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상실의 시대에 왜 연기법 (緣起法)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9. 8. 8. 11:24

 

상실의 시대에 왜 연기법(緣起法)인가

 

 

 

 

 

 

 

쌍용차사태가 노조의 백기투항으로 막을 내렸다. 회사의 일부 고용승계 조건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과연 회사의 말대로 회사가 잘 되면 약속한 대로 복직시켜 줄까. 회사가 어려워 지면 상여금이 지급 되지 않거나 월급이 깍이기 까지 한다. 그럴 때 흔히 사장이 사원들 한테 하는 약속이 있다. 회사가 잘 되면 모두 다 보상해 주겠다고.

 

회사가 잘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생활을 한다.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바친 댓가로 급여를 받는 회사는 큰 회사도 있고 조그마한 회사도 있다. 큰회사와 같은 경우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으나 작은 회사와 같은 경우 안정 되지 않아 수시로 회사를 바꾸게 된다. 그럴 경우 필연적으로 자신의 월급을 깍아서라도 있고 싶어 한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회사라도 일단 정이 들면 애착이 들기 마련이다. 그럴 때 사장으로 부터 듣는 말이 잘 되면 보상해 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약속은 지켜 지지 않는다. 회사가 잘 되기 이전에 먼저 망해 버리기 때문이다.

 

가정주부들이 선호하는 남자의 직업은 무엇일까. 돈을 많이 벌어 줄 것 같은 사업가를 좋아 할 것 같지만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업인을 좋아 한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나와야 계획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업가들은 한방이 있지만 그 한방을 터 트리기 전에는 수입이 없으므로 계획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작고 보잘 것 없는 회사라도 월급만 꼬박꼬박 나오면 그 쪽이 더 낮다는 것이다.

 

보상개념과 보험개념

 

미래는 어떻게 전개 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게 된다. 가능한 많이 돈을 모아서 은퇴하게 되었을 때 여생을 죽을 때 까지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그런 꿈을 만족시켜 주는 직장은 단연 공무원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정년까지 보장 되고, 정년 퇴직을 하게 되면 연금이 나와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제도는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공무원 자신들이 그런 제도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현직에 있을 때 아예 노후 대책까지 마련해 놓은 것이다. 법과 제도을 만들어 완벽한 복지시스템을 구현해 놓은 것이다.

 

즉 적게 내고 많이 타가는 시스템이다. 공무원연금이 국민연금과 비교하여 2.5배정도 더 타가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를 대기도 한다. 즉, 공무원은 선발된 특수신분으로서 공익을 위해서 일을 했기 때문이고 또 현직에 있을 때 투잡(Two Job)’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차별화 하였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사망하면 직계 가족이 연금의 60%를 타게끔 되어 있다. 일종의 유산개념이라 볼 수 있다.

 

한번 공무원이면 늙어 죽을 때 까지 복지 혜택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유산을 남겨 주니 대한민국에서 젋은이들이 공무원으로 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한 표현이 있다.

 

 

공무원연금은 보상개념이고, 국민연금은 보험개념이다.

 

 

이 말은 어느 라디오 프로에서 공무원 연금 고위 담당자가 실제로 한 말이다.

 

공무원들만이 이런 혜택을 받고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힘이 있고 많이 가진 사람들 역시 법과 제도로서 보호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어렵게 확보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무리함을 무릅쓰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때로는 날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타협하기 까지 하면서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것도 현직에 있을 때, 정권을 잡았을 때 해치우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올라간 집값은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 되고, 국토는 계속 개발 되어야 한다.

 

 

종교인의 겁주기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 하기 위하여 계속 확장 하고 성장 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 하다. 그러다 보니 돈을 많이 내는 사람들 위주로 흘러 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벌고 세속적인 성공을 한 사람들이 복을 많이 받은 것처럼 이야기 한다. 보시나 헌금을 하면 그 복이 천배’ ‘만배가 되어서 되돌아 온다는 식의 이야기는 자주 듣는다.

 

또 종교인들은 겁주기도 잘 한다. 아마 이런 겁주기는 유일신교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종교단체에 자주 나오지 않으면 마치 벌을 받을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고 헌금을 자주 하지 않으면 또한 벌을 받을 것 같이 이야기 한다. 이러다 보니 한 번 그 종교를 믿다가 믿지 않는 다거나 개종을 할 경우 엄청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유일신교 신자의 대부분이 가슴에 커다란 멍에를 앉고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겁주기가 유일신교에만 있을까 불교에서도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말하고 있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스님들이나 신자들은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들어서 말하기를 좋아 한다. 금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如來悉知悉見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여래실지실견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금강경에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는 말은 세 번 나온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겁주기에 사용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절대자가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알고 있다라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여서 이를 악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심히 보시를 하면 부처님이 다 보고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큰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반면에 보시를 게을리 하거나 자주 나오지 않게 되면 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법문을 하면서 사찰을 유지 하려 한다면 유일신교의 그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그 것도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타력적인 요소를 강조 하였을 때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이 기득권을 유지 하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큰 사찰의 법회의식이나 법문을 보면 유일신교의 그것을 꼭 빼다 박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다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이 들어갈 자리에 유일신교의 절대자의 이름이 들어가게 된다면 구별 할 수 있을까.

 

2,500년전 인도에서도

 

공무원이 되어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고 죽을때 까지 복지 혜택이 주어지는 사람, 한번 올라간 아파트 값이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갖은 처방을 고려 하면서 기득권을 유지 하려는 사람, 교주가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다고 겁주기를 하면서 권위를 유지 하려는 사람들은 이 땅의 기득권층이다.

 

이들은 이들끼리 리그를 만들어 같은 동네에 살 뿐만 아니라 학교도 따로 만든다. 마치 커다란 복을 타고 난 사람들 마냥 현재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유지 하려 한다. 반면에 여기에 들어 가지 못한 사람들은 숙명처럼 받아 들이고 따르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들을 떠 받치고 살고 있고 이들이 흘린 것을 받아 먹고 살아 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저항을 하게 되면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 하에 사회에서 격리시키려 한다. 그들은 지금 이대로가 좋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영원히지속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500년전 인도에서도 현재와 같은 상황이 있었다. 바라문이라는 기득권층과 운명론적으로 살아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 그 때 당시 유행하였던 사상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마성스님의 글을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이다. 자재화작인설은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통 바라문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 등의 최고신이 화작창조(化作創造)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된다. 세상의 일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숙작인설이다. 숙작인설(宿作因說)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행복과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리가 과거세에서 행한 선(), 악업(惡業)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며,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운명은 전세(前世)의 업의 결과로서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위를 하고 노력을 기울여도 그것은 내세의 운명을 규정하는 원인을 될 수 있을지언정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일종의 숙명론이다.

 

셋째로 무인무연론이다. 우연인설(偶然因說)은 무인무연(無因無緣)설이라고도 하는데, 이 설에 의하면 사회, 인생의 운명은 인과업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길흉화복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재화작인설은 오늘날의 종교인과 기득권층에게 해당 될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를 기정 사실화 하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보호 받고자 하는 것이다.

 

숙작인설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마성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우리나라 국민의 삼분의 일(1/3)은 운명론적이라고 한다. 그 예로 점집을 들고 있다. 신문을 보면 한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사주관상을 봐주는 운명감정소이다. 이와 같이 관상이나 점을 봐주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백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에 철학관이나 무속으로 생활을 영위 하는 사람들도 3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국민의 삼분의일인 1,500만명이 이들의 고객이라고 볼 수 있다.

 

무인무연설을 믿는 사람들 역시 상당하다고 한다. 지구상의 십분의일(1/10) 정도로 보고 있다. 먹고 즐기고 쾌락적으로 사는 유물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막가파등과 같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밤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역시 이 범주 안에 들어 갈 것이다.

 

부처님은 위대한 혁명가

 

이와 같은 사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배척하고 철저히 비판 하였다. 어떻게 비판 하였을까 바로 연기법으로 비판 한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연기법이라는 지혜의 칼로 베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즉, 연기법으로 보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신이 창조 한 것도 아니고, 과거에 지은 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업을 창조해 갈 수 있기 때문에 숙명론도 아니고, 한번 죽으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에 우연론도 아니라고 비판 하였다.

 

이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부처님은 계시지 않지만 부처님이 말한 법은 존재 하고 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한 알의 모래알에 지나지 않은 미천한 존재일지라도 부처님의 법을 보면 어떤 희망의 메세지를 읽는 것 같다.

 

 

 

2009-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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