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교적 믿음이란, 초인적 부처님(佛)과 해방자 붓다(Buddha)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11. 15:00

 

 

불교적 믿음이란, 초인적 부처님()과 해방자 붓다(Buddha)

 

 

 

 

 

 

 

 

 

교회가 하나 있는데

 

수도권의 도시에서 교회를 보는 것은 수퍼마켓을 보는 것 보다 더 쉽다. 불과 몇십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교회는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까지, 상가에 세들어 있는 교회에서 부터 멋지고 크고 웅장한 단독건물의 중대형 교회까지 매우 다양하다.

 

사무실 바로 근처에도 교회가 하나 있는데 주차시설이 잘 갖추어진 단독 건물로 되어 있는 중급교회이다. 그런데 이 교회의 행사 안내 플레카드를 보면 연중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각종 바자회에서 부터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 심지어 미용강습에 이르기까지 사시사철 주민들을 위한 봉사와 행사가 끊임 없이 계속 된다. 그런 행사중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연예인들의 간증회일 것이다.

 

일석3조의 역할

 

간증이란 자신의 종교적 채험을 고백함으로써 그들 신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이다. 주로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우 유명연예인이나 유명 체육인들이 자주 간증회에 참여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에 유포 되고 있는 간증동영상을 보면 잘 나가는 텔런트, 가수, 개그맨등 매우 다양하다. 또한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연예인들도 간증동영상에 나오는데 그 때마다 놀라는 것은 저 사람도 기독인이었나?”라는 것이다.

 

우라나라 연예인들의 70%가량은 기독인이라 한다. 이렇게 인적자원이 풍부하다 보니 기독교에서는 이들을 선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전국에 걸친 교회를 대상으로 이들은 간증회를 갖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을 알리는 수단이 될 뿐만아니라 선교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어서 일석3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간증동영상을 만들어 유포하고 각 교회마다 간증회를 하는 것은 이들 연예인들과 체육인들을 우상으로 떠 받들어지는 아이돌스타(Idol Star)’로 간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연예들을 앞세워 간증회를 개최하는 것은 교회의 주요 선교전략 중의 하나이다.

 

불자출신 연예인들

 

불교에서도 불자출신 연예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그 수가 적은 것이다. 설령 자신이 불자출신 연예인이라고 할지라도 노출을 시키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출신 연예인들이 다수이고 각종 방송매체의 의사결정권자가 기독교인 출신이 다수인 상황에서 자신이 불자임을 노출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불자출신 가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불자출신임을 말하는 순간 6개월 이내에 소리 소문없이 퇴출당하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이 불자임을 당당히 밝히고 열심히 신행생활을 하는 연예인들이 있다.

 

텔런트, 가수, 개그맨들과 같이 연예인을 앞세워 포교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다. 그래서 매년 시행 되고 있는 불자대상에 유명연예인이나 유명 체육인들을 선정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명인들이 불교tv나 불교방송에 자주 출연하여 자신의 신행생활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들 연예인들이 법상에 서는 경우도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와 같이 연예인들도 하나의 선지식으로 간주 하여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생각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법상에 설 때도 스님들이 법상에 서는 것과 똑같이 청법가를 불러 준다.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제가 많이 울었죠

 

 

그런 연예인중에 중견 텔런트가 법상에서 법문하는 것을 보았다. 서울 중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절이라는 동국대 내에 있는 정각원에서의 법회이다. 교계인터넷신문에 올려져 있는 토요법회에서의 중견 텔런트의 법문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제가 많이 울었죠. 천수경 외고, 염불 잘 하고, 부처님께 부탁드리면 좋은 역할도 주신다고 그랬는데 왜 나는 밤낮 이렇게 밑바닥 역할만 합니까 하고 제가 통곡을 많이 했어요.”

 

 

항상 식모나 밑바닥 인생의 역할만 맡았던 중견 여성 텔런트의 고백이다. 부처님께 좋은 역할을 맡게 해달라고 열심히 천수경도 외고, 염불도 하고 기도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부처님을 기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불자 출신 연예인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연예인들이나 체육인들 역시 부처님이 모든 소원을 들어 주실 것으로 믿는 다는 것이다. 불교tv나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법회 동영상을 보면 확인 할 수 있는 현상이다.

 

순례법회를 다니다 보면

 

이처럼 부처님을 신격화하고 초인화하여 하나의 기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 연예인들의 간증 동영상에서 보는 신앙 행태와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바라면서 해주기를 바라는 대상이 단지 기독교의 신이냐’ ‘부처님이냐만이 다를 뿐 그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런 신행행태는 일반불자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순례법회를 다니다 보면 불자들은 예외 없이 대웅전에서 참배를 하게 된다. 대웅전 참배가 끝나면 관음전등의 각 전각을 순례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놓치지 않은 곳이 있다. 바로 산신각이다.

 

어느 절에서는 칠성각이라고 부르는 산신각의 참배는 빼 놓을 수 없는 순례 코스이다. 산신각에서 어떤 기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의 성불을 위해 서원하기 보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 사업번창, 각종 시험에 대한 합격 기원을 바라는 기도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불자들의 신행행태는 철저하게 복을 바라는 기복적신앙임을 알 수 있다.

 

여성불자들은 왜 기복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자, 특히 여성불자들은 왜 이렇게 기복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 중의 하나를 인터넷신문의 대담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최근 불교신문 창간 50주년 특별좌담에서 법륜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제 잔재 속에 조선조 500년 잔재가 있다. 조선조 500년 간 불교가 탄압 받으면서 첫째 사회의 리더십을 상실했다. 둘째 스님들은 산속에서 불교의 전통을 지켰는지 몰라도, 신자들은 불법을 알지 못한 채 불교신앙만 유지했다. 그 이유는 글을 아는 양반들은 불교를 배척했고 신자들의 대부분인 여성들과 평민들은 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가 없는 불교신앙만 계승된 것이 큰 멍에였다. 여성들이 불교를 지켜준 대신 담마(佛法)가 없는 불교를 전해준 것이다.”

(법륜스님, 창간 50주년 특별좌담 / 한국불교…지나간 50 새로운 50, http://www.ibulgyo.com/archive2007/201011/201011071289092578.asp)

 

 

우리나라 불자들이 기복에 젖어 있는 이유가 과거의 슬픈 역사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간 배척당해온 불교를 세간에서 지탱해 온 것은 여성불자이 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고, 그러다 보니 담마(Dhamma)’를 알 수 없어서 진리가 없는 신앙의 불교만 계승 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의 불교가 불교을 지켜 주었는지 모르지만 그 것은 법이 없는 불교를 전해 준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불자들이 법을 모르기 때문에 기복적인 신앙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오늘날 연예인들의 법문이 기독교의 신앙간증과 하등의 다를 바 없이 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아

 

이렇게 신앙의 불교만 남게 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바로 그것은 이교도의 공격적인 전도에 매우 취약한 결과를 가져온 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륜스님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보살이나 이런 분들은 믿음은 견고하다. 그런데 믿음만 있지 담마(佛法)에 대한 이해가 없다. 담마가 없다보니 어떤 상황에 처하면 믿음의 명의나 대상이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뀌면 기독교나 다른 종교로 바뀌는 것이다.”

 

 

한국불교를 민간에서 지탱하고 있는 노보살들의 믿음은 확고 하지만 담마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어떤 위기가 발생 하였을 때 그 믿음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신격화, 초인화 하여 구원자로서 생각 하였을 때 그 대상만 바뀌면 쉽게 유일신교로 넘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하다.

 

잘 아는 분 중의 하나가 최근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강남의 전통사찰을 오랫동안 다니고 천수경등을 줄줄 외는 불자이었지만 최근 가족의 문제가 발생하여 그 동안 수십년 다니던 절을 그만 다니고 교회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 분의 이제까지의 신행생활은 기복적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부처님을 믿고 신행생활을 해왔는데 부처님이 들어 주지 않아 더 큰 소원을 들어 줄 것 같은 유일신에게 가 버린 것이다.

 

단 한번의 법문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불교를 기복적으로만 믿고, 전국의 기도처를 찾아 다니며 열심히 기도 하던 사람들이 결국 교회에 앉아 있더라는 식의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불자들이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 스님들이 법을 가르켜 주지 않아서 일 것이다. 아니 스님들이 법을 몰라서 그럴 수 도 있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삼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법이란 무엇일까.

 

선사들이 법문할 때 흔히 하는 말은 분별하지 말라거나 알음알이를 놓아 버려라든가 본마음’ ‘참나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한다. 또 빠뜨리지 않는 법문의 단골 주제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이를 두고 어느 스님은 업타령마음타령을 하다 보면 주어진 법문시간을 쉽게 마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법문을 들었을 때 불자들의 마음에서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 나는 것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수다원과를 얻었다든가 아라한과를 증득 하였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자들은 선사들의 법문을 듣고 마음의 혁명을 일으킬 만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같이 단 한번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살아 가면서 누구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한 번 쯤 듣는다. 그리고 그 말한마디에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었다는 이야기 또한 종종 듣는다. 결국 그 이야기는 그 사람에게 정신적인 혁명을 일으키도록 결정적으로 작용 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 역시 마음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느 법우의 극적인 변화

 

불자들은 불자가 되는 방법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하여 수계를 받는 것이다. 그 때 법사의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불자들의 마음의 변화에 대하여 말한다.

 

처음에 불교대학에 입교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대부분 탐욕스럽게 생겼고, 항상 성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을 받는 횟수가 거듭 될 수록 탐욕스런 얼굴은 덜 탐욕스럽게바뀌고, 성내는 듯한 얼굴 표정 또한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이 것은 아마도 담마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극적인장면도 있다.

 

최근 인터넷으로 초기불교수행에 관한 어느 비구니 스님의 음성법문을 들었는데 그 스님이 의미 있는 말을 하였다.

 

 

 

[수행 법문01_위빠사나와 사티]

[수행 법문02_사티의시작에서수다원까지]

 

 

[수행법문03_일어남과 사라짐의 관찰에 관한 이해]

[수행 법문04_구체적인 실천수행방법]

[수행 법문05_형성의 진정됨에 관한이해까지]

(출처, 아눌라비구니 스님 http://cafe.daum.net/kalyanamitta)

 

 

 

 

스님이 하는 이야기 중에 집중수행당시 총 4회의 법문을 하였는데 그 중 어느 불자의 극적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다.

 

처음 그 법우 역시 무표정하고 때로는 화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법문이 거듭 될 수록 점점 얼굴이 점점 환해 지더라는 것이다. 마지막 법문이 끝 났을 때 그 법우는 울음을 터 뜨리며그 동안 자기가 자기자신에게 속아서 살아 왔다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무엇이 그 법우로 하여금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하였을까.

 

부처님의 단 한번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수다원과를 증득 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대체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선사들이 본마음 참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마음속에서 극적인 변화를 일으켜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하였지만 이처럼 초기불교 전통에서 사람을 극적으로 변화 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 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천마디의 의미 없는 법문보다

 

초기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초기불교와 기존 대승불교는 완전히 다른 불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초기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법의 종교임에 반해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길로 가는 불교로서 일종의 신앙의 불교라는 점이다. 이런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래도 지향하는 목표가 달라서 일 것이다.

 

초기불교가 열반이라는 종착지를 향하여 일관되게 가고 가지만 대승불교의 목표는 성불이다. 그런데 선사들의 가르침은 성불이라기 보다 본마음’ ‘참나  찾는 것에 더 가깝다. 결국 열반을 추구하느냐 참나를 찾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본마음이나 참나에 대하여 설하신 적이 없다. 오로지 열반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향하여 매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행복을 가져 오는 것이라고 경전에서 설하였다. 따라서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의미 없는이야기라고 말씀 하였다. 이에 대한 경전상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Sahassamapi ce vācā       사하싸마삐 쩨 와짜

anatthapadasahitā          아낫타빠다상히따

eka atthapada seyyo    에강 앗타빠당 세이요

ya sutvā upasammati      양 수뜨와 우빠삼마띠

 

닙바나를 깨닫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마디의 의미 없는 법문보다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단 한마디의 법문이 훨씬 값지다.

(법구경 게송100)

 

 

거해스님이 번역한 법구경의 100번 게송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닙바나(열반)를 깨닫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마디의 법문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게송을 백편 읊어 주는 것 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닙바나에 대한 단 하나의 게송을 읊어 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부동의 준거청정도론에서

 

니까야와 같은 초기불교의 방대한 경전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 즉, 열반을 향하여 설해 졌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단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이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가이드가 아마도 경전을 요약하고 체계화 하여 설명한 논장일 것이다. 빠알리 삼장 중의 하나인 아비담마논장이 대표적 케이스라 볼 수 있다. 또 하나가 있는데 청정도론이다.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 부동의 준거라는 청정도론은 5세기에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 비구에 의하여 쓰여진 5부 니까야의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화 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한 이 책은 열반을 향한 지도책과 같고 또 나침반과도 같은 책이다. 불자들이 이런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00대 들어서면서 빠알리어 원본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대중에게 보급되고 나서 부터이다. 그렇다면 청정도론에서 강조한 사항은 무엇일까.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청정도론에서 강조 한 것 중의 하나는 자아영혼이라는 개념의 타파라 볼 수 있다. 이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볼 수 있다.

 

해방자로서의 부처님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리 하여 설명하였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 무더기로 분해 하여 설명하였을까. 그 것은 한 마디로 개념을 부수기 위해서이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자아나 영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에 자아나 영혼이같은 개념이 없어야 열반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본마음이나 참나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 된다면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개념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일어 났다가 사라지고, 단지 조건 지워져 상속 하는 현상또는 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자아나 영혼 같은 개념이 발 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것은 부처님 당시 모든 개아에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불멸하여 브라만과 합일 한다는 범아일여사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아이니 영혼같은 개념이 부수어지면 또 신의 속박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이 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여 설명하였다는 것은 신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해방자역할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초기경전의 말씀을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범천, 대범천, 최승자, 창조자(D.i.18, 디가니까야)”등으로 상상해온 범천등의 윤회를 만드는 자가 없다. 그리고 그런 나의 자아가 말하고 느낀다(M.i.8,맛지마니까야)”라고 상상해온 행복과 고통을 경험한 자아가 없다.

 

 

인간 해방자로서의 부처님은 이처럼 이 세상을 창조한 대범천과 같은 창조자 있을 수 없고, 또 행복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자아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상견과 단견의 발생원인

 

결국 사람들은 자아와 이 세상이 영원하다는 상견과 죽은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단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것도 모두 내 것,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생에서 자아를 거머쥠이 상견과 단견을 국집하도록 유도한다.

 

 

상견과 단견이 발생하는 요인은 모두 자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현상이 발생될까.

 

 

자아를 영원한 것이라고 거머쥘 때 그 자아를 청정케 하고자 그에게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이 일어난다. 단멸한다고 거머쥘 때 내생을 무시하면서 그에게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이 일어난다.

 

 

이처럼 상견을 가질 때 계율과 그 에 따른 의식이 일어나는데 이는 일반적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천국에서 태어 나려면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아가 있고 불멸하는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멸론 역시 자아를 거머 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특징은 내생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되는 대로 살고, 도덕적으로 문제되는 행위를 해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 감각적 욕망에 사로 잡혀 살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들 상견과 단견을 모두 부정하고 중도를 설하였다. 중도는 연기법과 같은 것이어서 오로지 조건에 따라 상속되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자아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오온을 자아로 생각 하고 있는한

 

그렇다면 위와 같은 삿된 계율과 의식 대한 견해 그리고 감각적 욕망은 언제 제거 될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견해에 대한 취착등이 첫 번째로 버려진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류도로 제거 되기 때문이다. 감각적욕망에 대한 취착은 맨 나중에 버려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라한도로 제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들을 버리는 순서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한 번 듣고 단박에 깨우친 사람들은 숙생에 걸친 수행의 결과라 본다. 이미 전생에서 부터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말 한마디에 단박 깨닫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학이지(學而知)가 아닌 일종의 생이지(生而知)’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불교수행에 참여 하는 사람들 역시 전생에 공덕을 쌓은 결과라고 수행처에서 이야기한다.

 

이처럼 단 한 마디에 깨칠 수 있고, 설법을 여러 차레 듣는 과정에서 깨칠 수 있다. 이 경우는 아상(我相)’이 점점 소멸해 가는 경우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설법 도중에 눈물을 흘리다든가 이제까지 자신에게 속아서 살아 왔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아상이 깨지고 고정불변의 자아가 없다고 인식할 때 커다란 마음의 변화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이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 타파 되는 것이다.

 

범부를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고 있는 열가지 족쇄가 있는데 성자가 되려면 그 중 가장 먼저 타파 되는 것이 유신견이라 한다. 유신견은 빠일리어로 삭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라 하며 자아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삿된 견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2) 오온 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3)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생각

(4) 자아가 오온의 주관자란 생각

 

 

이렇게 오온을 자아로 생각 하고 있는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D.i.14,디가니까야)”라고 삿된 견해에 빠지는 것이다.

  

불자들은 법문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선종의 전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선사들이 법문을 한다고 해도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게송을 읊기 때문에 그 뜻을 알기 어렵고 다만 게송이 끝날 즈음에 다 같이 나무~아미타~하며 합송하는 정도이다.

 

선사들의 법문 역시 육조단경이나 금강경과 같은 대승경전의 문구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는다. 더구나 선사들이 법문을 할 경우 사전에 배포된 자료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경험한 이야기나 심지어 신변이야기등 마음 내키는 대로법문을 하다 보니 알맹이 없는 법문이 되기 쉽다.

 

또한 업이나 마음에 대한 이야기, 불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의 법문은 듣고 나서 그다지 남는 것이 없다. 따라서 여러회에 걸쳐 법문을 들어도 극적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 삼보에 의지해야 하는가

 

법문을 들으면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탐욕스러운 얼굴은 관용의 얼굴로, 성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애의 마음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의 마음이 일어 나도록 해주는 것이 명법문이다. 그래서 법문을 들으면 들을 수록 얼굴은 점점 맑고 밝고 환해져야한다. 그런 극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하는 것은 아상이 무너져 갈 때 일 것이다.

 

또 법문을 들으면 신심이 생겨 나야 한다. 그런 신심은 초인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맹목적인 믿음 아니라, 합리적이고 확신에 찬 믿음이어야 한다. 그런 믿음을 초기불교에서 삿다(saddhā)라 한다.

 

삿다는 이 길로 죽 가면 서울이 반드시 나온다와 같은 확신에 찬 믿음을 말한다. 그런 믿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르면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실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한 성자들이 있다면 그 믿음은 더욱 더 확고해 질 것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 삼보에 대하여 귀의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이란부처님(Buddha)’부처님의 가르침(Dhamma)’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에 이른 성자들(Sangha)’, 이렇게 세가지 보배를 믿고 따르는 것이 진정한 불교적 믿음일 것이다.

 

 

 

 

2010-1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