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성제를 빠알리어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17. 12:39

 

 

사성제를 빠알리어로

 

 

 

 

 

 

 

 

 

매번 같은 일이 반복 된다면 어떻게 될까. 금방 싫증과 권태를 느낄 것이다. 좋은 영화도 한 두번 보았을 때 감동적이지만 10, 100번 보게 한다면 마치 고문과도 같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 또한 배고플 때 먹으면 먹는 즐거움을 느끼지만 매번 같은 음식만 먹게 한다면 이 또한 크게 고통을 느낄 것임에 틀림 없다.

 

우리의 일상 역시 동일한 일의 반복이다. 그러나 견딜만 한 것은 완전히 똑 같지 않고 패턴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해 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 되지만 작년과 올해의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변화를 느낄 수 있고, 매일 매일 하는 일 또한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이 패턴상에 변화가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는 늘 불만족  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삶과 고통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것일까. 그런 불만족과 고통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이 제시하였다.

 

팔정도 만큼이나 생소한 사성제

 

부처님이 제시한 것은 고통과 고통의 해결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성제라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자들은 팔정도 만큼이나 생소한 것이 사성제이다.

 

사성제가 생소해 보이는 이유는 북방대승불교에서 4성제와 8정도, 12연기와 같은 부처님이 설한 근본교리를 등한시한 결과이다. 당장 반야심경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공의 입장에서 보면 부초님이 설한 근본교설이 모두 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근본교설 앞에 ()를 붙여 놓음으로서 일반불자들이 보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아니면 마음에 대한 이야기 뿐이다.

 

삶의 과정에 있어서 불만족과 괴로움,고통은 누구나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이다. 이와같은 문제를 도외시하고 본마음이니 참나를 찾자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게 들린다. 아마도 현실을 떠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말일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 중에 가끔 듣는 이야기중의 하나가 도시의 공기에 대한 것이다. 오랫만에 서울에 와 보았더니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해서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이는 도시에서 돈이 없어 옥탑방이나 반지하 방에서 두더지 처럼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이다.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늘 현실적 문제와 부딪치며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로 부터 도망갈 수 도 없고, 세상을 등지고 살 수 없어서 현실 그 자체가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삶 속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사람들’,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네가지 성스런 진리를 설하였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인가

 

우리나라 불자들은 사성제 하면 흔히 고집멸도를 떠 올린다. 그런 고집멸도는 반야심경에서 무고집멸도로 되어 있어서 사성제는 없는 것으로서법회의식이나 승가에서 밤낮으로 올리는 예불의식에서 항상 독송 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사성제를 단지 고집멸도로만 알고 있다면 사성제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말이다. 한자성어가 외우기는 편리하게 되어 있지만 그 뜻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것도 천년도 더 된 시점에 만들어진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현실과 도무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집멸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집멸도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집멸도의 앞에 모두 고()자가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 고집, 고멸, 고멸도가 될 것이다. 이를 더 자세히 말하면

 

 

苦聖諦(고성제);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苦集聖諦(고집성제);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런 진리

苦滅聖諦(고멸성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런 진리

苦滅道聖諦(고멸도성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런 진리

 

 

가 될 것이다.

 

이처럼 고()자가 모두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집성제에서 과 일어남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또 멸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도을 닦는다고 하는 하는데 이는 무슨 말일까. 사성제를 단지 고집멸도로만 안다면 결코 부처님이 설한 성스런 진리에 대하여 안다고 볼 수 없다. 이럴 때는 빠알리 원어로 알아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의 음성이 고스란히

 

2000년대 들어와 남방테라와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 되면서 동시에 빠알리어에 관한 관심도 높아졌다. 더구나 빠알리가 부처님당시 마가다어의 일종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음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언어라 볼 수 있다. 이제 시절인연이 되어서인지 빠알리어로 된 자료를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 중 청정도론에 표기된 사성제와 관련된 어원을 보면 한자어로 된 것 보다 이해가 휠씬 빠르다.

 

둑카

 

사성제의 첫번째 진리인 고성제에서 를 빠알리어로 둑카(dukkha)’라 한다. 고를 왜 둑카라 불렀을까. 빠알리어 둑카에서 (du)’비열하다는 뜻이다. (kha)’라는 단어는 비었다라는 뜻이다.

 

(du)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청정도론에서 비열한 아이를 두뿟따(dupputta)’라고 표현 하였다. ‘가 왜 비열하다는 뜻일까. 이에 대하여 생활속의 아비담마(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를 참조 하였다.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이 읊은 네 가지 음절로 된 두(Du)-(Sa)-(Na)-(Sa)라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그들은 매우 부유한 젊은이들이었지만 아무런 공덕행도 짓지 않았을 뿐더러 오직 불선업만 지었다. 예를 들면 도덕적 계율을 파하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어서 로하꿈비 지옥(Lohakumbhī-niraya)에 떨어져 육만 년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과거 생에 나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공덕의 길을 닦지 않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네.

 

그는 자신의 악행을 크게 후회하였다. 하지만 오직“두(Du)"라는 단어만 입 밖에 내고는 다시 무시무시한 솥 밑바닥으로 가라않았다. 그는 선행을 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또 다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고통스런 과보는 끝이 없내. 나는 인간으로 있을 때 악업을 지었다.”하지만 그도 완전한 문장을 말하지는 못하고 오직 “나(Na)"라고 하는 말만 입 밖에 내었다. 그는 자신의 지은 불선업을 후회하였다.

(생활속의 아비담마, (15) 2 - 인색, 후회, 해태와 혼침, 회의적 의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부유한 집안의 젊은이가 아무런 공덕을 짓지 않고 성적인 비행에만 몰두 하였을 때 지옥에 떨어졌고,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du), (du)..” 하며 오로지 두라는 단어만 발음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비열한 아이에게 붙여준 말이 두뿟따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는 비었다는 뜻인데. 이는 텅빈 허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사성제의 첫번째 진리인 둑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번째 진리는 여러가지 위험이 도사리는 소굴이기 때문에 비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항상함, 아름다움, 행복, 자아가 없기 때문에 비었다. 그러므로 비열()하기 때문에, 비었기()때문에 둑카(괴로움)라 한다.

(청정도론, 2, 537p)

 

둑카 사무다야

 

다음으로 한자어 고집성제는 빠알리어로 둑카사무다야(dukkha-samudaya)’라 한다. ()에 해당하는 사무다야에서 (sam)’함께 오다”, “함께 모이다라는 뜻으로서 결합을 말한다. (u)’ ud를 뿌리로 하는데, 이는 일어나다”, “위로 오르다라는 뜻이다. ‘아야(aya)’원인을 나타낸다. 이처럼 이 두번째 진리는 다른 조건들과 결합되면 둑카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결합되면 둑카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둑카사무다야라 부른다.

(청정도론, 2, 538p)

 

 

한자어 집을 단순히 고통이 일어난으로 이해 하는 것과 많은차이기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 제 스스로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조건지워져일어나고 있음을 빠알리 원어 분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둑카 니로다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조건지워져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 조건만 알면 해결 방법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3번째 진리가 고멸성제인데 이를 빠알리어로 둑카니로다(dukkha-nirodha)’라 한다.

 

빠알리어 니로다에서 (ni)’없음을 나타낸다. ‘로다(rodha)’감옥을 나타낸다. 따라서 모든 태어 날 곳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감옥이라는 괴로움의 압박이 없다. 이를 둑카니로다라고 부르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 할 수 있다.

 

 

생겨남이 없는 소멸의 조건이기 때문에 둑카니로다라 한다.

(청정도론, 2, 538p)

 

 

둑카 니로다 가미니 빠띠빠다

 

네번째 진리는 한자어로 고멸도성제라하는데 줄여서 라고 하는 것에 비하여 긴 이름이다. 빠알리어 역시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고멸도성제를 빠알리어로 둑카 니로다 가미니 빠띠빠다(dukkha-nirodha-gamini-patipada)라 부른다. 이를 우리말로 풀이 하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으로서 역시 긴 이름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팔정도를 말한다.

 

가공할 만한 공()

 

우리나라 불자들은 부처님이 설한 최고의 진리인 사성제에 대하여 잘 모른다. 선사들의 법문에 본마음이나 참나, , 마음에 관한 법문은 많이 있지만 정작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한 사성제나 팔정도에 관한 법문은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반야심경에서 보듯이 무고집멸도라 하여 공의 입장에서 보면  그 어떤 진리나 성인들의 가르침도 모두 공한 것이 되고, 심지어 공 그 자체도 공한 것으로 되기 때문에 가공할 만한 공이라 볼 수 있다.

 

용수는 이런 진공(眞空)을 궁극적 진리인 진제 (眞諦)라 하고, 언어를 통해 전개되는 일상의 삶을 가시설된 속제(俗諦)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진제와 속제의 부정과 긍정의 조화를 중도 (中道) 라 하였는데 이를 공((() 3(三諦) 라 하였다.

 

용수는 공가중 3가지가 모두 진리라고 주장한다. 부처님이 설한 4가지 거룩한 진리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공으로써 모조리 부정한 다음 새로운 세가지 진리를 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용수보다 훨씬 이전에 성립되고 가장 오래된 경전 중의 하나인 법구경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Maggānaṭṭhagiko seṭṭho        막가낫탕기꼬 셋토

saccāna caturo padā           삿짜낭 짜뚜로 빠다

virāgo seṭṭho dhammāna      위라고 셋토 담마낭

dvipadānañca cakkhumā         드위빠다난짜 짝쿠마

 

길로서는 팔정성도가 최상이요

진리로서는 사성제가 가장 성스럽고

욕망을 다스리는 담마가 으뜸이며

인간과 천상을 통틀어 두 발 가진 생명 가운데

붓다야말로 최고의 성자이다.

(법구경 273게송)

 

 

부처님은 최고의 진리로서 사성제를 들었고, 이에 대한 실천 방법으로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사성제를 빠알리어로

 

시절인연이 되어서인지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사성제 역시 빠알리어 원음으로 분석해 보면 그 뜻을 정확히 이해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집멸도라는 말 대신 좀 길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빠알리어로 말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자어

 

聖諦(성제)

 

苦聖諦(고성제);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苦集聖諦(고집성제);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런 진리

苦滅聖諦(고멸성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런 진리

苦滅道聖諦(고멸도성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런 진리

 

 

 

영어

 

The Four Noble Truths

 

The Noble Truth of Suffering

The Noble Truth of the Accumulation of Suffering

The Noble Truth of the Elimination of Suffering

The Noble Truth of the Path that Leads Away from Suffering

 

 

빠알리어

 

짯따리 아리야삿짜니(cattāri ariyasaccāni)

 

둑카 아리야 삿짜(Dukkha Ariyasacca)

둑카 사무다야 아리야 삿짜(Dukkhasamudaya Ariyasacca)

둑카 니로다 아리야 삿짜(Dukkhanirodha Ariyasacca)

둑카 니로다 가미니 빠띠빠다 아리야삿짜(Dukkhanirodhagāminīpaipadā Ariyasacca)

 

출처 http://nikaya.wikidot.com/cattari-ariyasaccani

 

 

 

 

 

2010-11-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