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한 세상에, 아비담마로 본 재생연결식과 생산업 그리고 짜리따(carita, 기질)
세상은 참 불공평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결과를 보면 시원치 않을 때가 있다. 또한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 하고 돈벼락을 맞아 여유있게 사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신의 뜻’일까 아니면 우연의 산물일까. 불교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 모든 것이 업(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축적된 성향 ‘짜리따(carita)’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신동이나 천재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것은 이미 전생에 그들의 특출한 능력의 기반을 닦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심신이 건전한 부모와 조상을 둔 아이가 태어 났는데 그 형태나 심리적인 태도나 행동양식이 인상학자나 심리학자가 말하는 범죄형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런 타고난 특성과 성향이 과연 우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성향이나 기질 또한 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한 행동인 업의 주인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난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하다.
그들이 짓는 업이 선업이든지 악업이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맞지마 니까야 135경)
전생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업이 악하고 저속하면 그 자신의 잠재의식의 흐름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업의 과보가 금생에 익게 되면 반드시 불만스럽고 나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생에 좋은 업의 종자를 뿌렸다면 금생에 좋은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이른바 ‘선인선과 악인악과’이다. 이런 과보가 익은 결과가 몸과 마음으로 또 축적된 성향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질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냐나틸로까 대장로의 ‘업과 재생’이라는 글과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참고 하여 알아 보았다.
성향은 축적된 결과이다. 그 것도 금생에서 뿐만 아니라 과거 전생에서 부터 축적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향을 빨리어로 ‘짜리따(carita)’라 한다. 짜리따는 ‘행동, 성향, 처신, 기질’이라는 뜻이다. 즉 중생이 가지는 성벽이나 기질을 뜻한다. 영어로는 disposition, nature, character라 한다.
중생의 성향과 기질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 것은 중생이 지은 업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이와 같은 기질에 대하여 ‘재생연결식(patisandhi-vinnana)’의 ‘생산업(janaka-kammma)’에 따라 결정 된다고 한다.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란
아비담마를 접하면서 가장 큰 쇼크가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었다. 십이연기에서 말하는 무명, 업 다음에 나오는 단계가 식인데 바로 그 식이 재생연결식인 것이다. 남방상좌불교에서는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해석 하기 때문에 ‘무명’과 ‘업’을 과거생으로 보고 재생연결식은 현생의 시작으로 본다. 이런 재생연결식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재생연결식은 새로운 태어남을 일으키는 첫 번째 마음이다. 이를 결생심(結生心)이라고도 한다. 죽을 때의 마음인 사몰심(死沒心)을 원인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며, 이 때 한 일생이 시작 된다.
사람이 죽게 되면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있게 된다. 이번 생에서 마지막 마음을 ‘임종 일념’이라고 한다. 이 임종시의 마지막 마음에 따라 다음생이 결정 된다는 것이다. 보통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태어날 곳의 표상이 떠오른다든가,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업의 표상이 떠 오르는 것이다. 오로지 일생에 한번 만 있는 이 재생연결식의 일어났다 사라짐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 되는 것이다. 그 것도 전광석화 처럼 빠르게 일어난다. 그리고 곧 바로 입태 되어서 또 한생이 시작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임종을 맞는 사람에게 생전에 그가 행한 선한 일들을 기억속에서 되살리어 행복하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죽는다고 슬픈표정을 짖거나 울고 불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나라에서 행하고 있는 49제나 천도제등은 모두 의미 없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죽어서 49일 동안 머무는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 같이 듯이 오직 일생에 한번만 있게 되는 재생연결식 또한 한 순간에 일어 났다가 사라지면서 다음생이 곧바로 시작 되기 때문이다.
생산업(生産業)이란
다음으로 생산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비담마에서는 업을 여러개로 분류하여 놓았다. 그렇게 분류한 업이 16가지나 된다. 그 중에서도 업의 기능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은 4가지로 나누고 있다.
1) 생산업(janaka-kamma)
2) 돕는업(upatthambhaka-kamma)
3) 방해업(upapilaka-kamma)
4) 파괴업(upaghataka-kamma)
여기서 생산업은 재생연결식의 결과 새로운 몸과 마음을 받은 다음에 일어 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한 의도를 말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여섯가지 감각대상에 부딛치면서 만들어 내는 모든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적인 행위가 생산업이다.
돕는 업을 ‘지원업’이라고도 하며, 다른 업이 과보로 익을 때 그 업이 즐겁거나 괴로운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말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좋은 과보라면 병에 걸렸을 때 마침 의약품이 공급 되어 수명을 연장 되는 경우 일 것이다. 반대로 괴로운 과보라면 병이 걸렷을 때 효과를 발휘 하지 못하는 약이 투여 된 경우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돕는 업은 자기 자신은 과보를 산출 하지 못하지만 다른 업이 과보로 익게 될 때 그 업이 고통스럽거나 즐거운 결과를 가져 오도록 돕는 업을 말한다.
방해업 역시 자신은 과보를 생산해 내지 못하지만 다른 업이 과보로 익게 될 때 그 것을 방해하여 계속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선업을 많이 쌓았을 지라도 방해업의 작용을 받는 다면 그 선업의 결과가 감해 지는 것이다. 선업을 쌓아 더 좋은 가문에 태어 나는 작용을 할 때 방해업이 끼여 들면 낮은 가문에 태어 나게 되는 것과 같다. 살아가면서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상은 아마도 방해업의 결과 일 것이다.
파괴업은 다른 약한 업을 눌러 없애 버려서 그 업이 과보로서 익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오직 파괴업 자신의 선업이나 악업의 과보를 받게만 하는 업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업의 기능에 대한 비유로서 초기경의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비유로 나와 있다.
생산업은 농부가 파종하는 것과 같다.
돕는업은 물을 끌어 들이고 비료를 주며 논밭의 파수를 보는 것과 같다.
방해업은 흉작을 가져 오는 가뭄과 같다.
파괴업은 수확물을 완전히 망치는 화재와 같다.
농부가 파종하는 것은 일상적인 의도이고 행위이다. 이 파종된 농작물이 익어 가는 것이 과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잘 익도록 비료도 주고 파수도 보면 수확량이 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가뭄이 듣다면 속수무책일 것이다. 거기에다 누군가가 불을 질렀다면 농작물을 다 망치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 예로서 의도적인 살생을 들 수 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에 나와 있는 ‘레디 사야도’가 설명한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고의로 살생을 저질렀다. 그에 대한 과보가 익기 까지 세가지 기능이 나타날 것이다.
첫째, 이제까지 지은 다른 불선업을 더욱 더 익게 하는 ‘돕는 업’의 기능을 한다.
둘째, 이제 까지 지은 선업이 익는 것을 방해 하는 ‘방해 업’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셋째, 이제까지 지은 선업의 효과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파괴 업’의 기능을 할 수 있다.
고의로 살생 한번 저지른 업이 이제까지 지은 모든 선업을 방해하고 더욱더 불선업을 익게 만들고 종국에는 선업의 효과까지 완전히 차단하여 지옥고와 같은 과보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이런 기능이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건이 익으면 삶의 과정에서 나타 날 수 있고, 이런 기능은 수백겁이 지난다고 해도 가능 하다는 이야기이다.
내 뜻대로 하겠다고?
빨리어 짜리따(carita), 즉 축적된 성향과 기질은 여간해서 바꾸기 힘들다. 이미 그렇게 조건 지어져 태어 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다.
모든 것을 내뜻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남편이나 아내도 내 뜻대로 따라 주어야 하고, 자식은 물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 하면 그 갈등은 끝이 없다. 나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의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의 축적된 성향은 일단 인정 하고 들어 가는 것이 문제 해결 방법의 하나이다. “그렇구나” 인정하고 나서 그 다음 해법을 찾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지금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기인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이런 논리가 아비담마에 나오는 삼세양중인과라 볼 수 있다.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란
남방상좌불교에서 12연기의 무명과 업은 과거생으로 본다. 식에서 부터 유까지를 현생으로 본다. 생과 노사는 미래생으로 본다. 따라서 과거의 과보와 현생의 과보 두가지를 받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 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서 과거의 과보와 현생의 과보룰 두번 받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중요한 것은 현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단계이다. 이 현생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생에 지은 업은 현생에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대로 업의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생에서의 업은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 것이 선업일 수 있고 불선업 일 수 있다. 선업이라면 금생은 물론 미래생의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업에 의존하는 운명론적인 종교가 아닌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불교는 능동적이고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역동적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불교의 십이연기와 업의 개념으로 본다면 ‘신의 뜻’이나 ‘운명론’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금생은 전생의 반영이고, 내생은 금생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 어디에도 업을 짖거나 그 과보를 받을 만한 자아라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다음생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업’과 ‘과보’라는 두가지 측면이 끊임없이 변화 하는 과정이 일어 날 뿐이다. 다만 그 과정에 있어서 재생연결식과 생산업에 의하여 기질이 발생 되는데 크게 여섯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탐하는 기질
둘째, 성내는 기질
셋째, 어리석은 기질
넷째, 믿는 기질
다섯째, 지적인 기질
여섯째, 사색하는 기질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기질을 여섯가지로 분류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다양한 기질에 따라 또는 축적된 성향에 따라 근기에 맞게 부처님이 설하셨는데 이를 방편설, 또는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aya-desana)이라 한다.
49제나 영가천도제 역시 중생의 근기에 따라 펼치는 방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편불교가 부처님이 말한 대기설법인지 그 근거는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아비담마에서는 중생의 근기와 관계 없이 또 방편 없이 법을 있는 그대로 설하였기 때문에 ‘신의 은총’이나 ‘불보살의 가피’가 자리 잡을 틈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과거는 지나 갔고,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다. 바로 지금 여기만 있을 뿐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알아 차린다면 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법을
매순간 바로 거기에서 통찰하라.
(맛지마 니까야, M14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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