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죄의식, 어떻게 해야 벗어 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9. 6. 14. 12:46

 

 

죄의식, 어떻게 해야 벗어 날 수 있을까

 

 

 

 

 

 

누구나 하나 이상의 죄의식은 가지고 살아 간다고 볼 수 있다. 아내나 남편 또는 자식에게 잘 해 주지 못해서 늘 미안 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자주 찾아 뵙지 못하고 전화 한 통화 제대로 해 주지 못해서 늘 미안 하게 생각 하는 마음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살아 가면서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지은 업 또한 항상 간직 하며 살아 가고 있다.

 

이런 죄의식은 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유일신교 같은 경우가 더 하다. 처음부터 원죄라는 죄를 지었으므로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죄를 씻어 내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 해야 된다고 생각 한다. 한 번이라도 교회를 가지 않거나 그들의 신에게 약속한 일정 금액을 헌금 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유일신교 신자들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들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로 살아 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죄의식에서 해방 되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대자유를 누리면서 걸림 없이 살아 갈 수는 없을까

 

마음이란

 

보통 마음을 이야기 할 때  다음의 세가지의 경우를 말한다.

 

 

(), 찌따(citta)

(), 마노(mano)

(), 윈냐나(vinnana)

 

 

여기서 빨리어 찌따라 불리우는 심은 반드시 마음부수 즉 심소(쩨따시카, cetacika)와 함께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은 절대 혼자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데 그 대상이 선한 것인지 불선한 것인지는 전적으로 마음부수에 달려 있다.  이런 마음부수를 아비담마 에서는 총52가지로 분류 하고 있다. 52가지에서 느낌인 수와 인식의 상을 빼면 50가지가 된다.

 

빨리어 마노라 불리우는 의는 의문인식과정에서 마음이다. 즉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중에 하나가 의인 것이다. 그런데 의를 감각기관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비담마에서는 의도 안이비설신과 같이 감각기관으로 간주 한다. 단지 대상이 법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법은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다. 생각에는 선한 생각도 있을 수 있고 불선한 생각도 있을 수 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나 망념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떠오르는 생각이 마노의 문에 부딪치면 의식이 일어난다. 이때 감각기관으로서의 의식을 순수의문인식이라고 말한다.

 

빨리어 윈냐나라 불리우는 식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오온에서  식의 무더기라는 의미의 식온(윈냐나깐다, vinnana-kkhanda)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용어가 인식과정에서 아는 마음인 의식을 말한다. 이 때 의식은 순수의문전향에서의 의문과 다르다. 대상에 부딪쳤을 때 부딪침을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으로서 전체를 아는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에 부딪쳣을 때 안식 비식 .. 의식이 생기는데 이 때 해당 식을 아는 마음이 식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대상에 부딪쳐 아는 마음이므로 심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느낌이란

 

마음은 심() () () 세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공통적인 사항은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일어 나고, 동시에 두가지 마음이 일어 날 수 없고, 마음은 일어 났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과정을 잘 설명한 것이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났을 때이다. 이 때 접촉 하는 것을  감각접촉이라 하고 빨리어로 팟싸(phassa)’라 한다. 즉 안이비설신의가 여섯가지 감각대상을 만나서 마음이 일어나고 인식 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인식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 나는 것이 느낌이고 감각적 욕망을 유발 한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에는 세가지가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이런 느낌은 매우 생생하다. 안이비설신과 같은 다섯가지 육체적인 감각기관이 느끼는 생새함 못지 않게 정신적 느낌 또한 매우 생생하고 선명하다. 비록 떠오르는 생각에 지날지 않더라도 의문이라는 정신적 감각기관의 문에 부딫쳣을 때 받아들이는 느낌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래서 그런 표상을 떠 올렸을 때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흥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와 같은 감각기관에서 받아들인 색성향미촉법은 필연적으로 느낌을 만들어 낸다. 그런 느낌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다. 이중에서 무덤덤한 느낌을 주목한다.

 

무덤덤한 느낌을 빨리어로 우뻬카 웨다나(upekkha-vedana)라 한다. 우뻬카는 다른 말로 평온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선정수행에서의 우뻬카는  평온이라는 뜻의 좋은 의미로 쓰여 지지만, 욕계에서의 우뻬카는 부정적으로 쓰여 진다.  , 무지의 느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혼침 게으름과 같은 부류로 보는 것이다. 이런 무덤덤한 느낌은 감각접촉과의 부딪침은 있으나 미세해서 표출이 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언제든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즉 알아차림이 없는 무덤덤한 느낌은 불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는 즉시 알아 차려야

 

누구나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죄의식은 느낌이다. 그 느낌은 아마도 무덤덤한 느낌일 것이다. 죄의식을 느끼는 대상에 마음의 문이 부딪치긴 부딪쳣으나 매우 미세해서 표출 되어 있지 않지만 그 대상의 이미지가 강력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혀서 생생하게 다가 온다면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느낌일 뿐이다. 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작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노()와 마노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이 생긴다.

마노()와 마노의 대상()과 의식의 결합에 의해서 감각접촉()이 생기고,

이 감각접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생긴다.

(맛지마 니까야, Madhupindika sutta, M18)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느낌은 자아나 창조주나 우연한 사건과는 무관한, 순전한 원인과 결과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그 어떤 신이 개입했다는 증거도 없고 따라서 신의 은총도 없는 것이다. 또 불보살의 가피도 있을 수 없다. 단지 담마(dhamma)라고 하는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여섯가지 감각대상을 접촉해서 생기는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라는 것도 예의 주시하면 무상하고, 불만족 스럽고, 비실체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알아차려야 된다고 말한다.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는 즉시 알아 차려야 한다.

 

 

보는 즉시 바로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 ‘’ ‘하고 알아 차리는 것이다. 듣는 것 역시 마찬 가지 일 것이다. 들음  들음 들음하면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여섯가지 대상에 부딪쳣을 때 즉시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과 같이

 

어떤 이는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한마디로 줄여서 표현 한다면 알아차림이라고 말하였다. 매순간 지금 여기에서 알아 차리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말은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 다 포함 되어 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 보면 무수한 현상들이 매순간 변화해 가는 과정이다. 그런 수 많은 현상들이 단지 일어 났다 사라지는 과정을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면서 틈만 나면 꺼내 보는 죄의식 또한 무상한 것임에 틀림 없다. 또한 실체가 없을 것이다. 무상하고 실체도 없는 느낌을 가지고 사람들은 괴로워 한다. 그리고 늘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살아 간다.

 

걸림없이 살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수 밖에 없다. 보는 즉시, 듣는 즉시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렇게 그믈에 걸리지 않은 바람과 같이알아차리고 나면 대자유를 누릴 수 있음직 할 것이다.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은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과 같이

물에 젖지 않은 연꽃과 같이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 가거라.

(수따니빠타 71)

 

 

 

 

2009-06-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