교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많은 석학들이 수십년전부터 예측해 왔다.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그 예측이 지금 실현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불교 열풍이 바로 그 것이다. 바로 그 불교는 기독교와 비슷한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와 전혀 180도 다른 수행의 불교이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보다 미천한 중생이 적어 보았다.

 

 

 

2009-03-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