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태어남과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절망)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28. 00:30

 

 

태어남과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절망)

 

 

 

부처님은 태어남은 모든 괴로움의 토대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태어남 자체가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태어남 만 괴로움일까.

 

삶의 과정에서 수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태어남으로 인하여 죽음을 향하는 과정에 있어서 세월의 변화에 따른 늙음이 진행되고,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되고, 종종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또 싫어 하는 자들과 만나기도 하고, 반면에 좋아 하는 자들과 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도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말 하였다. 이와 같은 괴로움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게송으로 설명하였다.

 

 

태어남(jati)

 

 

만약 중생이 지옥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타는 불길 등 그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

어디에서 발판을 얻으랴.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라고 대성자께서 말씀하셨다.

 

채찍과 막대기와 몽둥이로 매 맞는 축생의 괴로움은 갖가지

그곳에 태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괴로움이 있으랴.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배고품, 목마름, 바람, 태양 등으로 인한

아귀의 괴로움은 여러가지

그곳에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 그것은 없다.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라고 대성자께서 말씀하셨다.

 

짙은 암흑과 극심한 추위와

세상의 끝에 있는 아수라들의 괴로움

그곳에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 그것은 없다.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똥오줌 지옥과 같은 모태에서 중생이 여러 달을 지내고

밖으로 나와서는 무시무시한 괴로움을 받네.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괴로움 없으니

태어남은 참으로 괴로움이다.

 

 

모든 존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도와 과를 성취하여 열반에 들지 않는 한 반드시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다. 그 곳이 천상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서도 태어 날 수 있다.

 

그런데 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고통스러운 곳이다. 따라서 태어남이란 일반적으로인간을 포함하여 악처, 파멸처, 비참한 곳에 태어나는 것이 태어남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괴로움이 없을 텐데, 그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남 자체가 괴로움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태어 났을 경우 삶의 과정에서 어떤 괴로움을 겪을까.

 

 

늙음(jara)

 

 

사지가 무력함으로 감각기능이 쇠함으로

젊음이 사라짐으로 기력이 쇠퇴함으로

기억력등이 희미해짐으로

자기의 가족들조차도 하찮게 여김으로

더군다나 망령이 드는 것으로

인간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나니

이 모든 괴로움은 늙음이 가져온 것

그래서 늙음을 괴로움이라 한다.

 

 

늙어 간다고 생각하면 슬퍼진다. 이빨이 빠지고, 머리카락도 허였게 변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피부는 거칠어 져서 점점 젊음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는 늙음은 변화에 기인한다.

 

늙음이 몸과 마음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격렬한 고통은 아니지만, 이미 형성된 모든 것들이 변화해 가며 소멸하듯이 늙음 또한 서서히 며 소멸과정을 겪는 것에 대한 슬픔, 불만족, 불쾌감이 있기 때문에 작고, 미세하고, 미묘한 괴로움의 일종인 행고(行苦)로 본다.

 

 

죽음(marana)

 

 

임종에 다다라 악업 등의 표상을 보는 악한 자에게도

아끼던 물건과 헤어짐을 견디지 못하는 선한 자에게도

예외없이 모두에게 근육과 관절을 끊는 등의

참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단말마의 육체적인 괴로움이 있다.

 

 

사람이 죽게 되면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일어나며, 이 때 다음 생에 어디서 태어 날 것인가에 대한 표상이 떠 오른다고 한다. 이 때 악업을 많이 지은자는 지옥불과 같은 표상이 떠 오르는데, 그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지옥에서 태어날 재생연결식이 일어나 지옥에 화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악업을 지은 자들은 죽음직전에 왜 고통스러워 할까.

 

그 것은 죽음직전에 자신의 악행을 되새기며 비통해 하기 때문이다. 그 악행과 관련된 표상이 결국 지옥에 태어나 또 다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악업을 지은 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양쪽 세상에서 모두 괴로움을 겪는다. 반면 선업을 많이 지은자의 임종은 어떨까.

 

선업을 많이 지은자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신이 지은 선행을 떠 올리게 된다. 그 선행을 되새김으로서 태어 날 곳의 표상이 떠 오르는데 대게 천상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선행을 많이 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 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즐거워 할 것이기 때문에, 양쪽 세상에서 모두 즐거워 한다.

 

이처럼 태어남은 물론 늙음과 죽음도 괴로움이다. 그 사이 병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결국 생노병사가 괴로움이다. 그런데 괴로움은 생노병사 외에 삶의 과정에 있어서 수 많은 일들이 벌어짐으로 인하여 근심, 탄식, 절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이다.

 

 

근심(soka)

 

 

근심은 중생의 가슴을 찌르는 독화살이다

벌겋게 타는 창으로 중생의 가슴을 지진다.

, 늙음, 죽음, 멸망 등 갖가지 괴로움을 가져오나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안부를 모를 때 속이 타들어 간다.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불타는 것이다. 이처럼 속이 새까맣게 탈 정도로 근심하면 몹시 고통스럽다. 그래서 근심을 고통 그 자체인 고고(苦苦)’라 한다.

 

 

 

 

아소까나무(asoka tree)

근심이 없는 나무라 해서 무우수(無憂樹)라 한다

출처 ; http://www.thaiguidetothailand.com/flora-and-fauna/saraca-indica-ashoka-tree-erotic-love-flower/

 

 

 

탄식(parideva)

 

 

탄식이라는 화살에 찔린 자가 비탄하면서

목과 입술과 입천장이 마르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은 더욱 더해간다.

그래서 세존께서 탄식을 괴로움이라 하셨다.

 

 

누군가 죽으면 울게 된다. 그런데 탄식은 말을 하면서 우는 것을 말한다. 통곡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며 통곡하는 행위는 덕과 허물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청정도론에서 이런 탄식을 행고(行苦)로 보고 있다.

 

 

절망(upayasa)

 

 

절망은 마음을 태우기 때문에

몸을 억압하기 때문에

극심한 괴로움을 더해가나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극심한 정신적 괴로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이 성냄에 뿌리 박았을 때 이를 절망이라 한다. 이것은 마음을 태우고, 슬퍼하는 역할을 하고 우울함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절망은 근심과 탄식과 어떻게 다를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근심은 약한 불로 조리한 냄비속에 있는 익힌 것과 같고,

탄식은 강한 불로 조리할 때 냄비 밖으로 넘치는 것과 같고,

절망은 냄비 밖으로 넘친 나머지가 더 이상 넘칠 수 없어 냄비 안에서 마를 때까지 익히는 것과 같다.

 

 

오취온(pañca-upādāna-kkhandā)

 

태어남은 괴로움이라 하였다. 태어남으로 인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어남은 반드시 근심, 탄식, 절망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식은 12연기 사이클에서 나타난다. 12연기 정형구 중에 태어남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태어남은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절망)으로 이어 진다.

 

 

이렇게 태어남은 괴로움의 총체적인 무더기를 생겨 나게 한다. 이를 청정도론에서는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가지 무더기 자체가 괴로움(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ā)이라고 표현 하였다.

 

그래서 마치 불이 연료를 태우 듯이, 태어남등은 여러가지로 다섯가지 취착의 무더기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색·수·상·행·식의 무더기일 뿐인 자아를, ,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2010-11-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