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다 알아차리오리다, 사홍서원을 현대식으로 재해석 하면
번뇌를 끊어야 한다는데
지금 방송하고 있는 경전공부시간은 성본스님의 육조단경이다. 스님의 강의에서 ‘사홍서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불자들의 법회의식에 반드시 들어 가는 사홍서원은 6세기 말에 당나라 천태 지의대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법화경의 약초유품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였다고 한다. 사홍서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誓願度)
② 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誓願斷)
③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誓願學)
④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誓願成)
여기에서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여야 번뇌를 끊을 수 있을까. 초기불교에서 번뇌를 탐진치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탐진치의 소멸이야말로 닙바나로 가는 지름길인데 번뇌 망념을 어떻게 해야 끊어 버릴까.
법문을 들으면 ‘번뇌는 끊을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 말은 초기불교와 상좌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지도 하는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왜 번뇌를 끊을 수 없을까 바로 그 것은 ‘축적된 성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전생에서부터 형성 되어 온 기질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업대로 산다고 한다. 즉 업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도이거사의 미얀마 수행기를 보면
그렇다면 번뇌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냥 ‘알아차리면 된다’고 한다. 축적된 성향이나 기질, 성질을 그대로 인정 하자는 것이다. 바꾸려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렇게 인정 하는 바탕 하에서 현재 그대로를 알아 차리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차림이 왜 중요 할까. 최근에 ‘도이거사의 미얀마 수행기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3567&thread=23)’를 보았다. 수행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번뇌망상이 손님으로 오면 ‘망상’이라고 알아차리면 믿지 못하겠끔 곧 사라진다. 그것은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알아차림 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면 앞서 일어났든 괴로움이나 번뇌망상은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본성품과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法說)이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번뇌망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번뇌망상을 단지 알아차림으로서 사라지게 했다는 것이다. 끊는다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말하려는 것일까 마음은 한가지 일 밖에 하지 못한다는 중요한 통찰을 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법의 성품을 알았을 때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법열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아는 일이다. 자기자신도 잘 모르는 마음은 무엇일까. 초기불교와 남방상좌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 하고 있다.
첫째,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 난다.
둘째,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한다.
셋째,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마음의 성품이다. 또 다른 말로 법(法)이라고 한다. 마음이 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부수법의 도움을 받아 52가지 마음이 발생하는데 아비담마에서는 이 것을 선심, 불선심등으로 분류 하여 도표화 하였다.
마음을 도표화 하다니!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유일신교와 달리 인간의 사유를 고도화한 산물의 결과라 볼 수 있다.
번뇌망상을 알아차리면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 것은 마음이 한가지 일 밖에 할 수 없고, 마음은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지금 화나는 마음을 단지 ‘화냄’ ‘화냄’ 하고 알아 차린다면 화나는 마음은 사리지고 그 대신에 화냄 하고 알아차리는 마음이 그 자리에 자리 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알아차리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알면서도 하는 경우가 생긴다. 나쁜짓인지 알면서도 계속 반복 하는 것 같은 것이다. 도둑질이 나쁜짓인지 알면서도 계속 도둑질 하고, 사기치는 것인 나쁜짓인지 누구 보다 자기 자신이 더 잘 알면서도 사기를 계속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중생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성향 ‘아누사야(anusaya)’
존재가 윤회 하는 이유는 12연기 사이클에서 느낌(受)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愛)로 넘어 갈 때 이다.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그치지 않고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하게 되었을 때 업을 짖게 되고 윤회의 사이클을 굴리게 된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없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자신도 모르게 휩쓸린다고 한다. 바로 잠재성향 때문이다.
잠재성향을 빨리어로 ‘아누사야(anusaya)’라 한다. 아누사야는 ‘따라 누운’이라는 뜻이고 무시(無始) 이래로 중생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성향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수면(隨眠)으로 옮겼고, 영어로는 underlining tendency 로 옮겼다.
주석서에는 아누사야를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자기가 속해있는 정신적인 흐름에 따라 누워 있다가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 표면으로 드러나는 번뇌이다.
아누사야는 언제든지 튀어 나올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자극이 가해 지면 겉으로 표출 되고 자극을 주는 힘이 사라지면 다시 잠복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누사야라는 번뇌는 출세간의 도에 의하여 소멸 되지 않는한 언제든지 다시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누사야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모든 불선법이 이 다 아누사야에 포함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다음과 같은 7가지 사항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① 감각적욕망의 잠재성향(kamaraganusaya)
② 존재에 대한 욕망의 잠재성향(bhavaraganusaya)
③ 적의의 잠재성향(patighanusaya)
④ 자만의 잠재성향(mananusaya)
⑤ 사견의 잠재성향(ditthanusaya)
⑥ 회의적 의심의 잠재성향(vicikicchanusaya)
⑦ 무명의 잠재성향(avijjanusaya)
잠재성향이라 불리우는 아누사야는 축적된 성향이라고 부를 수 있고 기질, 성질로도 부를 수 있다. 이런 성향은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튀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이다.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의 안 에 있는 잠재성향과 밖에 있는 잠재성향이다.
몸과 마음의 안에 있는 잠재성향을 ‘오온에 흐르는 번뇌’라고 하고 빨리어로 ‘산딴아누사야 낄레사(santananusaya-kilesa)’하고 한다. 몸과 마음안에는 항상 불선법을 일으 킬 수 있는 잠재성향이 피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몸과 마음의 밖에 있는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번뇌가 일어 나게 되는데 이것을 ‘감각대상에 잠재하는 번뇌’라 하고 빨리어로 ‘알람만아누사야낄레사(arammananusaya-kilesa)’라 한다.
번뇌를 다 알아차리오리다
유일신교에서는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린다. ‘신’ 만능주의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돌린다. 이 우주도 마음이 만들었고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다. ‘마음 만능주의’이다. 그러면서 또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좌불교에서는 마음을 명확히 규정 하여 놓았다. 도표화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세밀하게 분석해 놓았다. 초기경전과 아비담마논장이 그 것이다.
이제까지 대승불교에서는 번뇌를 끊어서 없애 버려야 하는 것 또는 ‘조복’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 하여 왔다. 그러나 상좌불교에서는 특히 위빠사나에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라고만 하였다. 축적된 성향을 인정 하자는 것이다. 이미 형성된 기질이나 성질을 바꾸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려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지 않게 하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홍서원에서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誓願斷)'는 시대에 맞게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번뇌를 다 알아차리오리다 (번뇌무진서원념, 煩惱無盡誓願念)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업을 짖지 않는 것이며 윤회의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는 ‘통찰지(혜해탈,慧解脫)’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처음 부터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성질대로 살아 왔는데 하루 아침에 바뀔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한다. 수행을 다른 말로 수습(修習)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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