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와 불성(佛性)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23. 12:56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와 불성(佛性)

 

 

 

불교방송의 청취율

 

불교의 유일한 라디오 방송은 ‘bbs불교방송이다. 불자가 천만이 넘는다지만 라디오 방송은 오로지 하나인데, 이는 기독교의 cbs , 극동방송등 여러 개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적다고 볼 수 있다.

 

불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 어렵게 탄생한 불교방송은 불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의지처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불교방송을 누구 보다 열심히 듣고 사랑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종교방송의 청취율은 얼마나 될까.

 

2006년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종교방송의 청취율이 3%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국적으로 MBC 23.2%, SBS 17.8%, TBS 7.5%, BBS불교방송이 1.0%, CBS기독교방송이 1.1%라 한다.

 

그런데 대구의 경우 BBS 6.4%라 한다. 이는 대구지역의 불자수가 많은 원인도 있지만 좋은 프로그램 때문이라 한다. 그런 프로 중의 하나가 좋은 날 좋은 인연이라는 음악프로램이라 한다.

 

방송권력

 

이처럼 불교음악프로그램은 불자들의 청취율을 높이는 수단이라 볼 수 있다. BBS불교방송 중에도 그런 음악프로가 있는데, 그 것은 정목스님이 진행하는 마음으로 듣는 음악이다. 그런데 정목스님의 프로를 듣다가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정목스님의 방송에 대한 비판을 몇 차례 했었다. ‘불성참나와 관련된 이야기이었다. 그런데 그 글을 읽었는지 몰라도 인터넷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마치 특정인을 겨냥하여 방송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런 방송을 듣자 무척 당혹스러웠다. 전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또는 인터넷으로 듣는 해외 불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서 일개 인터넷의 네티즌을 겨냥하여 매우 직설적으로 비판 하는 듯한 방송을 듣자 일종의 방송권력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표적설교

 

미션스쿨에 다닐 때이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웠다는 고교에 배정 받아서 3년간 억지로 다녔는데 그 학교는 기독교의 설립이념에 투철하였다. 그런 이념은 교훈에도 그대로 반영 되었다. 그 학교의 교훈은 기독적 인격이었다. 그래서 일까 학사일정은 기도와 찬송이 거의 끊이지 않을 정도 이었다.

 

매주 두번 방송예배가 있고, 성경시간이 있고, 매월 전체 예배등 학교의 학사일정이 마치 교회처럼 보였다. 특히 전 학년이 운동장에 모이는 전체예배에서 강사로 초빙된 어느 목사는 학생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듯 하였다.

 

그 목사는 설교에서 아직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아직도 자신의 신인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않고, 심지어 마음속으로 부정하는 학생들을 향하여 질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런 설교를 표적 설교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류의 표적설교는 비일비재 하다는 것이다.

 

설교위주의 기독교의 경우 종종 특정인을 향한 표적설교를 한다고 한다. 주로 반대파을 몰아 내리는데 매우 유효한 수단이라 한다.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이용하여 상대를 몰아세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런 표적설교와 유사한 것이 표적방송이라 볼 수 있다.

 

비판으로 성립한 종교

 

누구든지 비판을 할 수 있다. 비판(批判)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다. 비방(誹謗)은 ‘남을 비웃고 헐 뜯어서 말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건전한 비판은 조직과 사회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비판이 없다면 권력은 부패할 것이고, 종교 또한 빗나갈 것임에 틀림 없다.

 

대부분의 고등종교는 기존의 종교를 비판 하며 성립되었다. 기독교의 경우 유대교를 비판하여 성립되었고, 불교 역시 브라만교를 비판 하며 성립되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창조신과 스스로 원인 없이 존재 하는 자재천과 같은 브라만을 비판하여 대망어(큰 거짓말)를 짓는 것이라 하였다. 또 아트만과 같은 불변하는 영혼은 있을 수 없고, 다만 연기적 흐름에 따른 조건 지워져 발생하는 임시적인 나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난 후 대승운동이 일어나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비판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비판의 절정은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 150?-250?)’라 볼 수 있다.

 

‘8종의 조사(祖師)’용수

 

용수는 고정적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모든 것을 파기 하였는데, 이 파기의 논리가 공()이다. 공성(sunyata)’이 바로 연기라 하고, 제법이 무자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연기=무자성=의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의 실상이라고 공가중(空假中)’ 삼제로 설명하였다.

 

특히 삼제중에 공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 십이연기, 열반, 업등에 관한 교설을 모조리 비판하였다. 결국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된 것이 마하야나이다. 이처럼 용수는 종래의 불교사상을 정리하고 체계화 하였으므로 중국과 한국과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에서 그를 ‘8종의 조사(祖師)’라 부르고 있다.

 

그런 용수의 사상은 7세기 힌두이즘의 영향을 받은 밀교로 급격히 바뀌고 결국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지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용수의 가르침은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를 방송에서 들을 수 있는데 불교방송의 정목스님이 진행하는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에서 들을 수 있는 치유의 기도라는 것이다.

 

불교와 기도

 

불교에 기도라는 말이 적합할까. 기도와 불교는 서로 어울리는 것일까. 그런데 유일신교에서나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기도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수능시험에서 고득점을 바라는 입시기도에서 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철야기도에 이르기까지 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 절에서 정기적으로 치루는 법회도 기도라 칭한다.

 

신중기도(음력 1-3), 입춘기도(양력 2 4), 칠석기도(음력 7 7), 인등기도(매월 음력3), 미타기도(매월 15), 지장기도(매월 음력 18), 관음기도( 매월 음력24), 우란분재기도등 이루 말 할 수 없는 수 많은 기도의 종류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 조상들은 예전에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불교에서 언제부터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유입되고 나서 부터임은 확실하다. 그 것도 최근 일 이십년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기도라는 말 대신 무슨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원래 불공(佛供)’이라는 말을 사용 하였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불공을 말한다. 이는 무언가 바라기만 하는 기도와 다른 것이다.

 

불공(佛供)이란

 

기도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하느님, , 초월적 영역, 초자연적 세력 등 신성하거나 거룩한 존재와 대화하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신앙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연기법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배치된다. 그렇다면 불교의 공양은 어떤 것일까. 마성스님은 불공에 대하여 다음과 설명한다.

 

 

“부처나 보살에게 음식·향·꽃 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치는 의례,

또는 그것을 바치며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의례”

(마성스님의 ‘집에서 불공 올리는 방법’에서)

 

 

불공은 부처님에게 공양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마성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첫째, ()·법()·승()의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

(마성스님의 ‘집에서 불공 올리는 방법’에서)

 

 

여기서 네번째인 절에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제외 하면 모두 적극적인 의미의 발원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공양은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유의 기도

 

그런데 방송에서 치유의 기도를 보면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요소가 농후함을 알 수 있다. 그런 치유의 기도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치유의 기도

 

모든 중생들을 위해 지금까지 무수한

붓다들께서 출현하셨지만

붓다들이 제 곁에 있다 하더라도

제 눈이 어둡고 어리석어

아직도 직접 부처님들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오늘은 건강하고 먹을 것도 있고 큰 어려움이 없다 해도

삶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이 몸은 이 생애 잠시 빌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선업을 지을 수 있는 인연과 기도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났을 때에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부터 이 몸을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나룻배로 여기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저는 이렇게  발원합니다.

 

몸과 마음 정신 어디에 함께 있든 우리의 모든 고통이

불성의 밝고 투명한 빛 속에 녹아 들게 하소서.

전생에서 얻었던 모든 기쁨과 지혜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전생에서 느꼈던 모든 슬픔과 두려움, 질병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이번 생에서 얻었던 모든 기쁨과 지혜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슬픔과 두려움, 질병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제가 무엇을 하든지 결코 남들에게 해가 되지 말고

누구든지 저를 만날 때마다 좋은 이익 얻게 되소서.

사람들이 저에게 화를 내든 칭찬을 하든

그것이 곧 그들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원인이 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저를  비난하며 해치거나 모욕을 주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기 바라며 오히려 그로 인해 깨달음 얻으소서

 

전 생애를 통해 나와 인연 지은 모든 존재들에게

부족했던 지난날을 용서바랍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bbs불교방송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사진 ; http://www.humanecology.com.au/network.htm

 

 

 

 

비록 발원의 형식을 보이고 있을지라도 그 내용을 보면 절대자나 초월적존재에게 의지하여 바라는 기도형식을 띠고 있다. 단지 그 대상이 불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기도문에서 불성을 다른 대상으로 바꾸면 어느 종교인지 구분이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현상을 발견 하였다.

 

기독교의 치유의 기도와 비교해 보니

 

인터넷에서 치유의 기도를 키워드로 하여 검색한 결과 치유의 기도는 기독교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와 유사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생에서 느꼈던 모든 슬픔과 두려움, 질병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에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부모님의 사랑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이 함께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외롭고 서운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감정을 '재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주님께 맡깁니다(벧전 5:7; 11:28-30).

(출처; 치유기도,http://blog.daum.net/qksmwlf33/5994499?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qksmwlf33%2F5994499)

 

 

기독교의 치유의 기도는 매우다양하고 구체적이다. 그 중의 하나가 부모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부모님과의 서운했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단지 대상이 불성이냐 하나님 아버지냐의 차이만 다를 뿐 그 내용은 비슷하다. 또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이 저에게 화를 내든 칭찬을 하든

그것이 곧 그들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원인이 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저를  비난하며 해치거나 모욕을 주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기 바라며 오히려 그로 인해 깨달음 얻으소서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에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해치며 모욕을 주더라도 그로 인해 고통 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치유의 기도 문 역시 말미에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우리가 기도를 끝내었습니다. 사역자나 내담자 모두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거룩하게 해주시고 천군 천사를 보내어 우리 주변에 진치게 해주셔서, 혹시 이 자리에 서성거리고 있는 모든 흑암의 세력들로부터 보호해주시고 이들이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출처; 치유기도,http://blog.daum.net/qksmwlf33/5994499?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qksmwlf33%2F5994499)

 

 

이 두개의 기도문에서 기도의 대상 즉, 불성과 하나님을 빼버리고 골자만 적어 놓는다면 분별하기 쉽지 않다.  이 것은  기도의 대상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이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깨달음과 불설(佛說)

 

이런 기도문이 어느 경전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이른바 방송스타스님들은 나름대로 만든 자신만의 메세지를 만들어 방송을 이용하여 전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행복도 불행도 내 작품이다등으로 시작 하는 행복창조10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들은 경전에 근거 하는 이야기를 하기 보다 왜 자신만의 어록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 것은 아마도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말도 불설(佛說)로 보는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논리는 결국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등과 같이 별도의 대승불교 경전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선 대승논사들이 자신의 체험을 불설로 가탁하여 경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선사들의 법문이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 보다 자신의 깨달음이나 체험위주, 심지어 신변이야기등으로 일관하는 것도 깨달은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씀(불설)이라는 대승불교의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행복10선이나 치유의 기도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삼보(三寶)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자들의 최대 인기 방송인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정목스님은 방송이 끝날 때 다음과 같은 멘트를 날린다.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올립니다

 

 

키워드는 불성이다. 그 불성은 나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있고,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불성은 신성한 빛이고 거룩하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 그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올리자고 말한다. 그런데 경배올려야 대상이 왜 불성일까.

 

불교의 경배의 대상은 무엇일까. 불교를 신봉하는 어느 나라, 어느 종단이든지 불교인들의 경배의 대상은 부처님(, Buddha)’부처님의 가르침(, Dhamma)’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 Sanhga)이다. 그런 경배의 대상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신성한 불성이라니 대체 그 불성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 것도 경배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불성은 어떤 소원도 다 들어 주는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일까.

 

유신(有神)적이고, 타력적이고, 비불교적인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떠나 그 어떤 대상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 무더기(오온)’으로 분리하여 설명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고정된 자아나 불변하는 영혼’, ‘초월적 존재와 같은 개념이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그런 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 이었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단지 일어났다가 조건을 남기며 사라지며 상속하는 연기적 흐름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한 존재에게 일어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이 더 이상 형성 되지 않았을 때 연기가 끊어진 것이고, 그 상태를 닙바나(열반)’라 하였다.

 

그런 열반은 으로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룩한 경배의 대상도 아니다. 그 것은 한 존재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설명 할 수 없는 것(無記)’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궁극적 실재가 있다거나, 존재 그 자체, 절대유가 있다고 하여 경배 한다면 이는 유신적이며 타력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일까

 

실제로 스님의 방송을 들어 보면 천주교나 개신교인을 의식해서 인지 그들의 믿음 또한 용인하는 듯하며, 이는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라는 뉘앙스로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유일신의 사상은 결코 같을 수 없다. 한 낱 인간이 마음에서 만들어 낸 개념의 종교와 이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알아차리는 불교는 결코 같은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힌두교이든 세상의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라면 어느 한 곳에서 만날 것이다. 그것을 불성이라고 하고, ‘브라만이라 하고, ‘알라라 하고, ‘야훼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와 같은 명칭은 모두 실재 하지 않고 단지 이름이 붙여진 개념(paññ atti, 빤냣띠)’에 불과 하다.

 

치유의 기도문에서 “~하소서로 끝나는 것을 보면 유신(有神)적이고, 타력적이고, 비불교적인 기도문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신성한 빛으로 된 거룩한 존재가 경배의 대상이라 하는데, 자꾸 유일신교의 그 것과 오버랩된다. 나만 그런 것일까.

 

 

 

 

 

2010-11-23

진흙속의연꽃 

 

 

2010-11-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