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환생과 재생은 다르다,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본 윤회의 타파

담마다사 이병욱 2009. 7. 20. 20:34

 

환생과 재생은 다르다,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본 윤회의 타파

 

 

 

 

 

 

윤회가 없는 불교를 상상 할 수 있을까. 불교를 믿으면서도 윤회를 부정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유물론자이거나 단멸론자들일 수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영혼불멸을 주장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원히 존재 하는 진아 즉 참나가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나가 있어서 몸만 바꾸어 다시 태어 난 다는 것이다. 이른바 환생론이다.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윤회에 대하여 상원 교재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paticca-samuppada)의 역주를 참고 하여 보았다.

 

환생(reincarnation)과 재생(rebirth)은 다르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ara)이다. 삼사라는 함께 움직이는 것또는 함께 흘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표현 하면 ‘round of rebirth’ 이다.

 

앗타살라니(Attasalini)는 윤회를 5, 12, 18계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 되는 것으로 정의 하였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인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고, 생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 생에서 마지막 마음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 나는 것이 윤회이다. 그러므로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 설하는 윤회설과는 구분 되어야 한다.

 

힌두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전변하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이다. 반면에 불교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 rebirth)이다.

 

부처님의 오도송

 

윤회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명에 덮힌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

(상윳따 니까야, S15:13)

 

 

또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 왔다.

집짖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짖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였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짖지 못하리.

그대의 골재는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 하였다.

(법구경, 153-154게송)

 

 

이렇게 부처님은 윤회가 종식된 것에 대하여 감회를 밝히셨다.

 

부처님은 분명히 갈애(tanha, 딴하)와 무명(avijja, 아윗자)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다. 그 중에 갈애를 재생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생사윤회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를 위시한 모든 번뇌를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인 갈애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인 열반을 설하셨고, 다한 경지를 실현 하는 방법()인 팔정도를  설하셨다.

 

초기불교와 너무나 동떨어진

 

교재의 내용을 본 바와 같이 환생과 재생은 다르다. 모두 다 윤회라고 하지만 환생은 영원불변 하는 자아가 있어서 몸만 바꾸어 태어 나는 개념이고, 불교의 윤회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다시 태어 나는 재생개념이다. 업의 과보가 전해져서 몸과 마음이 재생 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업을 지을 일이 없으면 몸과 마음이 태어 나지 않을 것이다. 그 업을 짖지 않게 하기 위한 단계가 12연기에서 느낌()에 갈애()로 넘어 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환생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리고 영어로 reincarnation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재생(rebirth)개념하고 다르다. 달라이라마도 환생되었다라고 말하지 재생 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티벳불교가 초기불교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히 변치 않은 참나가 있다는 한국불교 역시 초기불교의 재생개념과는 동 떨어져 있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2009-07-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