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로 지금 여기(딧테와 담메,dittheva dhamme)에서 알아차림을

담마다사 이병욱 2009. 5. 24. 11:08

 

 

바로 지금 여기(딧테와 담메,dittheva dhamme)에서 알아차림을 

 

 

 

 

 

 

 

여기저기에서 자살 소식이 들려 온다. 생활고에 지쳐서 자살하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자살하고, 명예를 잃어서 자살 하고, 모욕을 당해서 자살 하는 등 잊을 만 하면 자살 소식이 뒤 따른다. 더구나 인기 연예인이나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이 자살 하였을 때 사회적인 패닉 현상까지 일어 나기도 한다.

 

고귀하고 소중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게 만들었을까. 자살을 방지 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에 대하여 알아차림의 관점에서 정리 하여 보았다.

 

세가지 고통

 

사람이 다치거나 병이 나거나 정신적으로 고민 하면 고통이 뒤 따른다. 이 때 고통을 느낀다고 하는데 이런 고통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고 들어 올 뿐이다. 이런 고통을 느끼는 데 있어서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맨느낌 느낌이다.

둘째가 육체적 느낌이다.

셋째가 정신적 느낌이다.

 

 

느낌이란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에 접촉하여 육식(六識)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부딪쳣을 때 받아 들이는 느낌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느낀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느낌은 여섯가지 감각의 문에서 모두 일어 난다.

 

이때 제일 처음에 일어나는 느낌이 맨느낌이다. 보통 안이비설 까지를 말하는데 특별한 느낌이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느낌을 말한다. 이 맨 느낌에서 반응한 느낌이 육체적 느낌이다. 여기서 더 반응한 느낌이 정신적 느낌이다.

 

그런데 맨느낌에서 육체적 느낌 즉, 몸으로 느낌이 일어 날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반응이 일어 난다.

 

 

첫째, 즐거운 느낌

둘째, 불쾌한 느낌.

섹째, 즐겁지도 않고 불쾌 하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

 

 

여기에서 덤덤한 느낌을 빨리어로 우빼카 웨다나(Upekkha Vedana’)라 한다. 우빼카는 평정이라는 뜻도 있지만 무관심이라는 뜻도 있다. 이때의 덤덤한 느낌은 평등한 느낌이 아니고 알아차리지 못한 덤덤한 상태를 말하며 이것을 무지한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의 화살을 맞았을 경우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이 형상이나 소리와 같은 감각대상에 부딪쳤을 때의 반응을 보이게 끔 되어 있다. 보통 눈 귀 코 혀로 느끼는 감각은 그리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맨느낌이라 한다.

 

그러나 몸 전체로 느끼는 감각은 매우 강렬하다. 좋고 싫음이 분명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좋으면 감각적 욕망을 자극 하여 거머 쥐려하고, 너무 싫으면 성질을 내며 밀쳐 내려한다.

 

육체적으로 자극을 받았다면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덤덤한 느낌이 세가지 중의 하나 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세가지 느낌은 모두 고통이라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라면 거머 쥐려 하고 오래 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느낌은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고()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자극 받은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덤덤한 느낌은 고일수 밖에 없고, 이런 육체적 고통스런 느낌을 고수(苦受)라 한다.

 

만일 몸에 병이 났거나 누군가로 부터 맞았다면 맨느낌에서 받아 들여지고, 이어서 "아이고! 아프다" 라고 육체적 느낌으로 반응 하게 된다. 이 때 나타나는 불쾌한 육체적인 느낌인 고수에 대하여 보통 1의 화살을 맞았다고 말한다.

 

2의 화살을 맞았을 경우

 

육체적인 느낌에 이어 반응 하는 느낌이 정신적인 느낌이다. 몸에 병이 나서 쑤시고 아프다면 육체적인 불쾌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육체적인 아픔에서 끝나지 않고 "아이고! 아파 죽겠네" 한다면 정신적인 고통을 유발 할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고통을 우수(憂受)라 하고 제2의 화살인 정신적 화살을 맞았다고 한다.

 

1의 화살은 충분히 맞을 수 있다. 보고 듣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이 일어 나는 것은 원인 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날라 오는 것이다. ,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끼는 맨느낌과 몸 전체로 느끼는 육체적인 느낌 그리고 떠 오르는 생각은 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날아 오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을 수 밖에 없듯이 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를 비난 하는 것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첫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화살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3의 화살, 4의 화살을 맞았을 경우

 

사람들은 죽겠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좋아도 죽겠다고 말하고, 싫어도 죽겠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심심해서 죽겠다'고도 말한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덤덤한 느낌이 정신적인 느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서 죽고, 싫어서 죽고, 심심해서 죽는 것이다. 이렇게 죽겠다는 것은 원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좋아서 죽고, 싫어서 죽고, 심심해서 죽는 정신적인 느낌이 계속 되는 현상은 갈애가 있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느낌이 갈애로 증폭 되어 계속 반복 되는 것을 '제3의 화살'을 맞았다고 본다.

 

육체적인 느낌에서 시작 하여 정신적인 느낌으로 옮아 가고,  이런 느낌을 바라고 탐하는 갈애의 단계로 가는 것은 모두 무지에서 기인한다. 이런 무지때문에 맞게 되는 화살이 '제4의 화살'이다. 이렇게  수 없이 화살을 맞게 되면 병이 나거나 죽게 되어 있다.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맨 느낌에서 육체적인 느낌으로 넘어갈 때 이미 반응하여 버린다. 그리고 다시 정신적인 느낌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육체적인 느낌의 영향을 받은 것을, 화살을 한번 맞은 것이라 하였고, 정신적인 느낌으로 발전하면 화살을 두 번 맞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냥 그런 "느낌이 있었다"로 그치면 맨 느낌이지만 "아이고! 아프다" 하면서 육체적 느낌을 갖는다면  화살 한 번 맞은 것이고 "아이고! 아파 죽겠네"하고 정신적인 아픔으로 넘어가면 화살 두 번 맞는 것이다. 이어서 느낌이 갈애로 변하여 지속되고 증폭 된다면 화살을 세번 맞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무지해서 그렇다. 따라서 무지의 화살까지 맞으면 화살을 네번 맞게 되는 것이다.

 

1의 화살은 피 할 수 없다. 누구나 맞게 되어 있다. 몸이 아픈것도 제1의 화살을 맞은 것이고, 비난 받는 것도 제1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제2의 화살, 3의 화살, 4의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다음단계로 넘어 가지 않는다. 육체적 느낌에서 정신적 느낌으로 넘어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아무때나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바로 알아 차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림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서 일어 나는 현상을 그대로 관찰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여기는 빨리어로 딧테와 담메(dittheva dhamme)’라 한다. 한자어로는 이현법중(以現法中) 또는 현금(現今)이라 한다. 직역하면 보여진 현상에서’ ‘지금 여기로 의역 된다. 영어로는 ‘ here and now’라고 옮기고 있다.

 

우리는 매순간 지금 여기를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과거로 미래로 관심을 가져 가고 있다. 불교수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은 바로 지금 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 자신에게서 일어 나는 현상을 법(, dhamma)이라 한다. ‘지금 여기로 옮긴 딧테와 담마(dittheva dhamma)에서 담메는 법이라는 말인데 지금 여기라는 어법 속에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뜻이 다 포함 되어 있다. 나라는 존재를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 보면 그것은 무수한 현상들이 매순간 변화해 가는 과정이다. 이런 수 많은 현상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변화해 가는 나라는 존재를 불교에서는 다섯가지 현상들의 무더기, 즉 오온이라 부른다.

 

관찰 한다는 말은 초기경에서는 위빠사띠(vipassati)로 나타내는데, 그냥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 나는] 현상[]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맛지마 니까야, M143)

 

 

현실을 인정 해야

 

대중의 우상인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자살은 사회적 패닉을 가져 오고 심각한 사회적 우울증을 초래 한다. 따라서 심각한 사회의 병리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알아차림이 없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가 감각적욕망의 추구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으로 볼 수 있는 재욕, 식욕, 색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특히 높이 올라가면 갈 수록 명예욕이 두드러지고 비난과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두번째는  나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유신견(有身見)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나가 있다고 생각 하면 모든 것이 괴롭다. 나가 없다라고 생각 하면 벗어 날 수 있다. 나가 없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느낌이 없고 덤덤한 느낌을 갖는다. 여기서 덤덤한 느낌은 알아차림이 있는 덤덤한 느낌이다.

 

아무리 육체적인 고통이 온다고 해도 고통이 오는 구나하고 알아 차리고, 누군가 비난을 한다면 비난을 하는 구나하고 알아 차리면 그만이다. 육체적인 느낌에서 정신적인 느낌으로 발전 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즉 현실을 인정 해야 한다. 이 모두가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이루어진 과보라 생각 하고 있는 그대로 지켜 보아야 한다. 피치 못하게 제1의 화살은 맞을 수 있지만 알아차림에 의하여 제2의 화살은 맞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비극이 반복 된다고 볼 수 있다.

 

 

 

2009-05-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