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아발로키테스바라(관자재보살)와 마하야나의 딜레마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20. 12:54

 

 

아발로키테스바라(관자재보살)와 마하야나의 딜레마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과 더불어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됨에 따라 모든 종교의 교리교의에 대한 회의적 의심이 발생하였다. 기독교의 경우 전에 볼 수 없었던 반기독교적 정서에 따른 안티기독교가 널리 퍼져 가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가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 볼 수 있다. 불교 역시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른 비판을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이다.

 

관자재보살

 

최근 초기불교의 교리와 경전 그리고 수행법의 도입에 따라 기존 불교와 곳곳에서 마찰을 빗고 있다. 특히 교리와 관련된 관점의 차이는 이제 공론화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터넷상에 보여지는 교리에 대한 대표적 갈등이 대승비불설힌두신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승비불설은 대승불교가 생겨 난 이래 오래 전 부터 역사적 논쟁거리이었으나 힌두교신의 불교 유입에 관한 논란은 최근 인터넷의 보급에 따라 넷상에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수경에서 볼 수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일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천수경을 생활경전처럼 여기며 수지독송하고 있는데, 이 천수경의 클라이막스는 단연 신묘장구대다라니라 볼 수 있다. 이 다라니를 독송하면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복과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고 있어서 누구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알고 보니 힌두신을 찬양한 것이라면 과연 수긍할 수 있을까.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와 더불어 우리나라 불자들이 법회의식에서 반드시 독송하는 예불문이 하나 있는 그 것은 반야심경이다. 흔히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은 공사상에 대하여 핵심을 짤막하게 압축요약하여 설명하여 놓은 것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공사상을 설명하는 이가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하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반야심경과 신묘장구대다라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관자재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라고도 불리우는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오게 된 일까.

 

자재신(自在神)

 

남방테라와다불교의 부동의 준거로서 5세기에 붓다고사비구에 의하여 작성된 청정도론에 자재신(自在神)’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세번째 청정인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과 두번째 단계의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설명하는데 자재신을 예로 들고 있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 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조건지워져 발생되는 연기적 흐름으로 보았다. 그러나 자재신은 원인 없이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만일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언제 어느 때나 존재하여야 한다. 그래서 자재신은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적으로 본다면 이런 자재신은 있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며 원인 없이 존재하는 자재신과 자아와 세상은 항상 하다는 개념을 부수는 것이 청정도론의 삼세에 대한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극복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가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십자재(十自在)

 

청정도론에 등장하는 자재신의 자재와 동일한 말이 관자재보살의 자재이다. 관자재보살 역시 언제 어디에서나 시공을 초월하여 자재하기 때문에 중생이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나투는 것으로 묘사 된다. 이는 원인없이 존재하는 보살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중생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 것이 아마 십자재(十自在)’일 것이다.

 

10자재를 설명할 때 관세음보살이라는 말 보다 관자재보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무엇이든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승불교권에서 말하는 10자재는 다음과 같다.

 

 

명자재《命自在

심자재《心自在

업자재《業自在

재자재《財自在

생자재《生自在

승해자재《勝解自在

원자재《願自在

신력자재《神力自在

지자재《智自在

혜자재《慧自在

 

 

이렇게 10가지 자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느 스님은 네번째의 재자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공덕이 쌓이고 모여 재물의 궁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재물 때문에 항상 곤경을 느끼는 것은 지은 바 공덕과 복업이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 전 관세음보살님 전에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이 맑아져 저절로 부처님 전 관세음보살님 전에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

(출처 ; 천수경강의 / 17. 계 청-4.관자재보살의 10자재,)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에게 열심히 기도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것은 관세음보살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 하면 관세음보살이 감응하여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줄 수 있는데 위에 언급된 10자재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재사상은 유일신교와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원인이 없이 존재또는 존재 그 자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법문에서 대상만 바꾸면 어느 종교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원인 없이 존재하는 존재 그 자체라면 도처에 존재 하고 또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존재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기독교의 유일신과 고대인도의 자재신’, 그리고 자재보살은 너무나 닮았다고 보여진다. 그런 관자재보살의 자재의 어원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세상을 응시하는 주인님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śvara)’라 한다. 꽤 긴 이름으로서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이에 대한 어원을 영문판 위키피디아로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asvara)라는 이름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모여져 만들어졌다. 동사적접두어 아바(ava)아래(down)’를 의미한다. 로키타(lokita)는 동사 lok의 과거분사형인데, 여기에서는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보는 것(to notice, observe)’의 뜻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스바라(īśvara)  주님(lord), 지배자(ruler), 주권자(sovereign) 또는 대가(master)로서의 의미가 있다.

 

산스크리트어 음성 법칙인 산디(sandhi)의 조화법칙에 따르면 a+isvara‘esvara’가 된다. 결합된 의미는 응시하는 주인님(lord who gazes down (at the world))’을 의미한다. 단어 로카(loka: 세계, world)는 이름에서 빠져 있지만,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영문판 위키, Avalokitesvara,  http://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스바라는 여러가지 단어가 모여서 만들어진 이름인데 그 뜻은 세계를 응시하는 주인님(lord who gazes down at the world)’이라 한다.

 

 

 

 

 

 

연꽃을 들고 있는 아발로키테스바라

9세기 인도 나란다

(Avalokiteśvara holding a lotus flower. Nālandā, Bihar, India, 9th century CE.

출처 ㅣ http://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

 

 

 

 

구마라집의 오역(誤譯)

 

그런데 중국에서 번역할 때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이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영문판 위키피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국에서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śvara)를 아발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

오역한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왜 현장(602-603)관음(觀音)’ 대신 관자재(觀自在)’로 번역하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오리지날 형태는 끝 부분이 ‘a-svara(sound, 소리)’로 끝나는 정말로 아발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이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소리를 인지하다라는 뜻인데, 문자적으로 소리를 들으려고 내려 보는 이를 뜻한다. 이 것은 중국어 번역어인관음(觀音)’과 정확하게 일치 된다.

 

이런 어원을 따져 가다 보면 쿠마라지바(Kumarajiva, 구마라집, 344-413)과 같은역경가들의 번역 경향에 기인하는데, 이는 관음을 관세음으로 변형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자적으로  이 것은 세상의 고통을 응시하는 자가 되는데, 산스크리트어 ‘lok’보는 것(to look)’세상(world)’을 동시에 뜻하기 때문에 관세음(觀世音)’이라고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후대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7세기 이전 산스크리트어에서 결코 일어 나지 않는 형태로서, 끝 부분이 이스바라(īśvara, 주님, 통치자)로 끝나는 것 대신에 들어 앉은 것으로 보인다. 오리지날 형태인 아발로키타스바라는 5세기 산스크리트어의 문헌에 드믄 드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 , 영문판 위키, Avalokitesvara,  http://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

 

 

관세음과 관자재가 어떻게 생겨 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4-5세기의 구마라집은 아발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에서 ‘a-svara’를 소리(음성)로 알고  이것을 세상이라는 뜻과 동어인 산스크리트어 ‘lok’을 확대해석하여 세상의 소리를 듣는이란 뜻의관세음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번역은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śvara)를 아발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로 잘 못알아 오역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오역이 기가 막히게 보살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반면 7세기의 현장은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를 관자재로 정확하게번역하였다. 산스크리트어 이스바라(īśvara, 주님) a와 결합되면 산스크리트어 법칙상 에스바라(esvara)’가 되기 때문에 세상을 응시하는 이란 뜻의 관자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구마리집의 세상 소리를 듣는이(관세음)’세상을 응시하는 이(관자재)’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서역의 불교

 

구마라집과 현장이 살던 시대는 다르다. 구마라즙이 4세기 말에서 5세기초에 활동하였다면 현장은 7세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약 2세기 이상의 공백이 있는데 이는 불교의 전래와 도입과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문화가 높은 곳에서 문화가 낮은 곳으로 전래되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서역에서 온 구마라집과 같은 역경승들이다.

 

역경승들은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는데, 초기의 역경승들은 인도출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금강경과 법화경을 역경하여 가장 잘 알려진 구마라집 역시 인도출신이 아니라 서역출신이다.

 

인도불교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투르키스탄이나 타림분지등 실크로드가 있는 서역에 전파 되어 있어서 초기 역경승들이 인도출신은 아니지만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자유자재로 볼 수 있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에 경전을 역경하여 중국에 불교를 전파한 것이다.

 

그런데 서역의 불교는 인도의 불교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서역의 문화와전통은 페르시아와 같은 서방의 영향이 컷으므로 신앙적 측면의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미륵신앙, 미타신앙등 각종 불보살 사상과 더불어 관세음보살사상도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입장에서 본 다면 불교의 전래에 해당 될 것이다.

 

 

7세기에 인도에서 어떤 일이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가 널리 퍼져 나가자 중국의 승려들은 서역의 역경승이 번역한 경전과 서역을 경유한 불교에 의존 하기 보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 가서 직접배워오기를 열망하였다. 그런 인물 중의 하나가 7세기의 현장법사이었다. 이 단계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전래가 아니라 도입기에 해당 된다.

 

누군가 전해 주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전래라면, 직접가서 배워 오는 것이 도입이라 볼 수 있는데 현장의 인도방문은 전형적인 도입불교라 볼 수 있다. 이는 문화적으로 매우 발전된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 현장이 방문하던 7세기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현장법사가 인도를 방문(629-645)하였을 당시 인도의 대승불교는 끝물에 해당 된다. 기원전 1세기 부터 시작된 대승운동이 7세기가 되자 급격하게 약화 되는데, 공교롭게도 현장의 체제기간에 뒤이어 의정(635-713)이 인도에 들어 갈 때까지 약 30년사이에 불교는 급속히 힌두이즘의 영향을 받은 밀교화가 이루어 진다. 

 

이 시기 밀교화 된 대승불교는 종래의 불보살이외 새로운 예배대상으로서 힌두이즘의 예배대상을 받아 들이게 된다. 현장이 번역한 반야경 중의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관자재보살 말 역시 대승불교가 밀교화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7세기 이전에 자재를 뜻하는 이스바라(īśvara, 주님)의 번역어가 보이지 않았고, 소리를 뜻하는 ‘a-svara(소리)’ 의미 단어인 아발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세기 현장이 방문 하였을 무렵 불교는 힌두교와 습합이 되면서 불교와 힌두교의 구별이 거의 없어질 정도로 힌두이즘화 되었다. 따라서 자재신을 뜻하는 이스바라(īśvara, 주님)’의 뜻이 담긴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관자재로 정확하게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이비즘(Saivism)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반야심경의 관자재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쇠퇴하고 힌두이즘화된 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영문판 위키피디아서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그 이름에 대한 원래의 의미는 불교도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보살로서의 역할이다. 이스바라(īśvara)로서의 그 보살에 대한 표현을 재해석 한다면 사이비즘(Śaivism)의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이스바라(īśvara)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a creator god)과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의 지배자 (ruler of the world)로서의 힌두적 개념인 시바(Śiva)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신이 보살로 변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발로키테스바라를 존경하며 따르는 주류 불교도들은 창조자로서의 신이라는 교의를 거부한다.

(출처 , 영문판 위키, Avalokitesvara,  http://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

 

 

여기서 사이비즘(Śaivism, Shaivism)은 바이슈나이즘(Vaishnavism), 삭티이즘 (Shaktism), 스마르티즘(Smartism)과 함께 힌두이즘을 구성하는 4개의 커다란 요소중의 하나이다.

 

 

 

 

 

 

시바(shiva)

시바는 사이비즘(Shaivism)에 있어서 최고의 신격(deity)으로 드러난다

 

 

 

이는 최상의 존재로서 시바를 경배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바는 모든 것(all)것과 존재 그 자체(in all)로서 즉 창조자(creator)이고 동시에 보존하는 자(preserver), 파괴자(destroyer), 드러낸자(revealer), 감추어진자(concealer)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어떤 현대의 학자들은

 

오늘날 대승불교도들은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이라 불리우는 아발로키테스바라에 대하여 신심있는 불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기 때문에 커다란  경배의 대상으로 보는 보살로 본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니르바나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성불을 늦추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또한 티벳불교에서의 아발로키테스바라는 자비로 헌신한 승려가 보살이 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이는 달라이라마, 카르마파, 그리고 다른 고승라마로 환생된다고 믿고 있다.

 

테라와다 전통의 주류는 그 어떤 보살도 숭배하고 있지 않지만 버마나 태국의 일부에서 아발로키테스바라는 인기 있는 보살이라 한다. 그 이름은 여성형인데 버마에서는 로카낫(Lokanat)’으로 부르고, 태국에서는 로케스바라(Lokesvara)’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현대의 학자들은 아발로키테스바라에 기원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여전히 시바또는 비시누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신격이 마하야나 불교에 유입되었거나 빌려온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하야나의 딜레마

 

아발로키테스바라라는 용어가 7세기 대승불교가 힌두이즘의 경배대상을 받아 들인 밀교로 급격하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현장이 번역한 관자재역시 힌두이즘화된 불교로 보는 밀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자재라는 말은 원인 없이 존재한다라는 뜻을 가졌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과도 맞지 않을 뿐더러 비불교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자재라는 말은 동아시아 불교의 경전에 고스란히 남아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승불교의 끝 무렵 인도로 구법여행하여 가져온 대승경전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발로키테스바라를 아발로키타스바라로 오역하여 관세음보살로 번역한 구마라집이 현재 시점으로 본다면 정역이 된다. 반면 아발로키테스바라를 관자재로 정확하게 번역한 현장은 오늘 날 힌두교의 사이비즘의 강한 영향을 받은 번역이라는 오해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천수경에서 보는 관자재는 힌두이즘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수 많은 신의 이름이 시바비시누의 화신들이고, 더구나 이들이 소지한 연꽃, 차크라, 소라고둥, 큰 방망이와 같은 지물 또한 그들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관자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 대신 구마라집이 번역한 관세음을 사용하면 되겠지만, 바꾸어 넣는 것  또한 쉽지 않을 듯 하다. 이 것이 마하야나의 딜레마가 아닐까.

 

‘넌센스가 벌어질 지도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발달한 글러벌 시대에 대승불교의 정체성에 심각한 의문이 뒤따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를 대표 하는 조계종단에서 강원교육 시간에 아비담마논장과 청정도론과 같은 초기불교 교과과정을 도입한다고 한다. 그러나 마하야나와 초기불교는 서로 다른 불교라고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여러 모로 부딪치는 현상이 많이 발생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초기불교를 비판하며 발생된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공존하는 시대가 한 동안 계속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초기불교를 공부 하면서 예불시간에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넌센스가 벌어질 지 모른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어느 초기불교 수행처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한다는 이유로 멀리 하였다는 내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신봉자들은 자재신을 연상시키는 용어와 더불어 보살을 내세워 부처님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고, 더구나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존재를 능멸하는 듯한 내용의 반야심경 때문에 독송하는 것 조차 꺼려 한다. 과연 한국불교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헤쳐 나 갈 수 있을까.

 

초기불교가 점점 확산 됨에 따라 관자재라는 말이 들어 가 있는 대승경전의 정수 반야심경이 용도폐기되고, 그 자리에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전법륜경(Dhammacakka Sutta)’처럼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경전을 독송할 수 있는 날이 기존의 대승종단에서 과연 가능할까.

 

 

 

 

2010-11-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