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병상의 환우를 위하여, 기리마난다경(Girimananda Sutta)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8. 12:30

 

 

병상의 환우를 위하여, 기리마난다경(Girimananda Sutta)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없다

 

세상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그 것은 자신이 ()’를 닦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거의 대부분 사람들로 부터 비난을 받기 일쑤이다. 그냥 들어 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래서 남들과 이야기 할 때, 가족에게라도 자신이 도를 닦고 있다는 이야기를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도는 세상사람들이 추구 하는 방향과 정반대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세상에서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

 

 

인터넷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카페에서 올려진 글을 보면 자신이 대단한 도를 이룬 양 쓴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경우 상대방을 인정하기 보다 우선 반감 부터 앞서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일 것이다.

 

더구나 도를 전문으로 닦는 사람인지, 많이 공부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블로그와 같은 정보를 공개 함이 없이 단지 익명의 필명으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글이나 tv화면 또는 책에 득도했다고 소개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도를 닦아 과를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몸과 마음이 사라져 더 이상 마음이 일어 나지 않았을 때 그 상황은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 사람의 행동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언행일치가 되는지, 관용, 자애, 지혜가 넘쳐나는지등으로 판단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기 (無記, avyākata)라 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설명한다는 것은 자아가 있는 상태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다음과 같은 글일 것이다.

 

 

()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가장 나쁜 죄로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닙바나의 ''자도 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열반을 스스로 체험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이미 나의 제자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깨달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진짜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깨달음에 이른 자는 있어도 깨달은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이미 그 자체가 유신견이 파괴된 무아(無我)의 상태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깨달은 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묘원법사,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없다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1u6b/105)

 

 

빛을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일까

 

불자들이 즐겨듣는 불교방송 중에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가 있다. 이 프로에서 명상하는 방법에 대한 낭송문을 매번 들을 수 있다. 그 명상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제 편안~한 자세로 앉아보십시오.

등과 허리를 곧~게 펴고 가슴을 활짝 열어 보세요.

깊이~ 숨을 한 번 들여 마시고~ 내쉬어줍니다~

눈은 감거나 뜨거나 자유롭게 하십시오.

눈을 뜨고 있는 분들은 시선을 편안~한 지점에 아래로 툭~ 떨어트려 놓으세요.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온~ 몸에 긴장을 천~천히 마음의 눈으로 풀어내려가 보십시오.

다시 한 번 깊이~ 숨을 들여 마시고~ 내쉬어 줍니다~

이제 배꼽 아래 단전에 마음을 집중해 보십시오.

조용~히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세요.

‘당신이 앉아있는 몸 주변에 밝은 빛이 둥그렇게 감싼다.’ 상상하십시오.

이제 ‘그 빛이 점점 넓게 퍼지면서, 당신이 있는 공간을 에워싼다.’ 고 생각하십시오.

이제 ‘그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이 나라 전체를 감싼다.’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속삭여 봅니다.

모든 사람, 모든 공간이 밝은 빛 속에 있다.  

모든 사람, 모든 공간이 밝은 빛 속에 있다.

(bbs불교방송, 마음으로 듣는 음악, 명상 방법문)

 

 

불교명상을 하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전통적으로 대표적인 명상방법이 사마타위빠사나수행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간화선이 대표적 명상방법이다. 그런데 위의 명상은 어떤 방법일까. 누가 만들어 낸 것일까. 어떤 경전에 근거한 방법일까.

 

일반적으로 사마타 명상은 대상과 일치하도록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하고, 위빠사나 명상은 이와 반대로 대상을 분리하여 단지 있는 그대로 지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라는 대상을 만들어 내어 그 대상에 몰입하는 명상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 모든 공간이 밝은 빛 속에 있다....”라고 속삭이라한다. 과연 빛을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일까.

 

초기불교 경전의 주석서인 청정도론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스승이 없이도 수행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설명하여 놓았다. 이를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라 한다. 그 중 다섯번 째 청정의 단계가 도와 도가 아닌 것에 대한 구별하는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이다. 이를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라고 한다.  어떤 현상을 바르게 알아야 할까. 보통 10가지로 정리된다.

 

 

1)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함(광명, 光明, ochasa, 오차사)
2)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듯이 이해됨(,
, ñāa, 냐나)
3)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겨남(희열, , piiti, 피띠)
4) 몸과 마음은 아주 안정되어 편안해짐(경안, 輕安, passaddhi, 빳사디)
5)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즐거움, 樂, sukha, 수카)
6) 강한 신심이 생겨나기도 함(신심, 勝解, adhimokkha, 아디목카)
7) 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함(노력, 努力, paggaho, 빡가호)
8) 흔들림 없는 마음챙김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음( 現起 upatthana, 우빳타나)
9)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은 더욱더 무덤덤해짐(평안, , upekkha, 우뻭카)
10) 이러한 제 현상들에 대하에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남(욕구, 欲求 nikanti, 니깐띠)

 

 

이를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열가지 번뇌라 하여 십관수염(十觀隨染)이라고도 한다.  마치 도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도가 아닌 현상으로서 가장 첫 번째로 나타나는 현상이 을 보는 것이라 한다.

 

그 빛을 보았을 때 , 나는  () 얻었다. 나는 과() 얻었다라고 착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집착하고, 깨달음이 아닌 것을 깨달음()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나가 있다고 생각하여 발생되는 번뇌로서 놓아버려할 대상으로 본다. , 빛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에 의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경전에 근거한 것일까

 

다음으로 경전적 근거가 불분명한 것이 치유의 기도라는 것이다. 이 것 역시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매번 낭송 되고 있다. 그 치유의 기도문이라 어떤 것일까.

 

 

치유의 기도

 

모든 중생들을 위해 지금까지 무수한

붓다들께서 출현하셨지만

붓다들이 제 곁에 있다 하더라도

제 눈이 어둡고 어리석어

아직도 직접 부처님들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오늘은 건강하고 먹을 것도 있고 큰 어려움이 없다 해도

삶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이 몸은 이 생애 잠시 빌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선업을 지을 수 있는 인연과 기도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났을 때에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부터 이 몸을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나룻배로 여기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저는 이렇게  발원합니다.

 

몸과 마음 정신 어디에 함께 있든 우리의 모든 고통이

불성의 밝고 투명한 빛 속에 녹아 들게 하소서.

전생에서 얻었던 모든 기쁨과 지혜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전생에서 느꼈던 모든 슬픔과 두려움, 질병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이번 생에서 얻었던 모든 기쁨과 지혜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슬픔과 두려움, 질병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제가 무엇을 하든지 결코 남들에게 해가 되지 말고

누구든지 저를 만날 때마다 좋은 이익 얻게 되소서.

사람들이 저에게 화를 내든 칭찬을 하든

그것이 곧 그들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원인이 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저를  비난하며 해치거나 모욕을 주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기 바라며 오히려 그로 인해 깨달음 얻으소서

 

전 생애를 통해 나와 인연 지은 모든 존재들에게

부족했던 지난날을 용서바랍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bbs불교방송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이 기도문은 아픈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제목 부터 유신적이고 타력적인 요소가 다분한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도라는 용어는 사람이 하느님, , 초월적 영역, 초자연적 세력 등 신성하거나 거룩한 존재와 대화하는 행위”로 사전적으로 풀이 되어 있다. 이 기도문에서도 역시 빛이 등장한다. 그 빛은 불성의 밝고 환한빛이라 한다.

 

이 기도문 역시 어떤 경전에 근거한 것일까. 경전적 근거도 불투명하고“~하소서형식으로 끝나는 이 기도문은 대상을 유일신교의 그 것으로 바꾸어 넣어도 전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불교경전에 환자를 위한 좋은 글은 없을까.

 

병상의 환우를 위한 경, 기리마난다경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의 저자 일아 스님은 불교tv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것을 읽으면 내가 직접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볼 수 있습니다. 이 것을 읽으면 직접 옆에 있는 부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것을 읽으면 불교의 근본 교리들이 아주 자세하게 철저하게 나와 있습니다.

 (일아스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저자,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2&PID=P385&DPID=51200

 

 

이처럼 초기불교의 경전은 마치 부처님을 면전에서 보는 것처럼, 마치 옆에 계신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84천 법문중에 병이 난 환자를 위해서 설한 말씀이 없을 수가 없다.

 

병상의 환우를 위한 경을 알게 되었다. 종종 들르는 이웃사이트를 통해서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깔라야나미따명상선원의 카페(http://cafe.daum.net/kalyanamitta/4mw3/268)에서 발견한 것은 기리마난다경( Girimananda Sutta)이다.

 

기리마난다경은 앙굿따라니까야(AN10.60)에 나오는 부처님의 교설로서 병석에 누워 있는 부처님의 제자인 기리마난다를 위해서 설해준 가르침이다. 이 교설을 아난이 병문안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자 기리마난다는 병에서 씻은 듯이 나은 기적을 보였다 한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

 

 

 

 

 

 

 

사진 ; http://ti-sarana.blogspot.com/2008/06/10.html

 

 

 

 

기리마난다 경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 무렵에 기리마난다존자가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기리마난다 존자가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연민하는 마음을 내시어 기리마난다존자를 직접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난다여,

만일 그대가 기리마난다 비구에게 가서 열 가지 인식에 대해 말해준다면 , 기리마난다 비구는 열가지 인식에 대해 듣자마자 병이 즉시 가라앉게 될 것이다.

 

무엇이 열인가?”
 

오온에 대해 무상(無常)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부정(
不淨)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위험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버림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소멸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1.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오온에 대해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이와 같이 숙고한다

 

물질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인식은 무상하다. 심리현상들은 무상하다. 알음알이는 무상하다.’라고. 이처럼 이들 다섯가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무더기들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오온에 대해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2.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이와 같이 숙고한다.

 

눈은 무아요 형상은 무아다. 귀는 무아요 소리는 무아다. 코는 무아요 냄새는 무아다. 혀는 무아요 맛은 무아다. 몸은 무아요 감촉은 무아다. 마노는 무아요 법은 무아다.’라고. 이처럼 이들 여섯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에 대해 무아를 관찰하면서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3.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부정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이 몸은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차 있음을 반조한다.

 

이 몸에는 머리털. 몸털. 손발톱. . 살갗. . 힘줄. . 골수. 콩팥. 염통. . 늑막. 지라. 허파. 창자. 장간막. . . 쓸개즙. 가래. 고름. . . 굳기름. 눈물. 피부의 기름기. . 콧물. 관절활액. 오줌 등이 있다.’라고. 이처럼 이 몸에 대해 부정함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부정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4.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위험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 집으로 가서 이와 같이 숙고한다.

 

이 몸에는 많은 괴로움과 많은 위험이 있다. 이 몸에는 여러 가지 병이 생기나니, 눈병, 귓병, 콧병, 혀의 병, 몸살, 두통, 바깥귀의 병, 입병, 치통, 기침, 천식, 콧물감기, 발열, 열병, 위장병, 기절, 설사, 격통, 콜레라, 나병, 종기, 피부병, 폐결핵, 간질, 피부염, 가려움, 딱지, 습진, 개선(), 황달, 당뇨병, 치질, 부스럼, 궤양, 담즙에 기인한 병, 점액에 기인한 병, 바람에 기인한 병, 합병증, 환절기로 인한 병, 자세의 부조화에 기인한 병, 다른 이로부터 받은 상해로 생긴 병, 업의 과보로 생긴 병, 차가움, 더움, 배고픔, 목마름, 대변, 소변이다.’이처럼, 이 몸에서 위험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위험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5.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버림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일어난 악의에 찬 생각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일어난 해코지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버림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6.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이와 같이 숙고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나니, 그것은 바로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빛바램이요, 열반이다.’라고.

 

아난다여,

이를 일러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7.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소멸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 집으로 가서 이와 같이 숙고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나니, 그것은 바로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빛바램이요, 열반이다.’라고.

 

아난다여,

이를 일러 소멸을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8.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세상에 대한 집착과 취착, 그리고 그런 마음의 결심과 천착과 잠재성향들을 제거하고 기뻐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이라 한다.” 

  

9.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한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라 한다.” 


10.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는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는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④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⑩ ‘마음을 기뻐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마음을 기뻐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라 한다.”  

 

 

아난다여, 만일 그대가 기리마난다 비구에게 가서 이러한 열가지 인식에 대해 말해준다면, 기리마난다 비구는 이러한 열가지 인식에 대해 듣자마자 병이 즉시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이러한 열 가지 인식을 받아 지니고 기리마난다 존자에게 갔다. 가서는 기리마난다 존자에게 이러한 열 가지 인식을 말해 주었다.

 

그때 기리마난다 존자는 이러한 열가지 인식에 대해 듣자마자 병이 즉시 가라앉았고, 기리마난다 존자는 병석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기리마난다 존자는 그 병에서 완쾌되었다


(
앙굿따라 니까야, 기리마난다경, Girimananda Sutta,  AN10.60, 각묵스님 번역)

 

 

 

기리마난다 경(Girimananda sutta).docx

 

기리마난다 경_Girimananda sutta).pdf

 

빠알리 챈팅

Girimananda Sutta

http://www.sobhana.net/audio/chants/chandakitthi/index.htm

 

 

위 해석문은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각묵스님의 번역문이다. 이 가르침에서 핵심은 오온이 무상함을 인식 하는 것등에 대한 10가지 인식에 대한 것이다. 별다른 발원문이나 기도문 없이도 10가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함으로서 병이 쾌유된 것이다.

 

보호주(paritta, 빠릿따)로서

 

누구나 몸이 아프면 병이 빨리 낫기를 바란다. 그 병이 중병이라면, 더구나 임종에 이를 정도로 중하다면 마치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떤 대상에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중병에 걸렸거나 임종에 이른 불자들이 막판에 유일신교로 개종하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이는 환자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마땅한 불교적 가르침을 접할 수 없었다는 것과 같다. bbs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에서 치유의 기도가 있지만 이는 유신론적이고 타력적 요소로 인하여 오히려 유일신교의 그것과 가까워 보이는 단점이 있다. 이런 때 초기불교 경전에서 보는 기리마난다경의 가르침은 병이 난 불자들에게 매우 좋은 가르침이다. 그래서 일까. 이 기리마난다경은 테라와다 전통의 불교국가에서 보호주(paritta, 빠릿따)로서 낭송된다고 한다.

 

위빠사나 와 병의 치유

 

어떤 약물 치료 없이 단지 인식의 전환만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기리마난다경이다. 오온이 무상하고, 모든 형성된 것들이 무상하다는 등의 10가지 가르침 중에 맨 마지막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에 주목한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와 병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책에서 발견하였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우 쿤달라 비왐사지음, 행복한 숲)’에 따르면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한다.

둘째, 안정되고 균형 잡힌 마음이 된다.

셋째, 병이 치유된다.

넷째, 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 진다.

다섯째, 수행자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으로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궁극적으로 성스런 법을 얻는다.

 

 

이 중 세번째의 병이 치유된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의 기리마난다경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기리마난다경에서 10가지 인식의 변환이 병이 나을 수 있는 요인이라 하였는데, 그 중에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과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다. 알아차림을 유지 하는 것이 정말로 병이 나을 수 있을까.

 

통증과 알아차림

 

흔히 사람들은 아프면 아파 죽겠다고 말한다. 좋아도 좋아 죽겠다고 말한다. “죽겟다는 말을 붙이는 것은 갈애의 표현이다. 아픔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고, 좋은 것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갈애와 집착은 고통의 원인이라고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누차 말씀 하였다. 따라서 갈애와 집착을 끊으면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아파 죽겠다고 하였을 때, 단지 아픈 것으로 끝내야 한다.

 

아픈 것의 대명사는 통증이다. 그런 통증도 갖가지이다. 그런데 그런 통증이 항상 계속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지듯이 아무리 아픈 통증도 일어 났다 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통증이 일어 났을 때 알아차리면 통증에서 해방 될 수 있다. 이런 사항에 대하여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통증이 강해 지면 그 느낌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그 위치가 뼈가 될 수도 있고, 혈관이 될 수 도 있다.

 

만일 두통이라면 머리의 뒷골에 꿰뚫어 보듯이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통증이 어떻게 시작 되었고, 통증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통증의 크기를 재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꿰뚫어 지듯이 지켜 보면서 “통증, 통증” “쑤심, 쑤심”하고 알아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알아차린다. 네번에서 다섯번 알아 차릴 때 통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계속 알아차리면 그 후부터 자연스럽게 통증은 줄어 든다는 것이다.

 

통증이 증가할 때 네번에서 다섯번 알아차리고 나면 통증이 줄어드는 것이 통증의 성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라지는 성품을 이해 하는 지혜가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 세번째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이고 괴로운 느낌, 즉 성냄을 극복 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우 쿤달라 비왐사지음, 행복한 숲)

 

 

이처럼 통증마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어서 이를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면 통증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모든 병의 통증은 이처럼 알아차림 하나만 가지면 극복 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치유의 기도문대신 기리마난다경

 

우리나라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잘 모른다.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석가모니의 부처님보다 대승불교의 신격화되고 초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만 접하다 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였던 주옥 같은 84천 법문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러나 초기불교경전인 니까야가 속속 번역 되면서 부처님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그런 부처님은 너무나 친근하고 인간적인 부처님이다. 그런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을 읽고 있으면 바로 옆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와 같은 경전 중의 하나가 아픈 이 들을 위한 기리마난다경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불교경전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환자를 위한 경은 물론, 우정에 관한 경, 여성을 위한 경, 청소년들이 들을 만한 경, 수행에 관한 경등 부처님이 설한 84천 법문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훌륭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 음악프로에서 경전적 근거가 불투명한 치유의 기도처럼 유신적이고 타력적인 기도문이 낭송 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언제나 치유의 기도문 대신 기리마난다경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이 낭송 될 날이 있을까.

 

 

 

2010-12-08

진흙속의연꽃

 

 

 

 

 

 

기리마난다 경(Girimananda sutta).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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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마난다 경_Girimananda sutta).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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