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화가 날 때, 자신을 훈계하는 글과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25. 18:09

 

 

 

화가 날 때, 자신을 훈계하는 글과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뚜껑이 열릴 때

 

흔히 듣는 이야기 중에 뚜껑 열린다라는 말이 있다. 열 받친다라는 말도 있다. 이 모두 화가 무지하게 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성인또는 군자 처럼 보이는 점잖은 사람일지라도 화가 나면 무섭게 성을 내며 이성을 잃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 경우 무시당했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방과 사소한 말싸움이 자존심싸움으로 변질되고, 급기야 머리에 열이 나서 뚜껑이 열릴 정도로 발전 되면 감정이 이성 보다 우선 하기 때문에 커다란 싸움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럴 경우 계속 싸운다면 서로 마음에 상처만 받고 증오와 적개심만 키울 뿐이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청정도론의 자애수행편을 보면 화가 났을 경우 대처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있다. ‘적개심이 일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를 든 것이 앙굿따라니까야의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이다. 적개심을 제거 하는 다섯가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소개한 절복진노경은 원문이 전부 소개 되어 있지 않고 도입부만 해설 되어 있다. 그래서 절복진노경에 대한 한글번역을 검색하여 보았다. 그러나 어느 사이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절복진노경의 영문이름인 ‘Aghatavinaya Sutta’를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영문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 영문판은 다음과 같다.

 

 

Aghatavinaya Sutta: Removing Annoyance

 

"Bhikkhus, there are these five ways of removing annoyance, by which annoyance can be entirely removed by a bhikkhu when it arises in him. What are the five?

"Loving-kindness can be maintained in being toward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this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

"Compassion can be maintained in being toward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this too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

onlooking equanimity can be maintained in being toward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this too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

"The forgetting and ignoring of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can be practiced; this too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

"Ownership of deeds in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can be concentrated upon thus: 'This good person is owner of his deeds, heir to his deeds, his deeds are the womb from which he is born, his deeds are his kin for whom he is responsible, his deeds are his refuge, he is heir to his deeds, be they good or bad.' This too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

"These are the five ways of removing annoyance, by which annoyance can be entirely removed in a bhikkhu when it arises in him."

 

(출처 ; http://www.accesstoinsight.org/tipitaka/an/an05/an05.161.nymo.html

translated from the Pali by Ñanamoli Thera© 1994–2010

Alternate translation: Thanissaro, AN 5.161  PTS: A iii 185, 앙굿따라니까야, 절복진노경)

 

 

절복진노경에 대한 영어낭송 mp3파일도 다음과 같이 발견하였다.

 

 

Listen to this sutta(절복진노경 음성듣기)

 

출처 ; http://www.suttareadings.net/audio/

 

 

 

절복진노경 한글번역

 

이 영문판 절복진노경에 대하여 번역을 아래와 같이 하였다. 제목은 화를 다스리는 경으로 붙여 보았다.

 

 

화를 다스리는 경(절복진노경, Aghatavinaya Sutta)

 

 

비구들이여, 이것이 적개심을 제거하는 다섯가지 방법이니, 비구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것으로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무엇이 다섯인가.

 

당신에게 화를 낸 사람에게 자애(Loving-kindness)’를 내부의 마음속에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일어나는 분노를 어떻게 제거 하는지에 대한 방법입니다.

 

당신에게 화를 낸 사람에게 연민(Compassion)’을 내부의 마음속에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일어나는 분노를 어떻게 제거 하는지에 대한 방법입니다.

 

당신에게 화를 낸 사람에게 방관하는 듯한 마음의 평정(Onlooking equanimity)’ 을 내부의 마음속에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일어나는 분노를 어떻게 제거 하는지에 대한 방법입니다.

 

당신에게 화를 낸 사람에게 잊어 버리는 것(forgetting)’무시하는 것(ignoring)’에 대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일어나는 분노를 어떻게 제거 하는지에 대한 방법입니다.

 

당신에게 화를 낸 행위의 소유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상합니다.

 

이 착한 사람은 업(deeds)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그의 업은 타고난 것이고, 그의 업은 친족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또 그의 업은 자신의 피난처(refuge)이고, 좋은 행위이든 나쁜행위이든 그는 자신의 업의 상속자이다. “

 

이 것이 또한 그에게 일어나는 분노를 어떻게 제거 하는지에 대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비구의 내부에서 분노가 일어 났을 때 분노를 완전히 제거 할 수 있는 다섯가지 방법입니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2010-11-25)

 

 

두 눈을 부릅뜨고

 

대림스님은 청정도론에서 ‘Aghatavinaya Sutta’折伏瞋怒經(절복진노경)’으로 소개 하였다. 한자어 풀이로 본 경의 이름은 진노를 끊어 버리고 항복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자어 자의 경우 성낼 진()자 아니라, 부릅 뜰 진()자이다.

 

사람이 화를 낼 때 눈을 부릅뜨면 매우 무서워 보인다. 이는 일반적인 성냄과 다르다. 눈의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화를 낸다면 누구든지 살기를 느낄 것이다. 그런 적개심이 내 안의 내면에서 일어 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잡아 먹을 듯이 성을 내면 그 순간 이성을 잃는다. 그러나 그 후 벌어진 모든 사건은 성낸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정신적 고통을 도마나사(domanasa)’라 하는데 이는 성냄에 뿌리 박은 마음에 기인 한다. 그런데 성을 내고 나면 왜 정신적 고통이 따를까.

 

정신적 고통도마나사(domanasa)

 

화를 낸다는 것은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분노’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함께 한다. 또 성을 내고 나면 상대방을 자극하고 그로 인하여 쌍방이 불선업과 불선과보를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성을 낸 다는 것은  그 순간에 일어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격정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 회환, 뉘우침이다. 그래서 종종 그 화 내었던 순간이 떠 오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자신의 악행을 떠 올릴 때 마다 악마와 같이 보였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후회 하게 되고 또 자신의 악행을 되새길 때마다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된다.

 

화를 냄으로서 상대방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고, 혹은 주지 않을 수 있다. 상대가 반응하여 같이 화를 낸다면 화를 내는 행위는 정신적 고통을 야기 하므로 고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화를 받지 않는 다면 그 화는 고스란히 화를 낸 사람이 되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화를 냄으로 인하여 그 화가 초래한 고통으로 지금 당장 자신을 태우는것이다.

 

화를 낸다는 것은 매우 천박한 행위이다. 대체로 천박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화를 잘 낸다. 그 이면에는 자존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은 열등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존심을 잘 버리지 못 하는 이유는 나는 이런 사람인데하며 무엇인가 붙잡고 있을 때 이다. 그 붙잡고 있는 대상 중에 가장 큰 요인이 내가 있다라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를 초기불교에서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라 하고, 깨달음에 가는 데 있어서 버려할 삿된 견해로 본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10가지 족쇄 중에 가장 먼저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절복진노경, 즉 적개심을 누그러 뜨리고 항복 받는 경에서 다섯가지를 강조 한다. 영문번역을 보면 자애(Loving-kindness), 연민(Compassion), 방관하는 듯한 마음의 평정(Onlooking equanimity), 잊어 버리는 것(forgetting)과 무시하는 것(ignoring), 그리고 업의 소유자(owner of his deeds)임을 아는 것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여기에서 자애, 연민, 평정은 사무량심과 공통된 사항이다. 단지 더불어 기뻐함()만 빠졌을 뿐이다. 추가 된 사항은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과 그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이 그 화를 내는 업의 소유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그 화를 내는 사람에 대하여 자애를 가지고 연민으로 지켜 보며 또 방관하는 듯한 마음의 평정을 갖는 것이다. 방관적인 마음의 평정이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치 마음에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사람을 보면서 평온을 유지 하듯이 그와 같이 모든 중생에 대해 평온으로 가득 채운다.

(Vbh.275, 위방가)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대방에 대하여 분이 풀리지 않고 여전히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가 날 때 자신을 훈계하는 글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멋진 게송을 소개 하고 있다. 제목을 화가 날 때 자기를 훈계하는 글으로 붙여 보았다.

 

 

화가 날 때 자기를 훈계하는

 

 

만약 원수가 자기의 영역으로 삼은

그대의 몸에 고통을 줄지라도

무엇 때문에 그대는 그의 영역이 아닌

그대의 마음에 고통을 주려하는가.

 

많은 도움을 주었고 눈물을 흘리던

가족들마저 버렸거늘

무엇 때문에 크나큰 해악을 초래하는

그대의 적인 화는 버리지 않는가.

 

멋대로 부리는 화는 참으로

그대가 보호하는 계행의 뿌리를 멸절시키나니

그대같이 어리석은 자

또 누가 있겠는가.

다른 자가 비열한 행위를 했다고

그대는 불같이 화를 낸다.

 

왜 그대는 그대 스스로 남이 했던

같은 일을 하려하는가.

 

만약 나를 화나게 만들고자

남이 불쾌한 행위를 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대는 화를 내어

남의 소원을 만족시켜주려는가.

 

그대가 화를 내어 그에게 고통을 줄 수도

혹은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화가 초래한 고통으로

당장에 그대 자신을 태우리.

 

만약 원수들이 분노로 인해

눈멀어 악처의 길을 간다면

그들을 따라 가려는가.

 

적이 분노로 인해 그대에게

해로움을 끼쳤다면

그 분노만을 끊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적절치 않게

그대에게 불쾌한 행위를 했던 사람을 괴롭히는가.

오온의 법들은 순간적인 것이라

이미 없어져버렸거늘

지금 그대는 누구에게 화를 내는가.

 

그에게 고통을 주려해도 그가 없다면

누구에게 고통을 주겠는가.

그대의 존재가 바로 고통의 원인이거늘

무엇 때문에 그에게 화를 내는가.

(청정도론, 자애수행)

 

 

시뻘건 숯과 똥을 쥐고서

 

이렇게 자기자신을 훈계해도 적개김이 가라 앉지 않는다면 그 때는 자신을 비롯하여 남들 또한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 해야 한다. 절복진노경에서 다섯번째에 해당 하는 것이다. 어떻게 반조 하는가.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여보게,

그에게 화를 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화냄으로 인한 그대의 업이

장차 그대를 해로움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업이 바로 그대의 주인이고,

그대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 났고,

업이 그대의 권속이고,

업이 그대의 의지처이다.

그대는 그대가 행한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 행위는 정등각을 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벽지불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성문의 지위에 오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범천과 제석과 전륜왕과 지방의 왕 등 가운데

어느 지위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 행위는 교단에서 물러나게 하여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지경에 처하게 하고,

지옥등 갖가지 고통을 겪에 한다.

 

이 화내는 업을 행 할 때

양손에 시뻘건 숯과 똥을 쥐고서

다른 자에게 던지려는 사람처럼

첫번째로 자신을 태우고 악취나게 한다.

(청정도론, 자애수행)

 

 

 

 

 

 

 

 

마하칼라(Mahakala)

티벳탕카의 분노의 신

출처 : http://www.tibetshop.com/Paintings.html

 

 

 

 

화를 내는 행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 화내는 행위는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이고, 그 업에 대한 주인이고 상속자인데, 더구나 그런행위를 하는 것은 친족들의 교육에 대한 탓도 있겠지만 과거 전생으로 부터 축적된 성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화를 내면 자기자신만 괴로운 것이다. 그 화로 인하여 자기자신을 스스로 태우고 더럽히기 때문에, 한 손에 빨갗게 타고 있는 을 들고, 또 한 손에 을 들고 던지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 인간을 대할 때

 

모자 보호소에 수용되어 있는 여성들과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녀들이 남편을 지칭할 때 예외 없이 그 인간이라고 말한다고 전한다.

 

이처럼 그 인간이라는 말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혐오스런 대상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전 남편만 해당 될까. 그 대상이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말 안 듣는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시어머니, 직장의 상사도 될 수도 있다.

 

법륜스님의 강좌를 들어 보면 우리나라 사람의 고민중의 약 70%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 벌어지는 문제라 한다. 주로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갈등, 자식과의 갈등이다. 여기에 직장에서 상사와의 갈등, 동료와의 갈등을 더 하면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갈등이 일어 날 때 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원수 보듯 한다. 그래서 호칭할 때 그 인간이라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과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인간은 지금 두 눈을 부릅뜨고, 한 손에 시뻘건 숯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똥을 던지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그 화를 받아 준다면 밥상을 받는 것과 같다. 그 밥상에는 나를 태워 버릴 수 있는 빨간 숯덩이가 있고, 나를 더럽게 만들 똥도 있다. 그런데 그 밥상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시뻘건 숯덩이를 쥐고 있는 상대방은 자신의 손을 태우고 말 것이다. 또 한 손에 들고 있는 똥에서 더러운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이처럼 그가 차려준 밥상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 속에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의 바탕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연민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방관하는 듯한 마음의 평정을 갖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잊어 버리고 크게 게으치 않게 여기는 그렇네!, 그렇군!, 그러려니하는 연습을 하라고 말한다.

 

그 인간이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결국 타고난 축적된 성향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순간 순간 벌어진 모든 행위에 대한 업은 순간 순간 자기자신이 업의 주인이고 계승자이고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경전을 배우고 익혀서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고, 또 깨달은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을 불설(佛說)’로 여기기 때문에 수 많은 대승경전이 만들어진 요인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 전통이 있어서일까 우리나라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좀처럼 경전의 문구를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위주로 하는 법문을 많이 볼 수 있다. 심지어 방송을 진행하는 스님중에 행복창조 10과 같은 자신의 어록이나 치유의 기도와 같은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이고 비불교적인 기도문을 낭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초기불교를 접하면 부처님이 설한 84천 법문 중에 절복진노경(aghatavinaya Sutta)’과 같이 화를 다스린다든지, ‘자애경(metta-sutta)’과 같이 거룩한 마음을 갖게 한다든가, ‘행복경(mangala-sutta)’처럼 세간적 행복과 궁극적 행복에 관한 이야기등 너무나 좋은 경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선사들이 법문을 할 때 자신의 이야기 5,249자에 지나지 않는 금강경문구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 경전을 배우고 익혀서 법문에 활용하고, 방송에 소개 한다면 우리나라 불교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효과를 가져 오지 않을까.

 

 

 

2010-11-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