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뇌에 있을까 심장에 있을까, 재생연결식과 심장토대의 마음을 보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이 무엇이길래 마음 마음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음은 뇌의 기능일 뿐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도 없는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예로 부터 마음에 대하여 수 많은 연구가 있었고 주장이 있어 왔다. 그런 마음에 대하여 최근에는 단지 뇌의 작용에 불과 하다고 주장 하는 사람도 나타 났다. 신경과학계통의 학자를 통해서이다. 그 뇌 신경과학자는 주장 하기를
정신이나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뇌의 기능일 뿐이지 하나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 한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식은 틀렸다고 주장 한다. 눈을 통해서 ‘뇌로 보고’, 귀를 통해서 ‘뇌가 듣는’ 식이라는 것이다. 철저히 ‘뇌만능주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윤회도 부정 한다. 단지 ‘마음의 상태’로 해석하고 있다. 즉, 죄를 짖고 나면 죄의식을 느낌으로 해서 지옥을 체험하는 것이 윤회와 같은 이치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윤회는 실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뇌신경과학자의 말은 어느 면에서는 맞고 어느 면에서는 비판 받을 수 있다. 비판적으로 본다면 그의 주장은 불교에서 가장 경계 하는 ‘단멸론’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다. 또 불교의 핵심인 ‘연기론’도 부정 한다. 오로지 두뇌의 화학적 작용에 촛점을 맞추다 보니 불교의 교리와 맞지 않는 내용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배치 되는 것은 마음은 뇌의 기능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즉, ‘마음은 뇌에 있다’ 라는 주장이다.
왜 하필이면 심장토대일까
마음은 정말 뇌의 기능 또는 작용일 뿐이며, 마음은 뇌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내려 오는 불교의 마음관은 어떤 것일까. 마음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 해 놓은 논서가 아비담마이다. 마음을 해체하고 분석하여 도표화 한 책이 아비담마이다. 그런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뇌의 작용에 작용에 불과 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적어도 아비담마에서는 뇌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기관이다. 그런 대신에 ‘심장’에 대하여 주목 한다. 즉, 마음은 심장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심장 그 자체에 마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심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왜 하필이면 심장토대일까.
우선 마음의 인식과정을 살펴 보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다섯가지 감각의 작용이 있다. 보통 안이비설신 오문(五門)인식과정이라 하는데 이 오문인식과정은 모두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안문인식과정이라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가져야 한다.
첫째, 눈의 감성(짜꾸 빠사다, cakkhu-pasada)
둘째, 형상인 대상(루빠 아라마나, rupa-arammana)
셋째, 빛(아로까, aloka)
넷째, 주의기울임(마나시까라,manasikara)
우선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눈과 부딪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것이 형상이다. 그 다음에 빛이 있어야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이 안식이다. 그러나 안식 그 자체로는 인식 할 수 없다. 단지 감가적 접촉에 의한 눈의 인식작용을 알게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아는 마음을 알게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인식작용 잡문인식과정(미사까 드와라 비티, missaka-dvara0vithi)이라 한다.
인식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잡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과 의문인식과정 모두를 포함 하고 있다. 여기에서 순전히 마노의 문(의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순수의문인식과정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인식과정은 육체적인 감각의 문을 이용하지 않고 순전히 마노의 문인 바왕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인식과정(비티 찌따, viti-citta)를 설명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과정은 크게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오문인식과정과 마음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의문인식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둘째, 물질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과 마음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은 다르다. 한번 물질이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에 마음은 17번 일어났다 멸한다.
셋째, 오문인식과정을 예로 든다면 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같은 대상’을 두고 17번 마음이 생멸한다. 이 것도 대상에 따라서 매우 큰 것, 큰 것, 작은 것, 매우 작은 것 이렇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것은 다시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져 모두 15가지 경우로 나누어 진다. 여기서 크다 작다라는 말은 물질적인 크기가 아니라 마음에 충격을 말한다.
넷째, 매우 큰 대상일 경우에는 17단계를 모두 받아 들인다. 즉 3가지 바왕가(지나간 바왕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와 오문전향, 받이들임, 조사, 결정, 7가지 자와나, 2가지 등록 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핵심은 지나간 바왕가(아띠따 바왕가, atita-bhavannga)이다. 이것은 일단 대상이 나타났지만 그 대상의 충격이 약하여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나쳐 버린다. 예를 들어 충격이 매우 약한 대상들은 바왕가의 동요만 일으키고 인식과정이 끝나 버린 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마지막 15번째(7번째 자와나)의 경우에는 대상이 문으로 들어왔는데도 15번째의 마음 순간 까지 그 것을 알지 못하고 흘러가 버려 겨우 두번만 바왕가의 동요가 일어나고서 인식과정이 끝나 버리는 경우이다.
다섯째, 의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 보다 더 단순한데 그 이유는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의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의문전향 다음에 바로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음의 대상은 이런 과정 없이 즉각적으로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은 마노의 대상에 따라서 선명한 것과 희미한 것 둘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여섯째, 각각의 인식과정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바왕가를 거쳐서 그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 간다.
일곱째, 인식과정에 개입된 마음은 모두 7가지이다. 즉 오문전향의 마음, 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중의 하나),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자와나, 등록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자와나는 7번 일어나고 등록은 2번 일어난다. 따라서 인식과정에서 모두 14가지 마음이 일어 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나간 바왕가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은 바왕가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육문으로 들어온 감각의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지 못한다.
거미의 비유를 들면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인식과정을 알아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바왕가이다. 우리말로 잠재의식이라고 표현 되는 바왕가는 어디에 머무는 것일까. 아비담마 논서에는 심장을 토대로 머문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마하시사야도의 빠띠짜사뭇빠다(paticca-samuppada, 12연기)에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책에서는 거미의 비유를 들고 있다.
거미는 파리를 잡기 위하여 그믈의 일종인 거미줄을 칩니다.. 거미는 태어난지 며칠만 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지 1년이 된 아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거미는 거미집의 중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줄에 걸리는 생명체는 모두 먹어 치우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왕가, 즉 의식은 거처로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거처와 그 주변을 연결 하고 있는 거미집의 거미줄처럼 심장에 의하여 주입된 피가 혈관을 통해서 온 몸에 퍼집니다. 그리고는 눈에 있는 형상이 심장에 있는 바왕가를 자극하여 자극하면 그 것은 안문인식과정을 통해서 안식등으로 변환 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왕가는 제자리로 돌아 옵니다. 소리와 냄새등에 대해서도 각각에 해당되는 감각기관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마음 즉 바왕가가 심장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두고 있다는 것은 피가 온 몸에 퍼져 있어서 마치 거미줄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미줄의 중앙에 거미가 앉아 있다가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먹어 치우듯이 마음 역시 온몸에 퍼져 있는 핏줄에 걸린 눈이나 귀나 코와 같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토대가 심장이라는 것이다. 심장이라고 하지만 심장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피가 온 몸에 퍼져 있듯이 온 몸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피의 반은 항상 심장에 머물고 있고 나머지 반은 온몸에 퍼져셔 순환 한다면 심장토대가 맞는 말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양의 아비담마 학자들은 이견을 제시 하기도 한다. 왜냐 하면 빨리삼장에는 심장토대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주석서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노(순수의문인식과정)와 의식(전체의문인식과정)은 심장을 토대를 의지해서 일어 난다는 것은 아미담마의 정설로 보고 있다. 따라서 뇌는 상좌부 불교에서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아비담마를 공부 하면서
어느 뇌신경과학자는 데이터까지 제시 하면서 마음은 단지 뇌의 기능이자 뇌의 작용에 불과 하다고 전도된 주장을 한다. 그리고 불교의 핵심사상 중으 하나인 윤회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 하고 단지 현재의 마음의 상태에 불과 할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의 주장을 보면 인생은 오로지 단 한번 밖에 존재 하지 않는 원타임(One time)인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인 12연기도 당연 부정 된다. 따라서 아비담마에 나오는 재생연결식이나 심장토대 역시 비과학적인 주장이 되고 만다. 철저하게 유물론적이고 단멸론적으로 해석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멸론과 같은 단견(斷見), 영원히 변치 않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 하는 상견(常見)을 배격 한다.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조건 지워진 마음에 따라 그 과보로 유전 한다는 12연기의 가르침이 근본 가르침이다. 12연기와 윤회가 없는 불교를 불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재생연결식이나 마음의 심장토대설이 과학적으로 증명 되어 있지 않다. 과학적인 뒷바침이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고 존재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은 단멸론자의 전형이다. 반면에 없는 사실을 단지 개념으로 만들어 영원불멸의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 하는 것 또한 영혼불멸론자들의 전형이다. 반면에 연기론은 고도의 사유와 이론적인 근거에 의하여 말하여지고 있다. 재생연결식 또는 심장토대설은 이런 범주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최근에 주장된 내용도 아니고 수천년에 걸쳐서 경전과 아비담마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이런 내용은 인간의 육안이나 인식작용을 넘는다. 오로지 부처님의 혜안으로 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모두다 아비담마를 공부 하면서 알게 된 내용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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