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생멸의 지혜에 이르른 제자가 스승에게 이야기 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5. 10:35

 

생멸의 지혜에 이르른 제자가 스승에게 이야기 할 때

 

 

 

 

 

 

신심이 두터운 불자들은 열심히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새벽기도는 교회에서 더 열심이라 생각 된다. 동네 어디를 둘러 보아도 교회천지인데 어느 교회치고 새벽기도가 없는 곳이 없다. 아침에 일찍 출근 하려고 길을 나서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성경과 찬송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돌아 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기도 하면 교회가 기독교가 먼저 연상된다. 기도한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고 있고 실제로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밥 먹을 때도 기도 하고, 무언가 일이 잘 풀렸을 때 기도 하고, 또 잘 되지 않으면 기도 하고 해서 기도가 거의 생활화 된 듯 하다. 그런 반면에 불교에 있어서 기도는 특정한 날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듯 하다. 밥먹을 때 기도를 한다거나, 일이 잘 풀리거나 풀리지 않았을 때 기도 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실 기도는 기독교의 용어에 더 가깝다는 인상이 든다. 무언가 바란다는 데 있어서 기도 만큼 절실하게 요구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있어서 피조물이 무언가 바라고 달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응석도 부리듯이, 아양도 떨듯이 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을 다 들어 줄 것 같은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아이들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교에서는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 바란다는 것은 좀 어색하다. 그 대신에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발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마치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 절대자로 된 듯이 믿고 의지 하는 도가 지나쳐 단지 복을 바라기만 하는 기복으로 흘러 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대상만 다를 뿐이지 기독교의 기도와 하등의 다를 바 가 없다는 것이다. 지혜의 종교인 불교인이라면 단순히 복을 바라는 기도를 넘어서 최종 목표인 열반을 위하여 수행하는 자세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수행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다. 여러가지 수행방법이 있지만 재가불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묘장구대다라니108독 철야수행, 사경수행, 108배나 3000배등과 같이 대상에 대한 집중수행이다. 일종의 사마타수행이다. 이런 수행을 하고 나면 개뿐하기도 하지만 그 때 뿐이다. 해냈다고 하는 결과만 있을 뿐이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님들이 하는 참선수행을 하기는 쉽지 않다. 수행방법중에 가장 수승 하다는 참선수행은 마치 스님의 전유물처럼 느껴져서 감히 해보려고도 않는 것이 대부분의 불자들의 생각일 것이다. 참선은 매우 어렵고 접근 하기 힘들다는 의식 또한 자리 잡고 있어서 대싱을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볼 수 있다.

 

" 스님이 좀 가르쳐 주시면 안되나요?" 

 

불교에 입문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면 수행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마땅히 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보니 책을 보거나 글을 읽는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참선수행법은 '간화선(看話禪)'이다. 화두를 이용하여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이라고 사전에는 나와 있다. 자신의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일사분란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을 말하며, 결국은 인간의 실존과 만나는 일이라고도 쓰여 있다. 이에 대한 실천 방법으로서 1700가지 공안이 있고 '이뭣고' 하면서 의심을 하라고 한다. 이뭣고 화두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 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글로만 본다면 간화선과 이뭣고 화두는 불자들이 이해 하기 매우 어렵고 난해해서 뭐가 무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거기에 참나로 돌아 오는 것이라고 했는데 불교의 3법인의 무아사상과는 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렇게 어렵고 좀 처럼 이해가 어려워서 인터넷에 있는 동영상 강의를 들어 보기로 하였다. 키워드를 '간화선'으로 하고 동영상을 선택하면 어느 스님의 간화선강의를 시리즈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보았지만 명쾌하게 알 수 없고 좀처럼 가닥이 잡히지 않기는 마찬가지이었다. 그 동영상강의 중의 어느 노보살의 질문이 있었다. 수행중에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좋은 경험하다 들킨것이다"라고 말하고 잘 되었을 때를 그리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머리가 왜 아픈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이 이것 저것 이야기 하자 그 보살님은 애원조로 " 스님이 좀 가르쳐 주시면 안되나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스님은 '도고마성'이라는 문자와 함께 유위법에 떨어졌다고 말하고, 잘 됐구나 할 때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 한다. 그리고 화두를 바로 배워야 화마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땀 뻘뻘 흘리면서 산에 한번 갔다 오면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충분한 답이 되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또 다른 질문에서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 라고 말하자 '공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헛발디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는 임플란트 하듯이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입승'과 같이 노끈을 세우는 방법을 아는 것이 공부라고 말한다. 인터넷동영상 강의로만 간화선을 이해 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렇다고 책이나 자료를 보아도 손에 잡힐 듯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알듯 모를듯 도무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대중화 되기는 어렵다 느낌이다.

 

그냥 알아차리면 되는 위빠사나

 

이렇게 한 없이 어렵게만 느껴지고 수승한 스님들이나 하는 간화선을 재가 수행자가 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음을 예전 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기화가 되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되었다. 비록 과정중에 있지만 원리가 매우 간단 하고 방법 또한 매우 간단 하다.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다. 앞서의 노보살이 머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그 아픈 것이 '좋은 경험 하다 들킨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수행중에는 고통이나 쑤심, 경련, 나른함, 혐오, 메스꺼움등의 온갖 대상을 경험 하게 된다. 심지어는 무서운 표상을 보게도 된다. 이 때 수행자는 여러가지 대상중에 가장 분명한 것을 알아 차리면 된다. 머리가 아프다면 그 자극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러면 머리의 아픔을 대상으로 하여 '아픔, 아픔'하고 알아 차리면 된다. 즉 육체적인 아픔과 정신적인 아픔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보면 육체적인 아픔만 있을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아프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아픔은 여러가지 형태로 바뀌면서 지속 되지 않고 나타 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이것이 '현상을 바르게 보는 지혜'이다.  아픔도 이와 같이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상(無常)'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상을 알면 '()' '무아'는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머리가 아프다고 산에나 한번 같다 와라 라고 말하는 것 보다 훨씬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고통이 일어 나고 사라짐을 봄 으로서 불교의 가장 기본교리인 무상 고 무아를 체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시던 가르침이 아닐까.

 

낮은 단계의 지혜에 대하여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라고 노보살이 말했을 때도 '공에 떨어졌다거나 발을 헛디뎠다'라고 말하기 보다 수행이 진척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위빠사나에서 낮은 단계의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그리고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발이 땅바닥에 닿았을 때 '닿음' ''이라는 관념이 닿는 것이 아니라, '닿음' 그자체의 물질적 현상이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나는 알아차림은 의식이 있는 마음으로 정신적인 현상이다. 단지 닿음이 자신의 발이 닿고 자신이 알아 차리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과 정신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이다.

 

그 다음으로 발이 닿음이 먼저 일어나고 이어서 그 것을 알아 차리는 의식이 일어 났을 때 이것을 아는 지혜를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라 말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현상을 바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위빠사나에 중요한 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 분명하지 않은 것, 마음에 일어 나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관념같은 것은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 두통과 같이 뚜렷한 가장 자극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 마음으로 일어난 대상 중에는 무서운 것 도 있을 수 있다. 무시무시한 감각대상이나 끔찍한 표상 같은 것이다. 이때 이런 현상을 보면 ', ' 하고 알아차리거나 느낌이 더 강해지면 '무서움, 무서움' 하고 알아 차리면 된다. 이와 같이 현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성숙 되면 기도 중에 본 표상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좀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보면

 

이와 같은 낮은 단계의 지혜를 거쳐 좀 더 높은 단계의 '생멸의 지혜' '소멸의 지혜'의 단계로 접어 들게 된다.

 

'생멸의 지혜'는 성품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예를 들어 통증이 있을 때 '아픔'이라고 알아 차리자 마자 통증은 사라진다. 즉 일아남과 사라짐이 같이 하므로 통증에 대하여 생각할 겨를이 없다. 통증이 알아차림으로 제압되는 것이다! 이는 통증을 아는 마음이 느낌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 아픔'하고 알아 차릴때 통증을 알아 차리는 마음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증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통증을 아는 의식도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이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이 세단계야 말로 '생멸의 지혜'라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무상을 말한다. 이와 같은 무상을 통하여 법의 성품인 고와 무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높은 단계의 지혜 중에 '소멸의 지혜'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사라짐'만 분별하게 나타난다. 즉 마음의 대상만 즉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알아차려서 아는 마음 또한 즉시 사라진다. 이와 같이 대상과 마음 즉 몸과 마음이 모두 사라지면 모두 존재 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정신적인 요소도 영원하지 않고, 물질적인 요소도 영원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무상이라 한다. 이 때 정지 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수행자는 심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이것이 ''이다. 이렇게 보는 즉시 사라지고 심한 고통을 느낄 때 통제할 수 없음을 느낀다. 이것이 무아이다. 소멸의 지혜의 단계에서 수행자가 사라짐을 발견 할때 무상, , 무아의 '삼법인'을 저절로 느낀다. 먼저 말한 노보살의 몸이 사라지는 단계가 이 '소멸의 단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에 떨어졌다거나 발을 헛디뎠다'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위빠사나의 관점으로 본 다면 두통이라든가 몸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하여 더 잘 설명 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위빠사나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는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이라는 책을 참고 하였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장면은

 

간화선에 대하여 아는 바는 별로 없다. 기회가 된다면 배워 보려고 하지만 무척 어렵게만 느껴진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개념이 없어서 일 것이다. 또 한가지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나' '진아(眞我)'에 대한 문제이다. 불교의 3법인에는 엄연히 제법무아라 하여 나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참나를 찾자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 여겨 진다. 참나를 찾다 보니 간화선이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무상을 이해 하면 고 와 무아는 자동으로 따라 올 텐데 선불교나 스님들의 법문에는 무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별로 들어 보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불성, 진여, 본래면목, 진아와 같은 ''가 있다는 가정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흔히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한다. 지혜라고 말하였을 때 그 지혜는 반야를 말하는데 단지 절하고 사경하고 다라니나 독송 해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혜를 개발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통수행법인 간화선은 너무 어렵고 난해 하다. 거기에다 '참나'라고 하는 3법인과 맞지 않은 점도 있어서 접근 한다고 하더라도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될 듯 하다. 결국 노보살의 질문대로 머리가 아프다든가 몸이 사라졌다 했을 때의 적절한 답변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3법인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불교는 3법인에 충실해야만 불교 다워지고 지혜가 개발된다고 생각 된다. 지혜가 개발 되면 자비로워지는 것은 부수적으로 따라 올 것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대신에 자애 관용 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애 관용 지혜에 관한 인상적인 문구를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이라는 책에서 발견 하였다.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른 제자가 스승에게 이야기 할 때 스승은 수행자를 보기만 해도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제자의 얼굴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제자가 스승을 향하여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 하고 또한 스승에게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는 것이다. 보기만 해도 그림과 같은 멋진 장면이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2009-03-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