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초월과 지배 및 초탈과 자비, 에로스와 파라미타로 본 동서양의 진리는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1. 26. 11:14

 

초월과 지배 및 초탈과 자비, 에로스와 파라미타로 본 동서양의 진리는

 

 

 

 

 

 

 

작년 촛불집회가 한창 일 때 청와대의 어느 비서관이 사탄의 무리 운운 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런 발언이 우연히 나왔다고 볼 수 있을까.

 

정권이 바뀌고 나서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섰는데 대부분 기독교인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으면 모두 악의 세력으로 규정 하고 쳐내야 할 사탄의 세력으로 간주 하였던 것이다. 그런 현상은 촛불집회의 무자비한 탄압과 용산참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자신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계층에 대하여 한 없이 관대하다. 종부세를 면제 하여 준다든가 세종시를 용도 변경 하고 국민들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강행 하는 것은 위만 챙겨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선악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하였을까. 불교TV에서 종욱 교수의 강의(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5&PID=P509&DPID=45980)를 통하여 그들의 철학적인 배경을 알 수 있었다.

 

서양철학에서 에로스란

 

서양철학의 원류는 그리스이다. 그리스에서 철학에서 사용 되고 있는 용어 중에 에로스(Eros)가 있다. 에로스 하면 먼저 에로영화가 떠 오르듯이 이 용어는 사랑과 생식과도 관계가 있다. 유한한 생명체에 있어서 생식을 통하여 자손을 남기고자 하는 바램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철학적인 용어로 사용 되었을 때는  불멸을 향한 초월적 충동이라고 한다. 항상 변하고 소멸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죽지 않고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오래도록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서양에서 이를 철학적 용어로 에로스 충동이라고 하였다.

 

영원히 변치 않고 소멸하지 않고 시간을 초월 하여 존재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서양에서는 그 것를 진리라고 말한다. 또 그 것을 선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 바 진선미(眞善美)를 말한다. 이런 진선미를 종교적으로 보면 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진선미를 추구 하다 보면 그 반대 개념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진리의 반대 개념은 거짓이다. 선의 반대는 악이고, 미의 반대 개념은 추함이다. 이렇게 진선미를 추구 하면 할수록 위악추(僞惡醜)는 멀리해야 할 것 또는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현상

많음

가변

ß지배

에로스

à초월

불변

하나

본질

감성

차이

가멸

불멸

동일

이성

물질

특수

가사

불사

보편

정신

 

 

왜 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월지배이다. 현재의 변덕스럽고 더럽고 악하고 거짓투성이의 세계에서 불변하고 불멸하는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이상적인 세계를 가고자 하는 것이 에로스충동인 초월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거짓된 것, 악한 것, 추한 것은 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에 초월자의 지배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 시대에 따라 초월자와 같은 동일성의 개념은 바뀌었다.

 

 

첫째, 고대적 동일성이다. 이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이데아는 하나의 원형으로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원본같은 것이다.

 

둘째, 중세적 동일성이다.  중세로 넘어 오면서 이데아가 ()’으로 대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일상의 변화무쌍한 현상을 초월하여 완전한 신의 세계로 가고자 하였으나 반대급부로 신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셋째, 근대적 동일성이다. 근대로 넘어 오면서 중세의 신대신자아를 동일성으로 본 것이다. 이 자아는 영원불변하고 불멸하는 나라고 볼 수 있다. 즉 나 안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불변 하는 신과 같은 것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서영철학에 있어서 에로스란 현실의 변화를 부정 하고, 불멸을 바라면서 죽음을 극복 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던 것이다.

 

불교에서 파라미타란

 

이에 반하여 불교에서는 생사를 초탈하는 욕망을 바랐다. 이런 욕망을 바라밀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파라미타(Paramita)이다.   파라미타는 서양철학의 에로스와 대비 되는 말이다. 파라미타의 어원을 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완성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최상이라는 뜻의 parama가 여성형인 parami 로 변하고 거기에 ta가 붙으면 추상명사가 되어 완성이라는 뜻이 된다.

 

둘째, ‘도피안이라는 의미 이다. 저곳 이라는 para가다라는 mi와 명사형 ta가 붙어서 저곳에 도달함의 뜻인 도피안이 된다.

 

 

파라미타는 어원적으로 보았을 때 완성이라는 뜻이 정확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였을 때 이를 해석한다면 지혜의 완성이 될 것이다.

 

에로스가 현실의 가변(可變) 가멸(可滅) 가사(可死)의 세계에서 불변(不變) 불멸(不滅) 불사(不死)로의 초월적 욕망을 말하지만, 불교에 있어서 파라미타는 현실의 생멸과 생사를 넘어 불생불멸 하고 열반을 향한 초월적 해탈을 추구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생멸

ß자비

파라미타

초탈à

불생불멸

생사

열반

윤회

해탈

중생

부처

 

 

불교에서의 파라미타는 생멸하고 생사 윤회 하는 중생으로부터 불생불멸의열반의 경지로 초월해탈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바램이다.

 

현실에서 이상으로 추구 하는 목적에 있어서 에로스와 파리미타는 같지만 가장 큰 차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갔을 때 이다. 즉 이상에서 현실로 보았을 때 에로스의 경우 지배로 나타나지만 파라미타의 경우는 자비로 실현 된 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배자비가 서양철학과  불교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선악이분법적 개념 때문에

 

서양철학에 있어서 지배는 진선미에 반대 되는 개념인 위악추를 멀리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을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목표로 삼는 다면 그 반대 개념인 악()은 소멸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선에 의한 악의 지배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무장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선악 이분법적인 논리로 인하여 항상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였고,  기독교의 역사 이래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몇 년전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국가를 악의 축으로 규정 하고, 악을 응징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 하겠다고 선언 하였다. 그런데 악의 축으로 규정된 나라들이 자신들을 순순히 악당으로 생각 하였을까. 거꾸로 그 나라들이 미국을 악의 축으로 생각 하였을지 모른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미국과의 전쟁은 악을 응징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전쟁의 성격은 선과 악으로 전쟁이 아니라 선과 선의 전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불교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개념이 없다. 왜냐 하면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사물을 분별한다면 반드시 좋고 나쁜 것을 취사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분별 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개념이 나타날 리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파라미타는 현실의 집착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세계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사람의 생멸을 포함하여 모든 현상을  연기(緣起)로 보았기 때문에 불생불멸로 생각 한 것이다. , 항상 그러 그러 하게 흘러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그러 하다는 것을 한자어로 여여(如如)하다라고 말한다. 여여는 변함 없음 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안녕하십니까 또는 별고 없습니까 라는 말 대신에 불자라면 여여하십니까 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한다.

 

진리가 다양하다는 것은

 

사물과 현상에 대하여 분별하여 보면 선악이분법적 사고에 빠질 수 있고 필연적으로 진리 또한 하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진리는 오로지 하나이다. 진리가 하나라면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도 기독교라는 잣대로 보았을 때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쳐서 없애 버려 할 악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진리는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는 둘이 될 수 있고, 셋이 될 수 있고, 넷이 될 수 있다. 진리가 둘인 이제(二諦)의 경우는 진제(眞諦)’속제(俗諦)’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진리는 진리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속세도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또 삼제(三諦)의 경우 공가중(空假中)’을 들 수 있다. 사제(四諦)의 경우는 너무나 유명한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에서 뿐만 아니라 도 진리로 간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진리는 속세도 진리가 될 수 있고, 공 뿐만 아니라 가도 진리가 될 수 있고, 고와 집도 진리가 될 수 있어서 진리가 반드시 하나로 고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리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선악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가 다양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진리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라고 볼 수 있다. 가운데 길을 간다거나 회색분자로서의 중도가 아니라, 진리가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진리의 다양성을 인정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상이 부처의 중생에 대한 자비로 나타난다.

 

초월과 지배, 초탈과 자비

 

서양철학의 에로스는 현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의 바램이 결국은 신에의하여 선악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불교의 경우 파라미타는 현상을 초탈하고자 하는 욕망의 바램이 결과적으로 현실에 대하여 부처의 자비로 구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불교가 미래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장점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09-11-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