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그리고 윤회의 바다와 ‘섬’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3. 15:25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그리고 윤회의 바다와

 

 

 

 

 

 

 

 

 

삶의 과정에 있어서 수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대부분의 일은 자기자신의 힘으로 처리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이다. 또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적인 일들도 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 한다.

 

마치 떠내려 가는 강물에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에서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자기자신을 내 맡기거나 떠 넘기는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위기에 처 했을 때, 절망하였을 때 자신 외에 무언가 다른 대상에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불교도는 누구에게 의지 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의지 해야 하는가

 

불자들이 의지해야 될 대상은 당연히 불법승삼보이다. 삼보외에 다른 대상에 귀의 하고나 의지 하거나 피난 하는 것은 진정한 불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삼보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불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먼저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 된다. 그리고 재가불자라면 오계를 받고, 출가불자라면 승단의 계를 받는 것으로 불교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 귀의 대상인 삼보는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의 아상가교수는 불교tv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은 고로 부터 해탈하기 위한 스승으로 받아 들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에서 해탈로 가는 정확한 과정으로 받아 들이고,

출가제자들은 결과를 이룬 사람들로 받아 들인다.

(아상가 교수, 불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불교tv,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5&PID=P518&DPID=46589)

 

 

아상가 교수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표현 하였다. 이는 안내자(guide)’라고도 볼 수 있다. 또 가르침을 고통을 여의고 해탈로 가는 과정으로 받아 들였다. 이는 목적지를 찾아 가는 지도(map)’와 같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출가제자들을 결과를 이룬 사람들이라고 하는 데 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안내자로서의 상가(Sangha)

 

우리나라 불자들은 일반적으로 스님들을 귀의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한글 삼귀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삼귀의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스님들은 귀의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못 박는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이와 달리 해석한다. 아상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세번째인 상가는 불교에 있어서 보편적인 용어이다. 애초에 이 용어는 모든 사부대중을 지칭 하는 용어 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상가라는 말이 공동체또는 부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를 의미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좀 더 면밀히 말하면 일반제자 누구나가 아닌 것이다. 이 때의 상가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매를 거둔 제자들을 의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를 성취하고 열매를 거두는 것이 오직 출자자들에만 고정된 것은 아니다.

 

물론 출가자들이 수행을 하기에 더 나은 환경에 있지만 도를 이룬 재가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가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정신적 해탈의 높은 경지에 이른 누구나에게 해당 된다든 것이다.

 

그러나 점차 깨달음을 위해 더욱 더 매진 하는 이들이 출가자이기 때문에 상가는 출가자들, 즉 비구와 비구니들을 지칭하게 되었고, 비구니 맥이 이어지지 못한 테라와다에서느 상가는 다만 출가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든 도을 이뤄 열매을 거둔 이는 상가로 여겨지고, 출가자에게만 국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상가에 귀의 한다는 의미는 안내자로서의 상가에 의지 하는 것이다.

 

 

불자들이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은 결국 고통으로 부터 해탈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불교의식이나 행사에 있어서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상가에 귀의 합니다라고 함으로써 삼보에 대한 헌신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런 상가는 기본적으로 도와 과를 이룬 이들의 상가를 말하고, 반드시 출가자에게만 국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가에 귀의 한다는 것은 안내자로서의 상가를 말한다.

 

여기서 안내자는 부처님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안내자로서의 상가는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에 이른 성스런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도시에서 제대로 된 정법사찰이 없다 보니 불자들은 실질적으로 삼보를 접하기 힘들다. 그 대신 실재하지 않지만 안내자로서의 부처님과 가르침, 이렇게 2보만 있게 되는 현상이 발생된다.

 

우리나라 불자의 99.8%는 재가 불자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가 스승을 갖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극소수의 출가자만이 스승을 갖기 때문에 불법승 삼보에 의지 하는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다.

 

스승이 없는 대부분의 불자들은 부처님과 가르침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 그 것도 경전을 통해서이다. 상가를 접할 수 없는 불자들은 의지의 대상이 부처님과 담마뿐이다. 그런데 경전을 통해서 본 의지의 대상은 삼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보(二寶)도 아니고 차라리 일보(一寶)에 가깝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 유훈을 남겼다. 불자들이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다. 이 말은 다른 것에 귀의하거나 의지 말고 오로지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불자들이 현실적으로 의지 할 곳은 자기자신가르침(, Dhamma)’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

 

부처님은 유훈에서 자기자신과 가르침에 의지 하라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불자들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한자역어인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과연 맞는 말일까.

 

잘못된 번역

 

인터넷시대에 초기불교와 관련된 자료를 접하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마성스님의 글이다. 인터넷 정보의 바다에 떠 다니는 스님의 글은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주옥같은 내용이다. 대부분 초기불교와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부처님과 관련된 글이다. 그런 글 중에 최근 자등명 법등명에 관한 글을 발견 하였다. 2003년 불교학연구회에 발표된 自燈明 法燈明 번역에 대한 고찰에 관한 글이다.

 

이 논문에서 스님은 한 마디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 잘 못 번역된 것이라고 지적 하였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아닌 ‘자주(自洲) 법주(法洲)’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 말로 표시 하면 자신을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등불과 섬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리고 왜 이런 번역의 오류가 발견 되었을까. 이에 대한 설명이 논문의 맺음말에 다음과 상세히 표현 되어 있다.

 

 

팔리경전에서 발견되는 ‘attadīpa dhammadīpa’를 현재의 번역가들은 물론 과거의 중국 역경승들도 각자 달리 번역하였다. 이러한 다른 번역의 원인은 팔리어 dīpa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 단어는 등불(lamp)과 섬(island)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등불과 섬 중에서 어느 의미로 사용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남북전의 원문과 여러 번역본들을 비교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붓다는 여기서 섬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경전적 증거[經證]가 바로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과 주석서에서 ‘dīpa’는 피난처(tāna), 동굴(lea), 운명(gati), 목적지(parāyaa), 의지처(sara-a) 등과 같은 동의어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증거는 ‘attadīpa dhammadīpa’를 다루고 있는 팔리본에 대응하는 범본과 서장본은 물론 간다라 언어로 씌어진 법구경에서도 등불(dvīpa)이 아닌 섬(dīpa)으로 표기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붓다께서 처음 ‘attadīpa dhammadīpa’의 정형구를 설할 때에는 등불이 아닌 섬의 의미로 사용했음이 거의 확실해졌다. 따라서 ‘attadīpa dhammadīpa’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아닌 ‘자주(自洲) 법주(法洲)’임이 밝혀진 것이다.

 

<自燈明 法燈明 번역에 대한 고찰, 이 수창(摩聖),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 고찰_마성스님.hwp

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 고찰_마성스.docx

 

 

 

이렇게 혼동스러운 이유는 빠알리어 디빠(dipa)에 있다. 디빠가 등불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는 섬은 dvipa, 등불은 dipa로 철자가 다르다. 이는 빠알리어 경전을 산스크리트로 옮기느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로 보인다. 이런 오류를 한역한 결과 등불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윤회의 바다와

 

마성스님은 빠알리어 앗따디빠(attadipa)자등명(自燈明)’으로 번역하면 유아(有我)의 상견(常見), 즉 영혼불멸론 혹은 유아론(有我論)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앗따(Atta)’를  아뜨만(Ātman)으로 혼동하여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혼을 구하라는  의미로 쓰여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빠(dipa)를 등불이 아닌 으로 번역하면 자신을 섬으로 삼아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잘 맞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경전의 주석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큰 바다의 섬처럼 안전한 곳인 섬을 네 자신의 안식처로 하여 안주하라.”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 윤회의 바다로 보고, 고통의 바다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전을 위하여 바다에서 필요한 것은 섬이지 등불이나 등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스런 윤회의 바다에서 안전한 곳은 섬만이 아닐 것이다. 그 것은 동굴이 될 수 도 있고, 피난처, 귀의처가 될 수 있다. 이 것은 구제적인 장소로서 추상적 의미를 갖고 있는 등불과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디빠(dipa)  왜 섬이라는 뜻으로 사용 하였을까.

 

절대자와 연기의 법칙

 

부처님은 대반열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 자신을 너의 섬(, 依支處)으로 하고 법을 너 자신의 귀의처로 하지, 다른 누구도 너의 귀의처로 하지 말며, 법을 너의 섬으로 하고 법을 너 자신의 귀의처로 하지 다른 무엇도 너의 안식처로 하지 말라”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 슬퍼 하는 아난다에게 한 말이다. 스승이 죽은 후에 가르침을 따르던 무리들이 고독하고 의지 할 것이 없고,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때 위로와 용기를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한말이다. 그 때 부처님은 자기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고, 의지처로 하라고 말씀 하였다.

 

 

그런데 마성스님은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나약해 질 때,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때 붓다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대상은 본래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도 분석해 보면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며, 모든 현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상호 의존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따라서 절대 불변의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섬이나 피난처구호소귀의처로 삼아야 하며, 법을 섬이나 피난처구호소귀의처로 삼아야지 별도의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설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自燈明 法燈明 번역에 대한 고찰, 이 수창(摩聖),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치면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어 지는데 대게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맡겨 버린다. 그러나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연기적 흐름임을 안다면 어느 곳에도 의지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불변하는 영원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믿을 것은 자기자신과 부처님의 법 이외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념처와 알아차림

 

불자라면 불법승 3보에 의지 하여야 한다. 그런 삼보는 부처님(Buddha)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Dhamma),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몸소 경험 하였던 그 길에 다다른 성스런 제자들의 공동체(Sangha)이다. 그런데 성스런 상가가 없다면 의지 할 곳은 두 곳으로 줄게 된다. 두 곳도 안내자로서의 부처님은 실재하지 않고 오로지 가르침만 남아 있다면 현실적으로 의존 할 곳은 가르침(담마, )하나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 당시에 자기자신과 담마에 의지 하라고 하였다. 그 것이 북방불교에서 말하는 자등명 법등명이다. 그러나 이는 잘 못된 번역이고, 더구나 부처님이 바라마지 않았던 아뜨만, , 무의식적으로 영원한 존재. 다시 말하면 소아(小我)로서의 작은 개인적 자아(自我)가 아니라 대아(大我)로서의 커다란 자아를 인정하고 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자등명 법등명이란 말 대신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담고 있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고...”와 같은 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이 윤회의 바다, 고통의 바다에서 구원해 주지 않는다. 절대자에게 의존 하여 주여! 주여!” 하며 외쳐도,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명호 해도 기적은 일어 나지 않는다. 기적은 자신의 마음을 바꿈으로서 일어난다. 그 방법이 알아차림이다.

 

바로 그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 사념처이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눈문의 마지막에 사념처관(四念處觀, catusatipaṭṭhānas)을 들고 있다. 이 사념처관()의 수행을 통해 스스로 아라한과 혹은 열반을 증득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 자기야말로

 

모든 갈등의 원인은 자신으로 부터 생겼다. 그 마음을 다시려야 하는데 이미 부처님이 그 길을 닦아 놓았다. 우리는 그 닦아 놓은 길로만 가면 된다. 그 가장 손쉬운 방법은 마음을 현재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결국 자기자신의 문제이다. 자기자신만이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다. 따라서 자기자신이 의지처가 된다. 부처님도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tā hi attano nātho                 앗따 히 앗따노 나토

ko hi nātho paro siyā              꼬 히 나토 빠로 시야

attana hi sudantena                 앗따나 히 수단떼나

nātha labhati dullabha        나탕 랍바띠 둘라방

 

진정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

어떻게 남을 자기의 의지처로 삼으랴?

자기를 잘 단련시킴으로써만

자기를 의지처로 만들 수 있는 것.

이는 실로 성취하기 어렵다.

 

(법구경 160번 게송)

 

 

 

2010-12-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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