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님을 시험하는 노보살과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09. 7. 5. 11:18

 

스님을 시험하는 노보살과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 있다. 일반 재가자들과 달리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무소유로 살아 가는 승가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 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스님이야기와 같은 칼럼이나 책이 관심을 끄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스님을 시험하는 노보살

 

그런 스님이야기 중에 옛날 부터 내려 오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화두로도 사용 된다는 파자소암(婆子燒庵) 이야기이다.

 

 

옛날에 한 노보살님이 암자의 스님을 20년 동안 시봉하였습니다.

지극정성 일행삼매(一行三昧)로 그 스님을 시봉하다가 보니 노보살님이 먼저 공부의 안목이 열려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보살님은 딸에게 공양을 가지고 가게 하면서 말했습니다.
“스님을 껴안고는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하고 물어보고 그 대답을 나에게 전해다오.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하였습니다.
공양을 마친 후 그릇을 거두고는 가만히 스님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시킨대로 물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
“고목(枯木)이 의한암(倚寒巖)하니 삼동(三冬)에 무난기(無暖氣)로다.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도 따사로운 느낌이 없도다.
딸은 돌아와서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노보살님은 “내가 20년동안 시봉했는데 스님의 공부경지가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하고는 벌떡 일어나 그 스님을 내쫓고는 암자에다가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이것이 종문(宗門)에 전해오는 유명한 파자소암(婆子燒庵) 공안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글이다. 노보살이 딸을 보내어서 공부한 결과를 시험 한다는 내용이다.

 

노보살이 암자를 태운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못한 일일까 이를 두고 여러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의 공안으로도 활용 되고 있다고 한다.

 

청정도론의 마하띳사장로 이야기

 

파자소암이야기는감각적욕망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 이야기가 공안으로 이야기 되고, 감칠맛 나는 법문을 위해 사용 되고 있는 현실은 자기합리화로도 볼 수 있다. 무소유를 지향하면서 걸림없이 살아 가는 무애행의 한 단면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무애행과 같은 이야기는 상좌불교에서는 없다고 한다. 상좌불교에서는 철저하게 감각적욕망의 극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원의 교재 마하시사야도의 복주석서 십이연기(빠띠짜 사뭇빠다, pattica-samuppada)에 보면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가 나온다.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는 청정도론에 나온다. 상좌불교에서 장로라는 명칭은 30년 이상된 비구에게 붙여 준다고 한다. 교재에 나온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장로가 탁발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집중 수행처를 떠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로 가는 도중에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서 집을 뛰쳐나온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장로를 보자 욕정이 생겨서 요염하게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마하띳사 장로는 그 여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빨을 주시 하였습니다. 장로는 뼈(atthi)를 관찰해왔기 때문에, 그 여자의 전신은 뼈 무더기로 보였습니다. 장로는 이 정신적인 표상에 집중해서 선정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선정상태에서 해골의 표상을 관찰한 다음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스님, 신부, 목사등을 성직자 내지 교역자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신도들은 이들 종교인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종종 파계하거나 성직을 내 던지는 경우가 발생 한다고 한다. 특히 개신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더 많이 발생하는 것 교역자가 일반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적욕망이 강한사람에게

 

감각적욕망을 극복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수행법이 있다. 바로 부정관(不淨觀)이다. 몸의 더러움을 관찰해서 감각적 욕망을 극복 하는 것이다.

 

부정관을 부정상(不淨想)이라 하는데 빨리어로 아수바 산야(asubha-sanna)’라 한다. 부정관은 사마타수행으로서 모두 시체의 썩은 정도나 흩어진 정도를 가지고 수행한다. 부정관수행 열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푼 것

둘째, 검푸른 것

셋째, 문드러진 것

넷째, 끊어진 것

다섯째, 뜯어 먹힌 것

여섯째, 흩어진 것

일곱째, 난도질 당하여 뿔뿔이 흩어진 것

여덟째, 피가 흐르는 것

아홉째, 벌레가 버글거리는 것

열째, 해골이 된 것

 

 

부정관은 특히 탐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수행으로 잘 알려져 왔다. 요즘 같으면 성적욕망이 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만큼 명상주제 가운데 가장 무섭고 어려운 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까 부처님 당시에 부정관수행을 하던 비구 52명이 자살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이빨을 보고 해골의 표상을 떠 올렸다는 이야기가 진짜 가능한 일일까. 주석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정신적인 표상은 꾸준하고 장기간의 관찰수행을 하면 가능 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마타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띳사 장로가 실제로 본 것은 여자의 이빨이었지만 관찰수행으로 여자의 몸과의 감감접촉을 뼈의 표상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장로의 마음에 여자와의 감각접촉에서 욕정이나 다른 번뇌가 생길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결과 장로는 선정의 마음을 토대로 하여 위빠사나를 닦아 번뇌에서 벗어나고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만약 마하띳사 장로가 웃는 여인을 뼈로 인신하지 못하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인적 없는 숲속에서 욕정을 일으켜 유혹에 넘어 갔을지 모른다. 설사 당시에 성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여자의 남은 인상은 언젠가 마하띳사를 유혹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를 보면 파자소암(婆子燒庵)’에서의 스님 역시 부정관의 실천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노보살은 스님의 공부를 칭찬해 주어야 할 텐데 거꾸로 암자를 불태워 버렸다. 그런 노보살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 하는 듯한 태도가 팽배해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무애행을 이용한 자기합리화로 보여 지는 대목이다.

 

업이 성숙하면 과보로 익게 되고

 

불교는 번뇌의 소멸로 인하여 다시는 이세상에 태어 나지 않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느낌에서 갈애의 단계로 넘어 가지 말아야 한다. 십이연기에 있어서 갈애는 여섯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가 여섯감각대상인 색성향미촉법과 부딪쳤을 때 느낌으로 부터 일어 난다. 단지 느낌으로 끝나면 더 이상 삼사라를 윤회 하지 않겠지만 몸의 감각으로 받아 들였을 때 과보의 수레바퀴를 굴리게 된다. 이것을 과보의 회전(vipaka-vatta), 업의 회전(kamma-vatta), 번뇌의 회전(kilesa-vatta)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번뇌의 회전이다.

 

번뇌의 회전은 무명으로 눈을 멀고, 갈애로 인해 내몰려서 여러가지 불선업과 선업을 짖는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번뇌의 회전이 업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 업이 성숙하면 그 것은 다시 과보로 익게 되고 그래서 업의 회전은 과보의 회전을 일어 나게 한다. 이와 같이 세가지 회전은 그 것의 토대가 되는 무명이 위빠사나의 지혜와 출세간의 도로 제거 될 때 까지 쉼없이 계속 돌아 갈 것이다. 이를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계속 돌아 간다.

여기서 상카라()와 존재()는 업()의 회전이고,

무명과 갈애와 집착은 번뇌의 회전이고,

(), 정신-물질(名色),여섯감각장소(六處),

감각접촉(), 느낌()은 과보의 회전이다.

 

이 세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번뇌의 회전이 끊어 지지 않는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 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Vis.XV2)

 

 

그랬구나, 그랬네 , 그러려니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감각대상이 없는 곳에서 눈감고 귀막고 숨어서 살 수 없는 일이다. 감각대상에 부딛치면 일단 받아 들여야 한다. 그 느낌은 사람마다 차이가 날 수 있다. 그 느낌이 즐거운 것일 수도 있고 괴로운 것일 수 도 있고 덤덤하기도 할 것이다. 받아 들이는 사람의 축적된 성향에 따라 크게 좌우 된다는 것이다. 축적된 성향은 자신도 제어 하지 못한다. 지은 업대로 사는 것이다.

 

업대로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한다. 알아 차리는 순간 만큼은 번뇌의 회전을 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알아 차리게 되면 느낌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속임수에 넘어 가지 않는 다는 말이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감각적욕망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느낌이 몸으로 와서 바라게 되면 갈애로 발전 하게 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굴리게 될 것이다. 단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랬네 , 그러려니 하자는 것이다.

 

 

 

2009-07-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