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길다, 둑카사무다야(집성제)와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29. 14:56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길다, 둑카사무다야(고집성제)와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

 

 

 

현실은 고통스러운데

 

우리나라 불자들은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흔히 말하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등의 핵심 교리가 있지만 처음 부터 끝까지 꿰뚫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믄 듯 하다. 이런 근본교리는 극히 일부의 불자들만이 알고 있을 뿐 대부분의 불자들은 그런 용어가 있는 줄 조차 모른다.

 

설령 용어를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반야심경에서 보는 것 같이 ()’의 입장에서 모든 진리는 공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교리에 대하여 무지할 수 밖에 없다.

 

그 대신 진여나 불성, 법성과 같은 중국식 개념의 불교용어가 그자리를 차지 하고 있지만 무언가 공허함을 느낀다. 현실은 고통스러운데 진여이니 불성이니 하는 말들이 도무지 가슴에 와닿지 않고, 먼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불자들은 공, 유식, 중관, 여래장, 진여, 불성, 법성과 같은 한자용어가 들어간 불교용어를 접하면 한 없이 어렵게만 느끼고, 우리들과는 상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문자를 아는 사람들의 전유물로서 생각한다. 이렇게 문자를 모르다 보니 보시하고 만 열심히 지키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에서 좀처럼 벗어 날 수 없다. 불자들이 단지 다음 생에 천상에 태어 나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 것일까.

 

이런 쉬운길을 내버려 두고

 

천상이나 극락에 태어 나기를 바라고 불교를 믿는다면 유일신교의 사상과 하등의다를 바가 없다. 유일신교도 최종의 목표가 죽어서 천국에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도덕적인 삶을 살고,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 또한 불교와 다를 바 없다.

 

죽어서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바라기만 한 다면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우리들이 천상에 태어 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현생에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현실의 삶은 고통스럽다. 왜 삶이 고통에 가득찬 것일까. 그 원인은 무엇일까. 도대체 되는 일이 없는 것이 세상살이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부터 잘 못 된 것일까. 그런데 놀라웁게도 이와 같은 의문사항에 대한 답이 경전에 오래 전 부터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 것도 수천년동안 아주 상세하게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경전 속에 명확하게 쓰여있다는 것이다. 이런 쉬운길을 내버려 두고 진여이나 불성이니 법성이나 하는 어려운 길을 돌고 돌아 헤메었을까.

 

부처님은 정신과 전문의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고통을 근본적으로 제거 해 주신 분이 부처님이다. 그런 측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은 정신과 전문의에 더 가깝다.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나 수행처에서 질문사항을 보면 현재 겪고 있는 정신적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이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긴장과 갈등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진여나 불성과 같은 법문은 남의 나라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 불부터 먼저 꺼야 되는 이치와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선사들의 법문은 현실성이 없다.

 

오늘 날 사람사는 곳, 특히 도시에 사찰이 없다 보니 불교는 없다. 불교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가르침은 접할 수 있다. 책이나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이다. 그런 가르침도 어려운 한문투의 대승경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신격화 되고, 초인적인 부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정신과 의사와도 같은 친근한 부처님을 통해서이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처방을 제시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초전법륜경)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사정제야 말로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지금 당장 겪고 있는 당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 해법에 대한 대표적인 경은 무엇일까. 그 것은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매우 생소하거나 거의 모르고 있는 초전법륜경이다.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얻고 난 후 최초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설한 한 경이다. 그래서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해서 초전법륜경이라 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라 한다. 줄여서 담마짝까숫따(Dhammacakka Sutta)라 한다. 이 초전법륜경은 상윳따니까야의 56, 11번째 경(SN 56:11)에 들어 있다. 이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무엇을 강조 하셨을까.

 

부처님이 초전법륜경에서 강조한 사항은 두가지이다. ‘사성제팔정도이다. 그런데 사성제와 팔정도는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이 사성제와 팔정도가 함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사성제의 도성제가 곧 팔정도를 의미하고, 팔정도의 정견이 사성제를 표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따로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의 본질은

 

이와 같은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용어의 정의에 대하여 설명하여 놓은 경이 또 초전법륜경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 하였을까. 고성제의 고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빠알리어 :sam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영어 : in brief the five aggregates of grasping are suffering

우리말 :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이 바로 괴로움이다

 

 

고통 그 자체에 대하여 설한 것이 고성제이다. 고통 그 자체도 성스런 진리로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뒤이어 고통의 일어남이나, 소멸, 소멸에 이르는 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고통 그 자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경에서 부처님은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를 요약하여 오취온(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ā)이 고통의 본질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든지 분명하고, 명확하고, 확실하다. 알 듯 모를 듯 선문답하듯 애매모호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영어 표현대로 다섯가지 무더기를 움켜쥐는 것이 고통의 본질이라고 말한 것이다. ,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뜻이다

 

고통은 결코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고통의 원인을 잘 모른다. 잘 모르기 때문에 또 고통을 받는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 버리려면 고통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 또한 부처님은 명쾌하게 한 단어로 설명하였다.

 

 

빠알리어 : tanhā(딴하)

영어 : craving

우리말 : 갈애

 

 

갈애가 고통이 일어 나게 하는 원인인 것이다. 갈애를 빠알리로 딴하라 한다. 영어로 ‘craving’이다. 이는 갈증(thirst)’을 뜻한다. 또 다른 말로 욕망(desire)이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하면 ()’가 되고, 일본식으로는 갈애()’가 된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말한다.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고통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통은 결코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 그래서 빠알리어로 둑카사무다야(dukkha-samudaya)’라 하였다. 여기서 집()에 해당하는 단어는 사무다야이다. ‘삼(sam)’은 “함께 오다”, “함께 모이다”라는 뜻으로서 ‘결합’을 말한다. 또 ‘우(u)’는 ud를 뿌리로 하는데, 이는 “일어나다”, “위로 오르다”라는 뜻이다. ‘아야(aya)’는 ‘원인’을 나타낸다.

 

고집성제는 연기법으로 설명

 

이처럼 이 두번째 진리는 다른 조건들과 결합되면 둑카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고통이 일어 날 때 반드시 조건 지워져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이 일어날 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고통이 일어남의 진리인 고집성제는 연기법으로 설명한다.

 

연기법을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라 한다. 이에 대한 어원적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연기(十二緣起), 또는 ‘연기법(緣起法)’으로 옮기는 빠띠쨔사무빠다(paicca-samuppāda)에서 paicca pai(~를 대하여)+i(가다)의 동명사로써 문자적으로는 ‘~를 향하여 가고서’이며, ‘의지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samuppāda sam(함께)+ud(위로)+pad(가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함께 위로 간다’는 문자적인 뜻에서 ‘일어남, 발생, 근원, 기원’의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paicca-samuppāda는 ‘의지하여 일어남’을 뜻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주석서)

 

 

이처럼  연기법의 사뭅빠다(samuppāda)라는 어원과 집성제의 사무다야(samudaya)의 어원에서 공통적인 사항은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은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라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을 갈애()있다고 초전법륜경에서 명시하였다. 그렇다면 갈애가 일어나기 전에 어떤 조건이 있었을까.

 

이미 존재해 있었던 연기법

 

사성제를 이해 하려면 동시에 12연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초기불교는 모든 교리가 서로 연결 되어 있고 맞 물려 돌아가고 있다. 그 저 한 생각 쉬면 된다느니, 모든 것은 공한 것이라느니,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로는 결코 고통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마치 톱니바퀴들이 맞 물려 굴러 가듯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서로 연결 되어 있다. 그런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연기법의 발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연기는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이전에더 이후에도 존재해 있었지만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래는 통찰지로 그 사실을 보고 깨달으셨을 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요소는 존재해 있었다라고 했다.

(pm.571, 청정도론 주석서)

 

 

청정도론은 5부니까에 대한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대한 주석서에서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출현하기 전에도 있었는데 다만 부처님이 발견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치 만류인력의 법칙 처럼 자연의 근본법칙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이연기 정형구

 

그런 연기법을 대표 하는 것이 12연기법칙이다. 조건지워져 발생하는 12연기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Paicca-Samuppāda                       빠띳짜사뭅빠다

 

순관

 

Avijjāpaccayā sakhārā                      아윗자-빳자야- 상카--

Sakhārapaccayā viññāa                상카-라빳자야- 윈냐-

Viññāapaccayā nāma-rūpa              윈냐나빳자야- -마루-

Nāma-rūpapaccayā saāyatana          -마루-빠빳자야- 살라-야따낭

Saāyatanapaccayā phasso                살라-야따나빳자야- 팟소

Phassapaccayā vedanā                     팟사빳자야- 웨다나-

Vedanāpaccayā tahā                        웨다나-빳자야- 딴하-

Tahāpaccayā upādāna                   딴하-빳자야- 우빠--

Upādānapaccayā bhavo                     우빠--나빳자야- 바워

Bhavapaccayā jāti                             바와빳자야- -

Jātipaccayā jarā maraa                   -띠빳자야- 자라- 마라낭

Soka-parideva-dukkha-                     소까- 빠리데와 둑카

domanassupāyāsā                            도마낫수빠---

sambhavanti                                     삼바완띠

Evametassa kevalassa                      에와메땃사 께와랏사

Dukkhakkhandhassa                          둑칵칸닷사

samudayo hoti                                  사무다요 호띠

 

 

 

역관

 

 Avijjāyatveva asesa-virāga-              아윗자-얏웨와 아세사 위라-

nirodhā sakhāra-nirodho                   니로다- 상카-라 니로도

Sakhāranirodhā viññaanirodho          상카-라니로다- 윈냐나니로도

Viññāanirodhā nāma-rūpanirodho        윈냐-나니로다- -마 루-빠니로도

Nāma-rūpanirodhā saāyatananirodho    -마 루-빠니로다- 살라-야따나니로도

Sa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살라-야따나니로다- 팟사니로도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팟사니로다- 웨다나-니로도

Vedanānirodhā tanhānirodho                웨다나-니로다- 딴하-니로도

Tahānirodhā upādānanirodho             딴하-니로다- 우빠--나니로도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우빠--나니로다- 바와니로도

Bhavanirodhā jātinirodho                     바와니로다- -띠니로도

Jātinirodhā jarā maraa                    -띠니로다- 자라- 마라낭

soka-paridevadukkha-                       소까 빠리데와둑카

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도마낫수빠--- 니룻즈한띠

Evametassa kevalassa                      에와메땃사 께와랏사

dukkhakkhandassa                            둑칵칸닷사

nirodho hoti                                     니로도 호띠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 빠알리어 창송

 

 

 

 

 

 

 

음성 04-hymn-04.mp3(5 40)

Paticca Samupada - Dependent Origination, sung by Visarad Srima Ratnayaka

 

 

 

 

영어

 

Reflection on The Wheel of Life

 

 

순관

 

Dependent on ignorance arise volitional activities

(moral and immoral)

Dependent on volitional activities arises consciousness

Dependent on consciousness arise mind and matter

Dependent on mind and matter arise the six spheres

of sense

Dependent on six spheres of sense arises contact

Dependent on contact arises sensation

Dependent on sensation arises craving

Dependent on craving arises grasping

Dependent on grasping arises becoming

Dependent on becoming arises birth

Dependent on birth arises decay, death, sorrow,

lamentation, pain, grief and despair

Thus does this entire aggregation of suffering arises.

 

 

역관

 

Of a truth, the complete separation from and

cessation of ignorance leads to

the cessation of volitional activities

The cessation of volitional activities leads to

the cessation of consciousness

The cessation of consciousness leads to

the cessation of mind and matter

The cessation of mind and matter leads to

the cessation of six spheres of sense

The cessation of six spheres of sense leads to

the cessation of contact

The cessation of contact leads to

the cessation of sensation

The cessation of sensation leads to

the cessation of craving

The cessation of craving leads to

the cessation of grasping

The cessation of grasping leads to

the cessation of becoming

The cessation of becoming leads to

the cessation of birth

The cessation of birth leads to

the cessation of decay, death, sorrow,

lamentation, pain, grief and despair

Thus does the cessation of this entire aggregate

of suffering result.

 

 

출처: http://www.buddhanet.net/pdf_file/vandana02.pdf

 

 

 

우리말 번역

 

십이연기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상카라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과 비애, 탄식, 고통, 불만족, 고뇌로움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일어난다.

 

 

 

 

 

 

 

십이연기 도표

 

 

 

이처럼 12연기 법칙에서 스스로 홀로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 조건에 따라 일어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종착지는 항상 늙음과 죽음과, 비애, 탄식, 비탄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세가지 갈애

 

사성제에서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을 갈애때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갈애는 느낌(vedanā, 웨다나)’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갈애가 왜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까.

 

12연기 법칙에서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자신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일어 날 때 그 느낌의 맛을 보게 된다. 보통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담한 느낌(평온) 이렇게 셋중 하나이다.

 

그런데 느낌의 맛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갈애부터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애를 일으키는 세가지 느낌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평온은 고요하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설하셨다.

 

 

이 세가지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일어 나는 것이다. 그런데 갈애가 일어나는 순간 업을 짓는 것으로 본다. 그 것은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또 얻지 못한 대상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런 갈애는 청정도론에서 크게 세가지로 분류 한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ama-tanha)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nha)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nha)

 

 

눈의 시야에 들어온 형상의 대상을 감각적 욕망으로 즐기면서 형상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다. 이 것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이다.

 

그 대상은 항상하고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견(常見)과 함께 갈애가 일어난다. 이것이 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그 대상은 끊어지고 멸한다고 생각하는 단견(斷見)과 함께 갈애가 일어난다. 이것이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우빠다나(Upādāna, 집착)

 

예를 들어 누군가를 보았을 때 그 대상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에 맛을 들인다. 그 느낌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크게 존중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갈애이다. 이런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되면 어떻게 될까. 이를 12연기에서는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Upādāna)’이 일어난다고 한다.

 

집착을 빠알리어로 우빠다나(Upādāna)’라 하는데, 이는 딱 들러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실 갈애나 집착은 같은 개념이지만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을 집착으로 본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을 모두 고통의 근원내지,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딱 들러 붙으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는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발생하는데 이를 업유(業有, kamabhava)’라 한다. 업유란 업으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이는 결국 태어남의 원인이 되고, 그 결과는 항상 비탄으로 끝난다.

 

갈애와 루비콘강

 

이처럼 갈애와 집착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을 제거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갈애와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그 중에서도 갈애를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집착은 이미 딱 달라 붙어서 잘 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이전 단계인 갈애에서 끊어 주어야 한다.

 

갈애만 끊어 주면 고통은 해결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본다. 왜냐하면 갈애는 독자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12연기의 법칙에서와 같이 조건에 따라 함께 일어 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 연기의 고리가 끊어지면 고통이 일어 나지 않고,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갈애이고, 이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느낌이 갈애로 넘어 가기 전에 알아차리면 된다고 말한다. 이를 루비콘의 강에 비유하기도 한다.

 

로마시대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음은 돌이 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 났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대로 업력에 따라 갈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는 항상 12연기 사이클 대로이다. 그래서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사이클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것은 이와 같은 윤회의 사이클에서 중생들을 탈출 시키기 위해서 설한 것이다.

 

범부는 미친사람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갈애를 일으키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일까. 이를 잠재성향으로 보고 있다. 축적된 성향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알면서도 갈애를 일으킨다. 도둑이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행하는 이치와 같다. 이를 두고 업대로 산다고 한다.

 

그러나 청정범행을 닦은 이에게는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갈애를 일으키면 분명히 고통을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느낌의 단계에서 알아차린 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갈애를 일으키며 늘 고통속에서 살아 간다. 이를 두고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범부는 미친사람과 같다.

그는 이것은 옳고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무거나 취착하여

아무 존재라도 바라면서

아무 업이라도 짓는다.

 

 

범부를 왜 미친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아무 생각없이 되는대로 살고, 내키는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떠 할까.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길다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살인을 했다면 어떠할까.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평생 씻을 수 없는, 돌이 킬 수 없는 죄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괴로운 느낌이 들었을 때 죽여야 겠다는 갈애로 발전 하지 않았다면 살인으로 발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갈애라는 루비콘 강을 건넜기 때문에 죽여 버려야 겠다는 집착이 들러 붙어서 살생업을 짓고 만 것이다. 그런 선택은 일시적 고통이 아니라 평생가게 되고, 내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생업을 저지르면 이 세상에서도 고통 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 받기 때문에 양쪽 세상에서 모두 고통 받는 다고 한다.

 

도둑질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도둑질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은 축적된 성향에 기인하다.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도벽에 대한 갈애 때문에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될 지 모른다.

 

삿된음행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감각적 쾌락의 탐닉에 벗어 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순간적으로 쾌락을 즐겼지만, 그 쾌락 뒤에 긴 고통이 따를 것이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이 있다. 남을 속여서 사기도 치기도 한다. 일시적으로 이득을 취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자신만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나쁜 버릇 때문에 격리된 장소에서 오랫동안 생활 해야 할 것이다.

 

술을 좋아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매일 마셔서 알콜중독수준이라면 어떨까.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일시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술이 깨고 난 뒤의 몸의 찌뿌둥함, 불쾌한 기분, 더구나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생산성이 떨어졌을 때 술마신것을 후회 하게 된다. 짧은 행복, 긴 불행이라 볼 수 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광고 문구가 있다.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길다라는 말도 있다. 마찬가지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게 되면 순간적으로 또는 일시적 쾌감이나 행복을 맛 볼 수 있지만, 그 결과는 항상 근심, 탄식, 비탄으로 이어 지기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이 뒤따른다.

 

 

 

 

2010-11-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