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세상 예토(穢土)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과 참회가
흔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娑婆世界) ’라고 한다. 어떤 이는 우스개 소리로 사바세계는 ‘사바 사바 해 가며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사바세계의 의미는 무엇일까.
더러운 세상, 예토(穢土)
사바세계는 산스끄리뜨어 ‘사하(saha)’를 음역한 것이다. 이를 의역하면 감인토(堪忍土) 또는 인토(忍土)가 된다. 인내를 강요 당하는 세계, 인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을 말하는데, 탐진치의 번뇌를 겪어야 하고 오온으로 비롯된 모든 고통을 참고 살수 밖에 없는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사바세계라고 말하고 교화해야 될 세상이라고 말하였다.
사바세계와 유사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가 또 예토(穢土)이다. 여기서 한자어 예(穢)자는 ‘더러울 예’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중생들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절어 사는 세상을 더러운 세상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예토와 반대 되는 세상도 분명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세상은 정토(淨土)이다.
정토는 ‘깨끗한 세상’이라는 뜻이다. 흔히 말하는 서방정토 할 때의 그 정토가 깨끗한 세상이고 즐거움만 있는 ‘극락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불자들은 더러운 이 세상을 벗어나 즐거움만 가득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 실재로 아미타부처가 사는 정토가 따로 존재 할까. 이에 대하여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정토는 존재 하지 않지만 마음을 청정하게 닦으면 바로 그 곳이 정토라는 견해도 있다.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
사람들은 한시도 이 세상을 떠나 살 수 없다. 일단 태어난 이상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살아 가야만 한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면서 하루 하루 살아 가면서 먹고 마시고 싸는 일을 반복한다. 또 생존하기 위하여 벌이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온 갖 업을 짖고 살아 간다. 매 순간 업을 짖고 일생동안 지은 업을 쌓아 놓는 다면 아마도 수미산보다도 더 높을 것이다.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당면한 가장 큰 고민은 타인들과의 갈등이다. 그 것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갈등이 대부분이다. 행복해야 될 삶이 서로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 같이 보여도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말 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고민과 갈등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즉문즉설’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법륜스님이 진행 하는 불교TV의 즉문즉설을 보면 인간적인 갈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치 원수처럼 말하는 ‘그 인간’은 다름 아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인간은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아내가 될 수도 있고, 자식일 수 도 있고, 시어머니일 수 도 있고, 며느리 일 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적인 갈등은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고 마치 원수처럼 하루 하루를 살아 가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부부나 자식과의 인연은 과거생에 서로 ‘원수’ 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인연이라는 것이 가장 영향을 깊게 주고 받은 사이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 만치 맺힌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말로 표현 하면 한이 많은 것이다. 한을 품고 죽었기 때문에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다시 만나지 않으려면 맺힌 것이 없어야 하고 한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런 점을 법륜 스님은 이야기 한다.
즉문즉설시간에 나온 이야기를 보면
즉문즉설시간에 나오는 여러가지 주제에 대한 즉문에 대한 즉설은 한 마디로 ‘그대로 내버려 둬라’는 것으로 들렸다. 나의 생각을 강요 하거나 ‘내 뜻대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서로의 생각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줄’ 알고 ‘그렇구나’ ‘그렇네’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둔다면 상대방을 자극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상대방을 인정 하고 들어 가는 것이다. 무엇을 인정 한다는 것일까.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인정 한다는 것이다. 더 넓게는 과거생으로부터 축적된 성향이나 기질을 인정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김새를 바꿀 수 없듯이 축적된 성향이나 기질을 결코 내 뜻대로 바꿀 수 없다. 또 그렇게 강요 해서도 안 된다. 남편이나 아내는 물론 자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의 경우 ‘일심동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결코 일심동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과 아내는 ‘이심이체’이기 때문이다. 서로 동등한 인격체가 서로 50%의 지분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 부부이다. 이런 지분이 한 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그 인간’ 소리를 듣는 다는 것이다.
부부간의 갈등이 일어 났을 때 어떤 이는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 것도 저명한 교수나 심지어 스님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즉문즉설시간에 보는 스님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자신부터 변화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자신은 변할 생각이 없이 상대방의 변화만 강요한 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런 류의 지적은 수행처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수행처에서도
수행처에서 좌선이 끝나면 인터뷰시간이 있다. 주로 좌선중에 있었던 느낌이나 체험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에 대하여 질문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지도법사는 카운슬러 역할까지 해야 한다.
지도법사가 하는 이야기는 상대방에게 대꾸하지 말라고 한다. 상대방의 축적된 성향은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인정을 하라는 것이다. 바꾸려고 하다가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면적으로 더욱 더 성숙해졌을 때 상대방이 감화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말한다. 이와 같이 법사들은 인생상담까지 해 낼 정도의 인품과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법륜스님이나 지도법사의 이야기나 공통점은 철저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살아온 과정, 즉 축적된 성향을 인정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더 성숙 시키라고 말한다. 이런 법문이 ‘살아 있는 법문’이다.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이 더러운 세상인 예토에 이런 법문을 해 줄 사람이 많아 져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법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개신교만도 못한 사회적 신뢰수준
법보시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작 법을 들을 수 있는 곳은 동네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역할을 동네에 널려 있는 교회가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설교라는 ‘법보시’ 뿐만 아니라 유치원을 만들고, 청소년 공부방을 비롯하여 심지어 경로당까지 지어 철저하게 지역민을 위하여 ‘봉사 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일까 최근 기독교단체에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면 종교별 신뢰도 순위도 가톨릭>개신교>불교로 바뀌었다(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4683&thread=23r03).
불교가 개신교 보다 사회적 신뢰수준이 더 못한 것으로 나온 것이다. 개신교 단체에서 설문하여 나온 결과라고 하지만 종전에는 가톨릭 다음으로 불교가 뒤를 이었고, 그 다음에 개신교 이었던 것에 비하면 ‘충격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개신교의 신뢰도가 올라간 이유는 그들의 사회에 대한 봉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교는 사회적으로 기여 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당장 동네를 보아도 교회는 널려 있지만 사찰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가 산중에만 있지 사람 사는 곳에 불교가 없다 보니 개신교만도 못한 사회적 신뢰수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효스님의 말년의 이야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법회는 오래 되었다. 불교TV가 아닌 인터넷으로 이미2005년에 접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시작한 시기인 2002년에 만들어진 즉문즉설 역시 TV에서 보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인터넷에 즉문즉설 못지 않게 반야심경과 금강경 강의 시리즈도 매우 인기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금강경 강의 중에 원효스님 이야기가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원효스님의 말년의 이야기이다. 스님이 말하기를 원효스님이 민중을 교화 하기 위하여 민중속으로 들어 갔는데 그 후에 어느 누구도 원효스님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유명한 스님이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 것은 다름아닌 원효라는 이름의 스님으로 삶을 살아 간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갔기 때문에 원효라는 이름은 더 이상 존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중생이 되어 민중 속으로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아예 중생이 되어서 죽지 못해서 살아 가는 중생과 함께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효스님의 말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승도 아닌 일승(一乘)이라고
우리가 살아 가는 세상은 오염원으로 가득찬 더러운 세상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죽지 못해서 살아 가는 세상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갈등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럴 때 말 한마디의 위력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장엄 하여 보시 한다고 해도 금강경 사구게 하나 보다 못하다’는 법보시 못지 않게 크다. 그만치 부처님 법에 목 말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산좋고 물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혼자만의 삼매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면 소승도 아닌 일승(一乘)이라고 불러야 마땅 할 것이다. 동네에 교회는 널려 있는데 사찰 구경하기 힘든 세상에 원효스님과 같은 선지식은 언제 나올까.
참회가(懺悔歌, Buddhist song-Song of Repentance)
음성
1)mp3 忏悔歌
2)http://zj.voc.com.cn/...%BB%DA%B8%E8.mp3
3)http://www.nhcs.cn/..._6703/200810/忏悔歌.mp3
참회가(懺悔歌)가사
我们一起来忏悔
远离那世间是与非
我们现在来忏悔
放下烦恼与怨恨嗔恚
我们用心来忏悔
愿弥陀擦掉我的泪
我们真心来忏悔
愿弥陀洗涤我心扉
往昔所做诸恶罪
皆因贪嗔痴所累
我今皆忏悔
不愿再违背
弥陀无怨无私的教诲
不管身心有多疲备
求生净土愿不退
我今皆忏悔
念佛不怕累
断烦恼
弥陀永相随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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