닙바나 (Nibbhana, 열반)는 어떤 상태를 말할까
좌선중에 재채기가 나올 경우가 있다. 한번 재채기가 나오면 연거푸 나오기 때문에 참기도 힘들뿐더러 멈추기도 힘들다. 그로 인하여 주위에 있는 다른 좌선자들에게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집중 하려 하는 순간에 나오는 다른 사람의 재채기 소리는 불쾌 하기 짝이 없고 불선심(不善心)을 발동 하기 까지 한다.
죄선중의 재채기 어떻게 해야 하나
좌선시간이 되었다. 현재의 선원자리에의 마지막 시간이다. 선원이 내일이면 이사 간다고 한다. 이제까지 5년동안 청호불교문화회관 1층을 무상으로 사용 하여 왔는데 이제 인연이 다 되어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름도 바뀌었다. 종전의 ‘한국위빠사나선원’에서 ‘상좌불교 한국명상원’으로 바꾸었고 재단등록도 할 것이라 한다.
전세와 월세로 유지 되는 이전 장소는 바로 앞의 상가건물 3층이다. 법문이 끝나고 경행 시간에 가본 새로운 장소는 환경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식당과 주점, 연예 기획사들이 등이 함께 있는 전형적인 상가 이기 때문이다. 특히 3층에 바로 마주 보고 있는 연예기획사는 여성으로 성전환한 ‘하리수’ 사무실이다. 하리수의 인기는 예전 보다 못하다고 한다. 아마도 결혼한 영향이 컷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현재의 자리에서 마지막 이어서 일까 에어콘도 나오지 않고 밖의 날씨 까지 후덥지근 하여 몹시 끈적 거리고 습도도 높아 악조건하에서 좌선이 시작 되었다. 먼저 30분간 와선을 한 후에 나머지 30분간 좌선 하는 시간이다. 날씨 탓일까 앉자 마자 재채기가 나오려 한다. 여기서 재체기를 터뜨리면 다른 사람 한테 피해을 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떻게 든 참아 보기로 하였다. 목젖까지 다가온 재채기를 지켜 보기로 하였다. 참고 견디며 지켜 보기로 한 것이다. 모든 것은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재채기 역시 지켜 보면 사라질 것으로 확신 하고 있었다. 재채기 참기는 쉽지 않았다. 온 몸이 긴장 되고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이었다. 이렇게 참고 견디며 지켜 보고 있으니 진짜 거짓말 처럼 재채기 나오려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중이 되어서 평온한 상태가 유지 되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분리하여 지켜 보는 것이라 한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몸과 마음에서 가장 자극이 심한 곳을 관찰 하는 것이다. 법의 성질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므로 가장 자극이 심한 곳 역시 일어 났다 사라짐을 알 수 있다. 일어 났다가 사라짐을 관찰 함으로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자는 것이다.
죄선시간에 재채기 역시 자극이 가장 심한 케이스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자극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법의 성질인 생멸과 무상 고 무아를 관찰 할 수 있는 좋은 반찬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려움이나 다리저림등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치과에서 이를 치료 할 때나 수술시에 오는 고통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고통이 일어 났을 때 터뜨리지 말고 조용히 응시하고 관찰 하다 보면 슬며시 사라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가
누구나 느낌을 가지고 있다. 빨리어로는 웨다나(vedana), 영어로는 필링(feeling)이라 한다. 이런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고 않고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 세가지가 있다.
느낌은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발생 한다. 즉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기관이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이다. 만난다는 것은 접촉을 의미 하고 반드시 느낌을 수반 하게 되어 있다. 여기까지 범부이건 상자이건 누구나 거치는 단계라 볼 수 있다.
느낌 다음에는 어떤 단계 일까. 십이연기에서는 느낌을 조건으로 일어 나는 단계를 갈애로 규정 하고 있다. 육입에서 갈애까지의 단계의 십이연기 사이클을 보면 다음과 같다.
5 단계-육입(사라야따나, salayatana)
6 단계-촉(팟사, phassa)
7 단계-수(웨다나, vedana)
8 단계-애(딴하, tanha)
여기서 가장 중여한 단계가 7번째 단계인 느낌(受)에서 8번째 단계인 갈애(愛)로 넘어 가는 단계이다. 대부분의 범부들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감으로서 윤회의 수레 바퀴를 굴리게 되지만 성자들은 멈출 줄 안다. 왜 멈출줄 알게 될까.
여섯감각장소(육입)에서 감각대상과의 접촉(촉)이 일어 났을 때 느낌(수)이 일어 나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통상 그런 느낌은 세가지 중의 하나이다.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이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라도 몸과 마음을 가진 똑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육체적인 통증을 느낀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정신적으로 괴로워 하거나 즐거운 감각을 기뻐 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갈애와 집착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즐거움이나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고 업을 짓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재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번뇌에서 완전하게 벗어 난 상태라는 것이다.
갈애가 소멸 되면
열반이라고 부르는 닙바나(Nibbhana)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유위법인 언어로 무위법인 닙바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무기(無記, avyakata)라고 말하였지만 초기경에서는 번뇌가 소멸 된 상태라고 명확하게 규정 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라불존자는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를 닙바나라고 말하였다.
"도반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도반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
이를 일러 열반이라 합니다.”
(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3)
이렇게 닙바나는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 즉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말 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번뇌가 소멸되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라한의 경우는 번뇌가 완전히 소멸 되었기 때문에 어떤 갈애도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교재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를 보면 그와 같은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자신의 행복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아라한에게는 아무리 매혹적인 감각대상에도 끌림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갈애와 집착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며, 이는 업형성력인 상카라와 재생과 그에 수반 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 합니다.
아무리 매혹적인 감각대상에도 끌림이 없는 상태가 갈애와 집착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불환과 역시 욕계에서 감각적 갈애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다시는 이 욕계에 되돌아 오지 않고 색계 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닙바나에 드는 존재가 불환과 인 것이다. 그러나 성자의 길로 들어 선 ‘예류과’의 경우는 좀 다르다. 완전히 갈애로 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더 태어 나고 죽음을 반복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곱생이내에는 완전히 번뇌가 소멸 되어 더 이상 윤회의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않도록 보장 되어 있는 단계가 예류자라 볼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범부들도 닙바나를 체험 할 수 있을까. 선원장의 말에 따르면 미얀마에서 집중수행을 하는 사람중에 빠르면 두달안에 닙바나를 체험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닙바나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무기라고 말하였지만 위빠사나 수행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닙바나는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분리하여 관찰하는 위빠사나에서 몸과 마음이 소멸 되면 닙바나에 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호흡을 통하여 집중 하게 되면 몸이 사라지는 느낌을 갖게 되고 더 깊어 지면 호흡도 사라지는 단계를 체험 하게 된다. 이어서 아는 마음도 소멸 되면 닙바나 들었다고 말한다. 즉 몸과 마음이 소멸된 상태를 닙바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닙바나의 상태는 사람마다 다 달라서 순간적일 수 도 있고 좀더 지속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순간적인 소멸을 보장’ 한다는 것이다. 경행이나 좌선중에 순간적으로나마 번뇌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경행중에 왼발 오른발에 집중하여 알아 차리는 순간 만큼은 돈걱정, 부모자식걱정등 일상의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일시적인 적멸 ‘따당가 니부띠(tadanga-nibbuti)’
끊임 없는 알아차림을 지속 한다면 지혜가 개발 되어서 모든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되고 그 것들이 무상 고 무아임을 발견 하게 된다. 오로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만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곱글자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짐’이다.
이런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되면 수행자는 일어나는 느낌을 기뻐 하지도 않고, 또 다른 느낌을 갈망 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갈애로 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순간만 그렇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도의 갈애의 소멸은 영원한 것이며 모든 감각대상과 관련된 것임에 반하여 위빠사나에 의한 갈애의 소멸은 영원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관찰 하는 순간만, 그리고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만 갈애가 소멸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을 ‘번뇌의 부분적인 소멸’ 또는 ‘일시적인 적멸(따당가 니부띠, tadanga-nibbuti)’라 한다. 즉 있는 그대로 아는 상태에서는 갈애가 생길 여지가 없으며, 그 결과 집착, 업, 재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서 윤회의 바퀴가 부분적으로 단절 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지 않고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하여 닙바나에 들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빨리어로 ‘딧테와 담메dittheva dhamme)’ 영어로는 ‘here and now’, 알아차림을 지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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