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인식과정의 마나시까라(manasikara), ‘마음에 잡도리함’ 보다 ‘주의 기울임’이 더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용어의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혼란의 원인은 아무래도 초기불교가 전래된 역사가 짧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데
초기불교가 도입된지 불과 20여년 밖에 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알려 지지 시작 한 것은 남방불교국가에서 공부 하고 돌아온 분들이 책을 내고 수행 지도를 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부터 라고 할 수 있다. 그 분들이 낸 책이나 수행지도서를 보면 빨리어 용어를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말을 사용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용어 중에 가장 이해 하기 어려웠던 말이 ‘마나시까라(manasikara)’이다. 각묵스님은 이 마나시까라를 ‘마음에 잡도리함’이라고 번역 하였다. 잡도리함이란 무엇일까. 각묵스님은 동영상 강의에서 국어사전에 그런 말이 있어서 사용 하였다고 말하였다. 인터넷국어 사전을 찾아 보았다.
잡도리
1. 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2. 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는 일.
3. 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 족치는 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다’라는 용어로 사용 된 듯 하다. 그러나 다른 번역서에서는 ‘여리작의(如理作意)’로 번역하고 있다. 잡도리함이 한글번역이라면 여리작의는 한문투의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마나시까라를 가장 잘 번역해 놓은 말은 아마도 ‘주의 기울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의 기울임’이라는 말 이 더
마나시까라에 대한 설명으로서 인식과정을 들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 인식과정은 마음이 진행되어 가는 가는 진로나 과정을 뜻한다. 이런 인식과정은 감각의 오문(五門)이나 마노의 문(意門)에서 대상을 인식 함으로써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안식(眼識)을 들 수 있다.
눈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눈의 감성(cakkhu-pasada)
둘째, 형상인 대상(rupa-arammana)
셋째, 빛(aloka)
넷째, 주의 기울임(manasikara)
마지막 네번째에서 마나시까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으로 보아 알기 까지는 네가지 조건이 만족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눈이라는 감각 기관이 있어야 하고, 눈으로 보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빛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는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기울임, 여리작의, 마음에 잡도리함 이라는 용어로 불리우는 마나시까라(manasikara)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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