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心)의(意)식(識)은 어떻게 다른가, 링커로서의 마노(mano)의 역할은
좌선을 하다 보면
좌선을 하다 보면 다리가 저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좌선을 처음 시작 했을 때 다리가 저리는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 다리를 이렇게도 바꾸어 보고 저렇게도 바꾸어 보지만 다리저리는 고통은 좀처럼 해결 되지 않는다.
이 때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평좌(平坐)이다. 보통 가부좌를 튼다고 하는데 결가부좌 보다 ‘반가부좌’가 보통이다. 오른쪽 발위에 왼쪽 발을 얹어 놓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수행처에서는 반가부좌보다 ‘평가부좌’를 권한다. 다리저림이나 아픔이 덜 하기 때문이다.
평가부좌 방법은 반가부좌와 비슷하지만 오른쪽 발을 왼발 위에 올려 놓지 않고 바닥에 놓는 것을 말한다. 발이 포개져 있지 않고 두발 모두 바닥에 닿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상태에서 두 발을 바싹 당기면 삼각대가 형성 되어 안정화 된다. 이렇게 있어도 발이 저려오는 현상은 사람에 따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여겨진다.
발이 저려 올 때
발이 저려 올 때 이를 받아 들이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첫번째 방법은 ‘발저림을 느끼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관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화두’라고 볼 수 있다. 발저림을 느끼는 나는 누구이고 그 누구는 누구인가 하고 자꾸 묻고 들어 가다 보면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북방대승불교의 간화선 방식이라 볼 수 있다.
두번째 방법은 발이 저렸을 때 그저 “발저림 발저림”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다. 거기에 그 어떤 생각도 개입하지 않고 물끄러미 지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발저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남방 상좌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발저림 하나만 놓고 보았을 때 북방과 남방의 불교에서 이를 대처 하는 방식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마음은 만능일까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유일신교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고 있듯이 불교 또한 모든 것을 ‘마음’으로 돌린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이 된다’든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든가 하는 ‘마음 만능주의’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잘 설명 되고 있다. 또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더 실감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어떤 마음이 있는 것처럼 생각 되고 그 마음이 곧 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즉 마음 하면 곧 나라는 등식이 성립 될 정도로 마음과 나는 하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초기불교를 접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깨진다.
마음을 알고 나서
불교관련 인터넷매체에서 읽은 기사 내용중에 ‘도이거사의 미얀마 수행기(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3567&thread=23)’가 있다. 이 기사에서 도이거사는 하나의 커다란 사실을 알고 춤을 추듯이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번뇌망상이 손님으로 오면 ‘망상’이라고 알아차리면 믿지 못하겠끔 곧 사라진다. 그것은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알아차림 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면 앞서 일어났든 괴로움이나 번뇌망상은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본성품과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法說)이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법열을 느꼈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느껴왔었던 숱한 의문점을 일거에 해결 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쓰여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 전까지 숱하게 선지직을 찾아 다니고 수행하여 보았지만 의문에 대한 뚜렸한 해결책을 발견 하지 못하였다고 또한 기술하고 있다.
각묵스님 또한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공부가 급진전되었음을 자신의 영상강의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매우 단순 하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풀려 나갔다고 말한다. 도이거사나 각묵스님이 알게 된 마음의 법칙은 남방 상좌불교에서는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 한다. 초기경전에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고 또한 아비담마에 아주 상세히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지도, 아비담마
최근에 초기불교의 경장인 니까야와 논장인 아비담마, 청정도론등이 한글로 번역 되어 나오면서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주석서인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보면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매우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아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일종의 마음의 지도라고 볼 수 있는 ‘마음의 도표’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 가면서 내는 마음의 종류를 도표화 해 놓은 것이다! 또한 마음을 내게 하는 여러 심리현상들 또한 도표로 보여 주고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사항에 대하여 표를 그려서 설명하고 있다.
도표화 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라든가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는 불교와 너무나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북방대승불교에서도 ‘아비다르마 구사론’ 같은 논서에 아비담마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들을 교육 하는 승가대학에서도 이런 논서는 가르치지 않고 여래장 계열의 경전 위주로 하다 보니 마음만능주의가 나올 수 있지 않았나도 생각해 본다. 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 보다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종의 직관적이고 초논리적인 간화선의 영향도 컷을 것이라 생각 한다.
마음이란
초기불교의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의 개념은 무엇 일까. 한마디로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한 곳에 고정 되어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짐을 반복 한다는 것이다. 이를 몇가지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둘째,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셋째,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일 밖에 하지 못한다.
넷째,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제멋대로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상과 마주 쳤을 때 만이 마음이 일어 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무엇일까. 바로 색성향미촉법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가 감각대상인 색성향미촉법과 부딪쳤을 때 비로소 마음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意)는 보통 빠알리어로 ‘마노(mano)’라고 하는데 마음을 말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음을 분류 하면 89가지가 된다. 89가지 마음은 52가지 마음부수라는 심리현상의 도움으로 89가지의 독특한 마음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마음(선심)도 있고, 해로운 마음(불선심)도 있는가 하면 과보의 마음(과보심)도 있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작용심)도 있다.
불교는 물론이고 타 종교에서도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모든 심리현상을 마음 하나로 뭉뚱그려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초기불교의 논서인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마음은 보통 한자어
첫째, 의와 식을 아우르는 심(心)이다.
빠알리어로 찌따(citta)라 하고 ‘마음’으로 옮긴다.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의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런데 아비담마에서 사용 되는 찌따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nana)를 다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쓰인다. 영어도 mind, consciousness, state of consciousness등 다양하게 사용 된다.
둘째, 링커로서의 의(意)이다.
빠알리어로 마노(mano)라고 한다.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능(根,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處, ayatana)의 개념으로만 사용한다. 즉 ‘안이비설신의’ 할 때의 ‘의(意)’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러나 한자의 번역어인 뜻의(意)자와 마노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따라서 이 경우만큼은 원어인 ‘마노’로 불러야 올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의문인식단계에서 의문(意門)이라고 하지만 ‘마노의 문’이라고 빠알리어로 써야 뜻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의문인식과정을 포함한 안문 이문등 오문(五門)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과정후에 받아들여져 아는 마음이 마노이다. 따라서 마노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아는 마음을 마노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이나 색깔(色)이라는 대상에 대한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나고 귀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라는 대상에 대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나듯이 마노(mano)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마노(의)는 정신적인 대상을 아는 감각장소 혹은 기능이라는 것이다. 눈귀코혀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노(의)는 ‘정신적인 감각장소’인 것이다. 그래서 마노를 마음(심)의 영역에 포함 시키는 것이다.
마노의 역할에 대하여 링크로 표현 하기도 한다. 특히 인식과정에 있어서 그 역할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축구 선수 ‘
마치
글을 보면 마노는 두가지의 링크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감각대상과
이와 같이 마노는 오로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에 적용되는 용어로 사용 되기 때문에 찌따(citta)와 사용처가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어로 표현할 때 mind라 한다.
또 마노를 유식과 대비 하여 설명 한다면 제7식인 말나식에 해당 될 것이다.
아비담마 -------------- 유식
==================================
제육식(의식) --------- 제육식(의식)
마노(의) ------------- 말라식(마노 나마 윈냐나)
바왕가(유분) --------- 아뢰야식
(출처; http://cafe.daum.net/chobul, 화두와 알음알이)
셋째, 알음알이로서의 식(識)이다.
빠알리어로 윈냐나(winnana)라 한다. 식은 여섯감각기관(육근)이나 감각장소(육처)가 그 감각대상(육경)과 부딪쳐서 일어 났을 때 일어나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등 여섯가지 ‘알음알이’를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윈냐나는 대상을 접했을 때 ‘대상이 있음을 아는 알음알이’로서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과 매 순간 순간 맞닿을 때마다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하는 ‘순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 윈냐나는 알아진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가 매순간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낸것이라 볼 수 있다.
오온에서 말하는 색수상행식 할 때의 식(識) 역시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 매순간 변화 해 가는 알음알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대상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 하여 취착하게 되면 괴로움(苦, dukkha)을 가져다 줄 뿐이며, 그러므로 나라고 내세울 아무런 실체가 없음(無我, anatta)을 통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표현 하는데 있어서 세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심(찌따)과 의(마노)와 식(윈냐나)은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찌따와 윈냐나는 구분 없이 사용 하고 있고, 다만 마노는 감각기관과 관련해서만 사용 되는 것이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는
그 외의 마음을 보면
다음으로 마음과 비슷한 개념인 마음부수와 정신이 있다.
첫째, 마음과 함께 하는 마음부수이다.
마음부수를 빠알리어로 쩨따시까(cetasika)라 한다. 마음부수를 다른 말로 심소 또는 심리현상, 마음의 작용이라고도 한다.
마음부수는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도와 주는 임무를 맡고 있다. 또 마음부수는 마음 없이는 절대로 일어 날 수 없고, 마음 또한 마음부수의 도움 없이 절대로 단독으로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과 마음부수는 상호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으로 간주 한다. 마음부수의 역할은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마음 부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첫째,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phassa)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 느낌(vedanā)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sannā)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넷째, 의도(cetanā)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작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 집중(ekaggatā)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떤 정도의 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알지 못한다.
여섯째, 생명기능(jīvitindriya)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즉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여기에 언급된 마음부수는 감각접촉, 느낌, 인식, 의도, 집중, 생명기능, 마음에 잡도리함등 7가지가 선 보였다.
이 일곱가지 마음부수는 총 52가지 마음부수 중에 ‘같아지는’ 마음부수 일곱가지이다. 나머지 해로운 마움부수가 개입되면 당연히 해로운 마음(불선심)이 일어날 것이고, 반대로 아름다운 마움부수가 함께 하면 아름다운 마음(선심)이 일어 날 것이다.
둘째, 오온으로서의 정신이다.
한자어 명(名)으로 쓰이고 빠알리어로 나마(nama)라 한다. 나마는 보통 ‘색수상상행식’의 오온에서 쓰여질 때 색을 제외한 ‘수상행식’ 네가지를 지칭할 때를 말한다. 즉 물질-정신에 있어서 정신영역에 속하는 요소인 ‘수상행식’이 나마인 것이다.
또 나마가 12연기에서 ‘명색(나마루빠, nama-rupa)’으로 사용 될 때는 식이 빠진 ‘수상행’ 세가지를 말한다. 12연기에서 식과 명색은 ‘식연명색’ 또는 ‘명색연육입’ 의 구조로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여 주는 상호연(相互緣)으로 설명된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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