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놀음’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소승은 아공법유이고 대승은 아공법공인가
아공법유라는 말을 듣고
아침에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듣는다.
매우 설득력있고 차분 하게 진행 하는 강의는 듣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강의에서 ‘아공법유(我空法有)’라는 말을 사용 하였다. 아비달마(아비담마가 아니라 아비달마라고 함)와 부파불교와 소승불교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특히 아비달마의 현학적인 논리를 ‘번쇄함’이라고 표현 하였고, 민중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개인적인 해탈 열반을 추구 하는 소승적인 논리라고 비판 하였다.
그에 반하여 대승불교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이라고 주장 한다. 아공법유와 아공법공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처음 접해 보는 아공법유의 개념은 무엇일까. 각묵스님의 ‘봉녕사 아비담마 3강’을 듣다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차이
금강경을 보면 4가지 상이 나온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다. 그런데 수자상(壽者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풀이한 금강경의 해설서를 보면 오래사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고 풀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풀이는 산스크리트원전을 모르기 때문에 한자의 ‘목숨 수’를 단순하게 번역한 오류라는 것이다.
수자상을 범어로 ‘지와산냐’라고 한다. 지와(jiva)는 자이나교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이나교는 고정불변하는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교파이다. 아트만이라는 영원한 나, 영원불변 하고 생사를 초월 하는 존재로서의 영혼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아상과 같은 모든 상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개념을 빨리어로 ‘빤야띠(pannatti)’라 한다. 아공이니 법공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개념에 속한다.
그런데 아비담마에서는 개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해체 하여 보는 것이다. 자동차의 예를 든다면 자동차는 개념이고 그 자동차를 이루고 있는 수천가지 부품들은 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법은 각자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몸도 마찬가지이다. 나라고 하는 개념과 수없이 많은 단위로 이루어진 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인도의 초기 불교에서 나는 빤야띠이고, 법은 최소 단위이지만 중국으로 넘어가면 개념이 달라진다. 중국불교에서는 이를 주체와 객체로 보는 것이다. 즉 나를 인식주체로 보고, 법을 인식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능소법’이라고 한다. 능은 인식주체이고, 소는 인식대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능소법으로 인하여 중국이나 한국의 스님들에게 있어서 개념의 혼란이 일어 났다는 것이다. 이런 능소법 개념은 화엄경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나와 법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인도초기불교에서는 나와 법을 ‘개념과 법’으로 보고, 중국대승불교에서는 나와 법을 ‘주체와 객체’로 본다.
법의 성질을 보면
대승불교에서 소승을 비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 아공법유라고 한다. 특히 아비담마교학을 비판 할 때 라는 것이다.
대승에서 법공을 이야기 하는데 소승에서는 법이 있다고 주장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법은 존재 하는 것이라고 주장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제법이 무아인데 법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 할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법유를 극복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법의 성질에 대하여 분석 하여 놓았다.
첫째, 법은 찰라적 존재이다.
이런 발견이 불교의 위대한 점이라고 한다. 아비담마에서는 개념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체 하여 놓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고배율의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이 보면 법은 찰라적으로 존재 하는 최소의 단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의 시간 단위가 찰라라는 말이다. 이런 찰라를 더 드려다 보면 또 찰라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아찰라라 한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하나의 흐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은 찰라적 존재이면서 흐름의 연속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법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앞의 조건으로 일어났다 머물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연속 함으로서 상속 되어 흘러 가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별적 존재인 것처럼 보이나 조건지워져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이다.
‘개념놀음’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여러 법들이 일어나고 서로 부딪치면서 모였다 사라지고를 반복하다. 이런 법들이 모였다 사라지는 것이 개념이다. 마치 물보라와 같은 것이다. 이런 개념을 실재라 믿고 좋아하고 미워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은 끌어 당기고, 싫은 것은 밀쳐 내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개념놀음’에 놀아난다는 것이다.
이런 법을 보는 안목을 ‘법안’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혜안’이라고도 한다. 법을 본다는 것은 해체해서 보는 안목을 말한다. 법을 본다는 말은 또 찰라를 본다는 말과 같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매번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것이다.
법은 찰라적 존재이므로 찰나를 즐거움이나 행복으로 보지 않는다. 자꾸 변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즐거움이 곧 괴로움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다시 즐거움으로 바뀐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또 괴로움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아무리 즐겁다고 해도 결국에는 괴로움으로 바뀌고 만다. 무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고’라는 것이다.
털끝 만큼이라도 괴로움이 있다면 고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즐거움은 고에 포함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아’인것이다. 이런 법칙은 제법에 적용 된다. 그래서 제법무아이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이렇게 ‘법유’를 말하지 않았다. 대승이 소승을 폄하가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아공법유가 아닌 ‘아공법공’인 것이다. ‘제법무아’나 ‘공’이나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기질에 따라
깨달음은 무엇일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분명하다.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다. 무상 고 무아를 어떻게 통찰 해야 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법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는 것이다. 이것을 ‘내관(內觀)’이라 한다. 그렇다면 ‘외관(外觀)’도 있을 것이다. 자연의 변화나 사람이 늙어 가는 것, 죽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무상 고 무아를 보는 것은 사람에 따라 기질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무상’을 잘 보는 이가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고’를 잘 보는 이, 또 어떤 이는 ‘무아’를 잘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대체로 정서적인 사람은 고를 통하여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고, 지적인 사람은 무아을 더 잘 봄으로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한다고 한다. 어느 경우이든지 무상 고 무아는 서로 연결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상 고 무아를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런데 해탈에는 세가지가 있다. 무상을 통한 해탈을 ‘무상해탈’이라고 하고, 고를 통한 해탈을 ‘무원해탈’, 무아를 통한 해탈을 ‘공해탈’이라고 한다. 각자의 기질에 따라 해탈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비담마를 잘 몰라서
아비담마에서는 논리적으로 공을 설명하고 있다. 즉 무상 고 무아를 말하는 것이다. 제법무아는 결국 아공과 법공을 설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좌불교에서는 법유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법은 찰라적 존재이고 조건에 따라 상속 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 법유가 아니라 해서 법무라고 볼 수 없다. 결국은 법공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비담마를 아공법유식으로 폄하 하고 소승불교라고 말하는 것은 아비담마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일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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